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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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시각계는 빛의 패턴을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수십억 개의 신경을 계산한 결과를 바탕으로 해석을 보여준다. 뇌는 과거 우리가 보았던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보게 될 사물의 형태를 예상한다. 우리의 숱한 판단 착오부터 귀신이나 UFO를 봤다는 착각도 이에 기인한다. 자세한 얘기는 차차하게 될 테지만 뇌는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만든다.

 

「뇌의 무의식계는 인식한 조각을 모두 모아 패턴을 예상하고 필요할 때는 빈틈도 알아서 메운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의미 있는 해석을 하게 된다. 무의식계는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의식계도 같은 이야기를 경험하되 곰곰이 되풀이해 생각해보고, 심지어는 맞는지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뇌의 다른 영역은 멀쩡히 작동하지만 이마앞엽겉질만 손상된 환자들이 만들어내는 시나리오에서는 자기숙고라는 이마앞엽겉질의 인지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의식의 감독을 받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의 빈틈 메우기 과정은 중간 점검 없이 예측하고, 경험 조각을 모으며, 심하면 말도 안 되는 해석과 기괴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뇌가 손상되었을 때에만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사고, 기억, 두려움, 바람 등에 맞춰 무의식이 이은 조각보가 우리의 정신을 차지하고 은유적인 이야기까지 탄생한다. 우리의 꿈이 대체로 기괴한 이유이다. 또한 고차원적인 의사결정이나 자기숙고에 개입하는 이마앞옆겉질이 밤에 휴먼 상태에 빠지는 것도 그에 일조한다. 케테 콜비츠와 루이스 캐럴의 기록을 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을 앓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들 작품에서 그러한 증상을 감지할 수 있다.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가 예술과 문학에서 추앙하는 상상력과 표현력의 큰 근거는 흔히 연결짓는 ‘광기’가 아니라 뇌의 여러 증상이 발현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환각’이라고 하면 정신질환, 신경질환, 불법 약물 등을 떠올리기 쉽지만 시각적 환각 증상이 많이 생기는 찰스보닛증후군 환자에게는 신경학적 문제가 아니라 시각적 문제 때문이다. 안톤증후군 환자는 시각계와 그것을 감독하는 상위 계층의 감각 영역 사이의 연결이 끊어져 있어 시각겉질이 타협하는 순간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시각에 문제가 없다고 착각한다. 찰스보닛증후군 환자처럼 방출 환각이 생기면 뇌는 진짜 시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만든 이미지를 진짜로 본 것이라고 착각한다. “찰스보닛증후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 대뇌다리환각증의 환각은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겹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겹침 현상은 무의식 회로가 만든 꿈이 잠들지 않은 의식에 침입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생겨난다.”

뇌는 감각 경로의 상호 교차를 허용하고 감각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을 때 입 모양을 보면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다.” 요즘처럼 코로나19로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대화할 때 답답함을 느낄 텐데 바로 이 때문이다. “시야를 이루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눈을 통한 시각적 탐지가 아니라 그런 시각적 탐지와 관련된 의식적 경험일지도 모른다.”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습관인지, 의식인지에 따라 선수의 성적이 바뀐다는 사실은 뇌에는 행동을 지배하는 두 개의 평행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충분히 많이 연습하면 습관 체계에 통제권이 넘어가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의식의 비습관 체계는 그 행동에서 해방되어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멀티태스킹 존재지만 이 시스템이 항상 잘 돌아가는 건 아니다.

 

「뇌에 정보를 저장하고 검색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억을 절차기억(procedural memory)과 사건기억(episodic memory)으로 나누는 것이다. 절차기억은 방법에 대한 기억으로 자전거 타는 방법, 매듭 묶는 방법, 키보드 치는 방법, 운전하는 방법 등이 해당된다. 행동 절차를 많이 연습할수록 절차기억도 강해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건기억은 과거의 경험, 감정, 장소, 집에 오는 길에 우유를 사오기로 하는 일과 같은 생각 등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평생 일어난 여러 사건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절차기억과 사건기억은 저장하는 정보 유형도 다르지만 일어나는 뇌의 영역도 서로 다르다. 사건기억은 뇌 안쪽 깊숙이 관자엽 옆에 위치한 해마에 저장된다. 사건기억은 습관화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활성화되고 십자형 미로 속의 생쥐처럼 습관적 행동을 할 때는 잠잠하다. 반대로 절차기억은 바깥줄무늬체에서 일어난다. 이곳이 습관 형성을 책임지는 영역과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습관적 행동은 바깥줄무늬체의 담당이고, 해마는 습관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해마를 비활성화시켜도 실험쥐가 무의식적으로 길을 찾아 움직이는 데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습관 체계를 이용해 행동하면 그 행동에 대한 기억은 사건기억을 이용하는 해마에는 저장되지 않는다. 출근길 운전자가 그날 아침 운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동은 사건기억에 저장되지 않으면 그 행동과 관련된 이미지(옥외광고판 등), 소리, 감정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행동은 습관적 절차를 조용히 강화한다. 그것이 전부다. 습관은 사건기억에 정보를 기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건기억에서 정보를 가져오지도 못한다. 사건기억에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많은 것들을 깜빡 깜빡 하는 이유다.

상상과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심상 훈련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믿을만한 연습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졌다. 단 조건이 있다. 저자는 뇌과학자였던 질 테일러가 뇌질환을 앓고 회복하며 도움된 기법을 담은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에서의 오류도 지적한다. “심상 훈련이 뇌중풍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질 테일러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 효과가 없는 것일까? 부상 선수와 뇌중풍 환자 모두 근육이 약해진 것은 똑같은데, 왜 심상 훈련이 선수에게는 효과가 있고 뇌중풍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는가? 이쯤에서 심상 훈련이 운동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심상 훈련이 자극하는 뇌 영역은 신체 동작에 영향을 미치는 뇌 영역과 똑같다. 심상 훈련이 성공하려면 먼저 운동겉질에서 근육까지의 신경 경로가 온전해야 한다.”

뇌가 손상되면 정체성의 여러 부분, 즉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는 능력,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기억, 인격의 일관성, 자신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는 능력, 사고와 행동에 대한 통제감 등이 파괴되는 걸 볼 수 있다. 뇌는 우리가 ‘인간’이자 ‘나’일 수 있는 시스템이다.

 

「거울신경은 하품 전염과 관련 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사회적 친밀함도 하품의 전염성을 높인다면 사회적 친밀함과 거울신경의 활동에 서로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많은 신경과학자는 거울신경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머릿속으로 흉내내는 것이 그 순간의 경험을 체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주위 사람을 이해해야 할 때 흔히 하는 말처럼 거울신경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기억은 우리라는 사람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우리의 개인사는 우리의 자아상을 만들고 저장된 지식을 모은다. 무의식계는 기억을 암호화하면서 우리의 인격도 형성한다. 무의식은 비디오카메라처럼 경험을 있는 그대로 담지 않는다. 대신 무의식은 그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이 맡은 역할에,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 집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 순간의 감정은 무엇인지, 무엇을 기대하고 두려워하는지, 그 순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맥락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맥락을 바탕으로 뇌는 초고를 쓰기 시작한다.」

                                      

「우리는 감정을 발산한 순간을 기억한다. 9/11 테러 공격 뉴스를 들었을 때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장본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세계를 격동시킨 뉴스를 들었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의 인생사에 한 축을 차지했다. 그날 그의 하루에서 스타벅스에 있었던 것은 중요한 요소였던 반면, 세계무역센터가 정확히 몇 시에 공격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뇌는 개인사를 담은 스냅사진을 배열할 때 자아를 보호하는 방식을 자주 따른다. 뇌의 무의식을 뉴스 채널이라고 한다면 이는 한쪽으로 치우친 뉴스 채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원이 진보 성향의 텔레비전을 자주 시청하고 공화당원이 보수 성향의 라디오 대담을 청취할 때가 많은 것처럼 뇌의 무의식계는 우리의 자아인식과 세계관에 들어맞는 경험을 합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뇌는 우리의 관점이 유지되게 도와준다. 뇌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을 담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가끔은 시간 순서를 조금씩 뒤섞거나 우리가 믿고 싶은 이야기와 맞지 않는 사소한 세부 사항을 멋대로 생략한다. 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적 사고와 결정 능력을 보호하기 위한 매우 건강하고 적응적인 기제다. 기억억제는 뇌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생략 오차를 사용하는지 알려주는 극단적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억억제가 감정적 트라우마에서 자아를 보호하듯이 말짓기증은 기억 손상이나 혼동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경학적으로도 이치에 맞는 추론이다. 말짓기증은 보통 자기중심 사고를 책임지는 안쪽관자엽의 손상으로 생긴다. 안쪽관자엽은 열혈 대학 농구팬이 경기를 보면서 선수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점화되는 영역이다. 안쪽관자엽이 손상되면 자아의식에 위협을 느낀다. 어쩌면 말짓기증은 뇌가 그런 자아의식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는 신체적 증상들은 곧장 현실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외계인에 납치되어 생체 실험이나 강간을 당했다는 주장이 비슷비슷한 것은 ‘수면마비’ 증상으로 보인다. “수면마비는 종종 환시와 환청도 함께 가져온다. 수면마비가 왔을 때 이상한 소리를 내지만 나중에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선뜻 알아내지 못한다. 방에서 섬뜩한 존재가 보이거나 낯선 존재가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환각은 으레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심하게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까지 갖는다. 그러면서 수면마비의 환각 경험은 의식이 있는 상태의 악몽으로 변한다.”

‘영적 체험’도 신경학적으로는 다르게 본다. “신경과 의사는 관자엽 뇌전증을 앓는 환자들이 겪는 증상을 “과종교증(hyperreligiosity)”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관자엽 뇌전증 환자 100명 가운데 한 명에서 네 명은 로버트가 본 것 같은 하늘의 존재가 등장하는 종교적 허상이나 각성 상태를 경험한다. 어떤 환자는 발작의 영향이 이마엽까지 미쳐 행동방식이 영원히 변하게 된다. 종교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실천하는 신도가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관자엽 뇌전증이 원인이 되어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빈센트 반 고흐도 관자엽 뇌전증 증상을 많이 보였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등 여러 번 종교적 환상에 빠졌다. 마이클 가자니가는 모세, 마호메트, 부처 등 종교적 상징 인물도 그들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대 같은 질병을 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밝은 빛을 보았고, 환희를 느꼈으며, 우주의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는 ‘임사 체험’도 심장마비 생존자나 전투기 조종사가 뇌의 산소 결핍에서 겪은 환상이나 뇌와 눈으로 향하는 혈류가 줄어들어서 겪는 렘방해 상태와 유사했다.

‘카프그라증후군’은 주변인 모두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가짜로 바꿔치기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감정적으로 강렬한 기억은 더 확신하며 떠올리고 이야기에 구멍이 있다는 생각은 거부한다.” 외계인이나 신을 만났다거나 사후세계를 봤다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지적을 했을 때 화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기이한 경험에는 기이한 해석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뇌는 외계인 납치 같은 해석을 생각해낸다. 정말로 이상하지만 그것이 딱 맞는 설명이다. 이런 해석에는 감정적 경험을 풀이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건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무의식계의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왜 조현병 환자들이 이상한 기술(광선총이나 헬륨 전류)이나 종교적 존재(성령이나 악마)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고 말하는지, 왜 그들이 텔레비전 등장인물(패트릭 더피)이나 가상 인물(존스 씨)과 소통한다고 주장하는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불가사의한 힘이 머릿속에서 혼란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뇌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믿고 싶은 것에 알맞은 해석을 만들어낸다. 종교적 믿음이 강한 사람은 머릿속 목소리가 신성한 존재의 목소리라 주장하고, 스릴러 소설 애독자는 FBI나 CIA 요원에게 감시당한다고 걱정한다.” 음모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자신의 예측이 맞았을 때 “거 봐라.” 하지만 더 많은 예측 오류는 눈 감는다. 우리는 진정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 있고 이용할 수도 있다. 진정 나를 위해서라도.

 

「왜 무의식계는 완전한 서사를 유지하려 하는가? 왜 무의식계는 혼란스럽거나 모순된 경험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해석을 만들어내는가? 이유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주변 세상의 질서와 체계를, 그리고 그 세상 안에서 우리가 처한 위치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있다. 욕구와 욕망을 고민하고,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려면 자신의 개인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개인사를 되돌아보면서 스스로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기억 상실, 인지나 사고의 빈틈, 모순된 경험, 외적 파괴 등은 뇌가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개인의 서사에 위협을 가한다. 무의식계는 자아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해야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극단적 행동도 일삼는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뇌는 자아를 유지한다는 목표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자아를 분열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의식계 덕분에 뇌가 만드는 이야기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러면 무의식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무의식계는 그런 이야기를 만든다. 무의식계는 단편으로 끊어진 경험 조각들을 끌어와 필요하면 빈틈을 메우고 우리의 인생사를 순서대로 배열한다. 무의식계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구축한다. 또한 자아의식을 보호하고 유지하며, 심지어는 분열까지 이용해 나쁜 생각과 기억을 몰아낸다.

왜 그러는가? 정체성을 그토록 신성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화적 관점에서 말하면 자기숙고를 하는 유기체일수록 생존 확률이 높다. 우리는 생존을 중요시하며, 자신과 후손을 보호하는 데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다. 뇌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유지해주기에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통찰할 수 있다. 뇌의 도움으로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고, 곰곰이 추론하고, 결정을 심사숙고하고, 목표와 욕구에 딱 들어맞는 행동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정체성을 파악할 때 자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뇌가 건강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유지하는 일에 특히 중점을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매 순간마다 뇌의 바탕에 깔린 논리 회로는 쌓아온 경험을 흡수하고 빈틈없이 조사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성숙하게 만들고 개선하기 위해서다. 깨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매일 밤 꿈을 꾸는 동안에도 무의식이 골몰하는 목표는 같을 수 있다. 일부 신경학자들은 꿈에 자아의식 발달을 돕는 기능이 있다는 가설을 말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꿈이 항상 1인칭 시점인 것일지도 모른다. 꿈은 행동을 하고 직접 관찰을 하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미리 알아보는 예행연습이다. 꿈은 자아의식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종합해보면 이 책은 뇌를 의식계와 무의식계라는 두 평행 시스템으로 본 개념, 정체성이나 자아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 이론을 계승 발전시켰고(《워싱턴 포스트》 수석 편집장 메리엔 세게디의 평), 감각 지각부터 습관, 최면, 언어, 학습에 이르기까지 뇌의 작동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뇌과학 백과사전(V. S. 라마찬드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등의 평)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 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인간의 판단과 행동이 비논리적인 이유를 또 한 번 밝히며(마이클 셔머의 평), ‘올리버 색스의 발자취를 좇으면서도 그만의 새롭고 참신한 호소력으로 새로운 신경과학 교양서’(예일의학대학 교수 할 블루먼펠드의 평)의 모범을 보여줬다. 내게도 지금껏 읽었던 신경과학 책의 종합이었다. 뇌과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은 분명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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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3-1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무의식>을 읽었었는데 흥미로웠죠. 이 책으로 제가 발견한 건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논리적임, 이에요.
뇌와 관련한 것들은 인간을 알게 해 줘서 늘 관심이 갑니다. 소개하신 책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AgalmA 2020-03-16 16:38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읽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책 읽고나니 뇌과학 책은 더 새로운 정보가 나오기 전까지 당분간 안 읽어도 되겠다 싶더군요.
어수선한 날들 평안하시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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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이다.’ - 프로이트

 

 

훌륭한 품성과 재능, 좋은 스승을 알아보는 능력까지 있다면 이런 책이 나오게 된다. 올리버 색스의 신경과학 책은 알렉산드르 R. 루리야의 영향이 매우 컸다. 휴링스 잭슨, 쿠르트 골드슈타인, 헨리 헤드와 함께 알렉산드르 루리야는 신경학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는 그들의 여러 면모가 비판 비교되었는데 색스는 알렉산드르 R. 루리야를 특히 존경해 활발히 서신 교환을 하며 교류했다. 루리야는 신경학 분석에 있어 연구적 저작물 ‘고전적 과학’과 소설에 가까운 전기풍 이야기책 ‘낭만적 과학’이란 이중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의 후기에는 후자에 더 집중했다. 고전적 과학이 담을 수 없었던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을 담은 그의 후기작 『산산히 부서진 세계의 남자』(국내 제목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2008, 도솔)가 상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2007, 갈라파고스, 품절)가 과잉에 대해 다뤘듯이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1985) 글의 줄기도 그러하고, 『깨어남』(1973)도 “엘도파를 투여하기 전의 놀라운 결핍 상태(운동불능증, 무의지증, 무력증, 무반응증 등)와 엘도파 투여 후의 무서운 과잉 상태(운동과다증, 과다의지증, 과다수축 등)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 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공통점은 병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중심에 놓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사(이야기)가 필요했다.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습관은 19세기에 절정을 이룬 후, 신경학이라는 객관적인 과학의 도래와 함께 쇠퇴하였다. 루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글로 남기는 힘, 이것은 19세기의 위대한 신경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보편적인 자질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 우리는 이 힘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루리야가 각각의 환자에 긴 세월 전념하며 책을 썼듯이 올리버 색스의 모든 책이 환자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던 것도 이런 신념에 기반한다. 우리가 뇌와 정신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건 160년도 되지 않는다.

 

 

「뇌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86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브로카가 뇌 좌반구의 특정 부위에 손상이 생기면 그에 해당하는 특정한 장애 즉 언어상실증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대뇌신경학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그후 수십 년에 걸쳐 사람 뇌의 ‘지도’가 그려짐에 따라 언어, 지각 등의 능력은 각각 그에 해당하는 뇌의 특정 ‘중추’들이 관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세기 끝 무렵이 되자, 좀더 예리한 관찰자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특히 프로이트는 자신의 책 《언어상실증》에서 기존의 뇌 지도가 지나치게 단순하며, 모든 정신활동에는 매우 복잡한 내적 구조가 있고 그와 똑같이 매우 복잡한 생리학적 원리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인지나 지각 능력에 발생하는 특정한 장애를 연구하면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인식불능증’이란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언어상실증이나 인식불능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좀더 새롭고 세련된 과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로이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과학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러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A. R. 루리야(그리고 그의 부친 R. A. 루리야), 레온체프, 아노킨, 번스틴과 그 밖의 여러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고, 그것에 ‘신경심리학’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새로운 과학은 루리야의 일생에 걸친 연구에 힘입어 풍부한 결실을 낳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중요성에 비해, 신경심리학이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경심리학은 《인간의 상위뇌피질 기능》(영어판은 1966년)이란 기념비적인 책 안에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또한 일종의 전기 즉 ‘병적학’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영어판은 1972년)에도 실렸다. 이 책들은 그 나름대로 거의 완벽하지만, 루리야가 전혀 손을 못 댄 영역도 있었다. 《인간의 상위뇌피질 기능》은 뇌의 좌반구가 관장하는 기능만을 다루었다. 그리고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의 주인공 자제츠키 역시 좌반구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우반구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경학과 신경심리학의 역사는 좌반구 연구의 역사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열등한’ 반구라고 불리는 멸시를 당할 정도로 우반구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좌반구의 손상 부위와 그에 따른 증상을 밝혀내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었던 데 반해, 우반구의 각 영역에 해당하는 증후군은 알아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우반구는 좌반구보다 좀더 ‘원시적’인 것으로 비하되곤 했다. 반면 좌반구는 인간의 진화가 만들어낸 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주장이 옳다. 좀더 정교하고 전문화되어 있으며 영장류의 뇌, 특히 인간의 뇌에서는 가장 나중에 발달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 즉 생명체가 생존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능력을 담당하는 것은 우반구이다. 이 우반구에 컴퓨터가 연결되어 있고 그 컴퓨터에 해당하는 것이 좌반구이기 때문에 이쪽은 말하자면 프로그램과 도식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정신학은 사실보다 도식 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우반구에 원인을 가진 증후군이 나타나면 그것을 특이하고 기묘한 현상으로 간주했다.」

 

 

색스가 생각하기에 병은 상실이나 과잉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그 자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경장애를 넘어, 병에 걸린 생명체인 개인이 항상 반발하고 다시 일어서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며 주체성을 지키려는 현상에 주목했다. “정신의학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 즉 수단과 결과가 아무리 기묘하더라도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깨어남』은 어떤 하나의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복구와 재통합’을 묘사한 연구였고, 이후 이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과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복구와 재통합을 다루려 했다.

 

 

「제1부 ‘상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극히 특수한 시각적 ‘인식불능증’의 예, 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임상 보고는 고전적인 신경학에서 공리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기존의 견해에 따르면 뇌의 손상은 그것이 어떠한 손상이든 ‘추상적·범주적인 태도’(이것은 쿠르트 골드슈타인의 용어이다)를 마비, 상실시킨다. 이것이 마비 또는 상실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감정과 구체적·즉흥적인 태도뿐이라는 것이다(1860년대의 휴링스 잭슨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음악가 P선생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그는 감정, 구체성, 개인적인 것, 현실적인 것 모두를 잃어버리고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은 시각의 세계에 대해서 뿐이지만) 추상적·범주적인 것만을 부둥켜안고 살며 극히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곤 했던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신경학이나 심리학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만, ‘판단’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력의 결함(P선생처럼 특수한 영역의 장애도, 그리고 더 일반적인 장애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즉 이마엽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정체성의 문제〉와 〈예, 신부님, 예, 간호사님〉 참조)이야말로 수많은 신경심리학적 장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나 이런 환자들의 경우에는 개별성을 인식하는 능력과 판단력이 거의 재앙 수준에 가까울 수 있는데도, 신경심리학은 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생긴 원인은 신경학 그 자체가 상정하고 있는 가정들 즉 신경학의 진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학은 고전 물리학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기계적인 성격을 띠어왔다. 뇌를 기계에 비유한 잭슨부터 컴퓨터에 비유하는 오늘날의 신경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무서운 비유일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의 인지신경학과 인지심리학은 P선생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시각인식불능증이나 얼굴인식불능 증세는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만 사는 삶을 누가 원할 것인가. 데이비드 흄처럼 인간을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라 한다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색스의 지적처럼 그것은 정상적인 인간에게 적용할 수 없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고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한 통일을 유지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알코올로 인한 기억 손상이 심한 코르샤코프증후군의 환자를 살펴보자. 인간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감정, 의지, 감수성을 갖고 있는 윤리적인 존재’(알렉산드르 R. 루리야)이기도 하다. 문제는 깨달을 자신마저 잃어버릴 때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마스터》(2012)에 나오는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올리버 색스의 이 책에 소개되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지미(<길 잃은 뱃사람>)와 매우 유사한데 난폭한 코르샤코프증후군의 인물이지만 그들은 정신 집중에 몰두하는 행위(ex 종교)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연속성과 현실성을 되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색스는 자기 정체성의 극복 힘을 믿는다.

 

 

「지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쩌면 그가 ‘흄이 말하는 식’의 거품 같은 존재, 인생의 표피 위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그런 존재로 전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일관성 즉 그가 앓고 있는 흄식의 질병을 초월하는 어떤 길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경험과학에는 그런 길이 없다. 경험과학 즉 경험주의는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개인의 인격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쩌면 진료와 관련된 교훈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교훈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나 치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렸더라도, 혹은 심각한 기질적인 장애나 흄이 말하는 식의 용해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예술이나 교감, 영혼의 접촉을 통한 재통합의 가능성은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 조금이나마 남아 있지 않을까? 신경학적으로는 도저히 희망이 없는 걸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오감 외에도 자신이 자신임을 아는 ‘제육감(고유감각-근육, 힘줄, 관절 등 우리 몸의 움직이는 부분에 의해 전달되는, 연속적이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 1890년대에 셔링턴에 의해 발견됨)’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누구도 제기할 수 없는 우리 몸의 이런 확실성이야말로 모든 지식과 확실성의 출발점이자 기초’라고 생각했고 『확실성에 대해서』에서는 ‘우리 몸의 확실성을 빼앗아버리는 원인, 조건, 상황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고유감각을 잃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드러나는 장애가 없어 종종 거짓말쟁이나 얼간이로 취급되는데, 이들이 느끼는 ‘존재 상실감’ 혹은 ‘비현실감’은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것을 잃어버린 상태와 같았다. 편마비 증상으로 자신의 팔다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신체 이미지 장애’ 환자 경우 동작과 지각이 완전히 어긋나 버려 실존적 궁지에 빠진다.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다. 언어상실증 환자나 음색인식불능증 환자는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모든 표정(말투, 리듬, 박자, 음악성, 미묘한 억양, 음조의 변화, 높낮이) 등을 날카롭게 파악해 보통 사람보다 더욱 뛰어난 표정 이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손이 마냥 장애인 것은 아닌 셈이다. 신경학에서는 기능하든지 기능하지 않든지 두 가지 가능성에 주력해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의 반대 상태인 기능의 과잉이나 잉여는 엄밀히 따지면 신경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능의 과잉에서 오는 질환을 논하는 것은 신경학의 기본개념에 대한 도전이다. 자주 볼 수 있고 흥미롭기까지 한 이와 같은 질환에 당연히 기울여야 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환도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주목을 받고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흥분성 장애나 생산적인 질환(상상력 과잉, 충동 과잉, 조증燥症 등)을 질환으로 문제삼는다. 해부학과 병리학에서도 비대와 기형, 기형종과 같은 말을 사용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생리학에는 그런 말이 없다. 기형종이나 조증에 해당하는 과잉을 가리키는 말이 없는 것이다. 이것만 생각하더라도 신경계를 기계나 컴퓨터로 간주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개념과 비전은 지극히 편협하다. 따라서 좀더 유연하고 현실에 맞게 개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제1부에서 다룬 ‘상실’ 즉 기능적 결함에만 주목을 하는 한 그것이 지극히 편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기능의 과잉도 있을 수 있다고 하면, 결손에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억상실증뿐 아니라 기억과다증도 있는 것이다. 인식불능증과 반대되는 인식과다증도 있다. 이 밖에도 ‘과다현상’은 얼마든지 많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신경학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분석하고 결함에 중점을 둔 나머지, 실제 생활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생활이야말로 모든 대뇌 기능의 궁극적 표현이다. 적어도 상상 기능, 기억 기능, 지각 기능과 같은 고도의 기능이 거기에 나타난다. 기존의 신경학은 결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신생활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실제의 뇌와 정신 상태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뇌와 정신이 고양된 상태, 과도하게 활발한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병은 단순히 결손적 기능 장애가 아니다. 도취나 흥분에 대한 광적인 탐님 등 과잉의 상황도 나타나는데 이때 “자아가 병과 제휴를 맺고 한 몸이 되어 독립된 존재이기를 포기하고 병의 산물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1885년 질 드 라 투렛이 발견한 투렛 증후군은 기묘한 동작이나 생각이 과잉 현상을 보이는 신경학적 장애다. 정서, 본능, 상상에 관련된 모든 면에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면병 환자(기면성뇌염후 증후군)이나 투렛 증후군은 기존 의학 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해 제대로 분석되지 못한 채 잊혔다. 두 증상이 운동과다장애 즉 과도한 흥분 증세의 공통점이 있다는 건 최근에 다시 주목되었다. 이 두 증후군에 대한 건 색스의 『깨어남』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흥분과 충동 강박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병리 상태는 역설적인 행복감이다. 발작적 회상이 주는 행복감도 있고, 마음의 평온과 순수한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간질도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병리 상태이든 정상 상태이든 우리가 탄 배는 ‘나는 누구인가-정체성’을 향한다.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이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傳記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감각・사고・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와 같은 이야기에 대한 필요성, 아마도 그것이 톰슨 씨가 장광설 만들기에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이기도 할 것이다. 연속성, 즉 연속적인 내면의 이야기의 상실이 그를 일종의 이야기광이 되게끔 내몬 것이다. 끊임없이 말할 수밖에 없고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껄이며 몽상을 말한다. 진실한 이야기 혹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의 내적 세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것이다. 가짜 인간들 즉 유령들이 사는 가짜 세상 속에서 그리고 가짜 연속성 속에서 가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상태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색스의 표현대로라면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건강’한 것이 아니라 병과 싸우고 이겨내는 의지력이 ‘건강’이라 하겠다. 우리는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며 무언가에 의해 끊임없이 규제된다. 우리는 인간이 ‘신경기능과 신경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복잡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사고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라고 여기지만 기질적인 병의 개입으로 변화할 때도 있다. 3부에서는 그러한 환자들이 소개되었다. “제3부의 주제는 관자엽과 변연계에 특이한 자극을 가한 결과 발생하는, 사람을 과거로 이행시키는 심상과 기억의 힘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뇌 속이 어떻게 될 때 환영과 꿈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다.

 

 

「‘무의식의 기억’에 대한 훌륭한 저서를 남긴 에스더 살라만은 자신의 책에서 ‘어린 시절의 신성하고 귀중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 혹은 그것을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역설했다(《순간순간들》, (1970년)). 만일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면 인생은 아주 무미건조하고 근거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고 한다. 그러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얻는 깊은 환희와 존재감에 대해,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 등의 자서전에서 많은 인용문을 뽑아 논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살 수 없는 망명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학창시절도, 암페타민에 찌들었던 시절도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때와 비슷한 일은 그 이후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촉망받는 젊은 내과전문의가 된 스티븐은 친구이자 동료로서 나와 함께 뉴욕에서 일하고 있다. 후회랄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그는 때때로 향수에 잠기곤 한다.

“냄새로 가득 찬 세계, 너무도 생생하고 너무도 현실적인 그런 세계였답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어요. 순수한 지각의 세상, 모든 게 선명하고 생기 있는, 자족적이고 충만한 그런 세상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은 든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후각에 대해 인간이 성장하고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억압된 ‘희생양’이라고 쓴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는 인간이 직립을 하고 전생식기 단계의 원초적인 성욕이 억압당하는 과정에서 후각도 함께 억압당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시각이 지나치게(혹은 병리학적으로) 예민해지는 현상은 성도착증, 물품음란증의 경우에 흔히 나타나며 퇴행이나 도착倒錯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실제로도 보고되어왔다. 그러나 스티븐의 예에서 보인 탈억제는 그보다는 훨씬 더 일반적으로 보이며 비록 흥분(아마도 암페타민으로 인해 유발된 흥분일 것이다)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성적인 것이나 성적인 퇴행과 연관된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한 후각과민증(때로 발작을 동반하기도 한다)은 도파민 과민 상태에서도 발생할 수 있고, 뇌염후유증 때문에 엘도파를 투여받는 환자나 투렛 증후군 환자들의 경우에도 발생한다.

어쨌든 억제가 가장 기본적인 지각단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세련되고 범주화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식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헤드가 ‘원시 감각’이라고 이름 붙인 아직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인 느낌에 대한 억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억제의 중요성은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처럼 과소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부는 지적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질’을 더 헤아릴 것을 강조한다. 관념적·추상적 능력이 지능의 우위일까. 이 장에서 소개되는 지적 장애인들은 구체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이해하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사례였다. 그들을 이해하고 제대로 돕지 못해 상황을 좋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헤아리는 능력은 없지만 비상한 수리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쌍둥이 형제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적응시키려고 억지로 조치를 취해 그들을 그저 우둔한 존재로 만든 경우라든지(<쌍둥이 형제>) 스케치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폐증 소녀에게 가차 없이 치료를 가해 예술능력을 잃게 만든 경우(<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등이다. 백치천재나 자폐증 천재의 재능을 창조적인 인격이나 개인으로서의 인격조차 고려하지 않고 ‘단 하나 남아 있는 능력’이라든가 ‘조각조각 난 단편적인 기술’로밖에 인정하지 않는 건 우리 입장에서의 편견일 수 있다.

 

 

「자폐증 환자는 추상적이고 범주적인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 하나하나가 소중할 뿐이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기질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자폐증 환자에게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자폐증 환자들은 사물을 일반화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일반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세계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우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다중 우주’ 즉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정확하고, 엄청나게 열정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살고 있다. 그것은 ‘일반화’ 혹은 과학적인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존재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리얼한 하나의 현실적 태도이다.」

 

 

「자폐증 환자는 원래 좀처럼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내면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들의 독창성은 내부에서 생긴 것,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내부로 향하는 존재, 독창성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일찍이 자폐증은 유아의 정신분열증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증후학적으로 볼 때 완전히 정반대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항상 외부 세계에서 오는 영향을 호소한다. 소극적이고 타인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반면에 자폐증 환자에게 불만을 토로하게 한다면(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의 영향을 전혀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완전히 고립된 존재라고 호소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섬처럼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라고 존 던은 말했다. 그러나 자폐증 환자들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이다. ‘정통적인’ 자폐증이라면, 그 증상이 3세가 되기 전에 반드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본토’의 기억이 전혀 없다. 반면에 호세처럼 나중에 뇌장애로 인해 야기된 ‘2차적인’ 자폐증의 경우에는 기억이 어느 정도 남는다. 그 옛날에 관계를 맺었던 본토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호세는 다른 자폐증 환자보다 영향을 받기 쉬웠고, 적어도 그의 그림에는 자신과 외부 세계와의 상호교류가 나타나 있다.」

 

  

 

이 책을 통해서도 내 리뷰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인간과 한 인간이 그의 정체성을 이루며 만들어가는 삶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색스의 면면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다. 그의 다른 책에서도 그런 따스한 마음의 질을 느낄 수 있다. 620쪽에 달하던 벽돌책 『깨어남』이 그저 임상 분석 글이었다면 읽기 굉장히 고역이었을 텐데 그의 그런 면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단순히 기이한 환자나 병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그가 본문에서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우리를 닮은 이야기로서 삶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길 원한다. 최근 색스의 첫 저서 『편두통』(1970)이 국내 출간되었다. 보나 마나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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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익스후아틀란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캐러멜의 진한 달콤함, 포도의 부드러운 산미, 베리류의 달콤한 과일향이 좋은 커피‘라고 하더니 처음엔 그냥 그런데 잔향과 뒤 여운이 달콤해요. 상품 이름은 클럽 파티스럽지만 쓸쓸한 겨울과 잘 어울리는군요. 이제 봄이다. 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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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품귀 현상인 요즘, 알라딘이 사은품 줄 때 살 걸 후회하면서 알라딘 오프라인 매장 가도 없겠지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여전히 집(종이책 구역)과 사무실(전자책 구역)을 오가며 책을 본다.

 

 

이 달 독서는 나름 흡족한 성과가 있었다.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벽돌 책인 로버트 치알디니, 더글러스 켄릭, 스티븐 뉴버그 『사회심리학』,  엘리에저 J. 스턴버그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를 완독한 것!

 

 

📘 명성 자자한 제러미 리프킨의 신간 『글로벌 그린 뉴딜』이 나왔길래 리프킨 책 중 가장 읽고 싶었던 『소유의 종말』을 우선 읽어 보았다. 그의 명성의 첫 신호탄  『엔트로피』(1980)부터  『노동의 종말』(1995) 등을 찬찬히 읽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2000년에 낸 『소유의 종말』도 지금 읽기 정말 시의적절했다. 이 책을 쓰는 데 꼬박 6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350권의 책과 1천여 편의 논문, 5만 장의 색인 카드와 약 2천 개의 주석을 동원한 역량을 독서하는 내내 실감할 수 있었다. 그의 세계 동향 분석은 어떤 분석가보다 포괄적이다. 노동을 상품화하던 산업 시대가 지나고 접속 시대에는 자본주의 톱니바퀴 속에 공공 재산과 문화까지 잠식되는 공포스러운 실상을 잘 드러내었다. 사유 재산은 사라져 가고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권리만을 허락받는 자본주의 무법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책만 해도 월정액 독서앱 플랫폼의 성장, 10년 대여가 사라지고 90일 대여로 점점 가벼운 소유의 시대로 흐르고 있다. 이러다 일주일 대여 초특가까지 나올 지 모르겠다.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둔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나가는 것만이 인간의 문명과 건강한 공존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는 한 문장으로 이 책을 설명하기엔 방대한 정보가 있다. 『글로벌 그린 뉴딜』도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는 명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책이었다. 특히 한국 사회의 고심거리들(병역, 공정성 등등)이 많이 논의되어 한국에서 그토록 인기 많았던 것 같기도. 리뷰도 썼다. https://blog.aladin.co.kr/durepos/11537104 

 

 

 

 

 

 

 

📘 로버트 치알디니, 더글러스 켄릭, 스티븐 뉴버그 『사회심리학』은 재독하고 리뷰로 남길 생각이다.

 

 

 

 

 

 

 

📘 엘리에저 J. 스턴버그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다산북스)

업그레이드 정보가 많아 좋았다.

보통 무의식이 밤에 꾸는 꿈에나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낮에 하는 습관적 행동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희망 실현을 허황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심상훈련'은 인간 상상력의 가공할 힘을 입증한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제패한 것에도 나름 기여했을 거 같고.

리뷰 완료 : https://blog.aladin.co.kr/durepos/11558828

 

 

📖

1.

"의식계와 다르게 무의식계가 따르는 규칙은 여러 가지다. 의식과 무의식은 각각의 시스템에 따라 정보를 처리한다. 그래서 낮에는 의식적이고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고 밤에는 오감의 경계가 사라진 탐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무의식과 의식이 어떻게 기능하고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살펴본 것이 거의 없다. 찰스보닛증후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 대뇌다리환각증의 환각은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겹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겹침 현상은 무의식 회로가 만든 꿈이 잠들지 않은 의식에 침입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생겨난다. 그러나 이런 환각 증상은 회로가 고장났기 때문에 나타난다"

2.

"습관 체계를 이용해 행동하면 그 행동에 대한 기억은 사건기억을 이용하는 해마에는 저장되지 않는다. 출근길 운전자가 그날 아침 운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동은 사건기억에 저장되지 않으면 그 행동과 관련된 이미지(옥외광고판 등), 소리, 감정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행동은 습관적 절차를 조용히 강화한다. 그것이 전부다."

3.

"삼각형을 머릿속으로 그리든 실제로 그리든 소요 시간은 거의 같다.

놀라운 발견이다. 보통 상상하는 것에는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무언가에 대한 생각은…… 그저 상상일 뿐이라고, 진짜가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하는 특정 행동에 걸리는 시간과 신체적으로 그 행동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똑같은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상상과 움직임은 뇌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심상 훈련은 단순한 상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연습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다."

 

 

 

 

 

 

 

 

 

📘 데이비드 롭슨 『지능의 함정 - 똑똑한 당신이 어리석은 실수를 하는 이유와 지혜의 기술』 (김영사 2020-01-23)

온 오프라인 막론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점점 더 극단의 갈등으로 심화되어가는 것 같다. 극단이라고 평가할 만큼 정상적이지도 않고 보수-진보의 대결도 아니며 자기 인지 성향에 맞는 편먹고 편 가르기 진흙탕 싸움이다. 이런 책을 읽고 또 읽어도 문제적 인간은 이런 책에 아랑곳하지 않을 테니 근본적인 해결이 될까 싶다. 물론 혁명도 아주 서서히 시작되어 터닝포인트를 만들고 왜곡 변질되어 오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으면 다른 분들 의견도 나랑 비슷하지 싶은데 생각과 지식의 맹점을 지적하는 점에서 대니얼 카너먼이 쓴 『생각에 관한 생각』이나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스티븐 슬로먼 『지식의 착각』을 떠올리게 된다.

 

 

 

 

 

 

 

 

 

작년 연말부터 계속 세대론 공부가 되어가고 있다.

《조커》, 《기생충》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영화계에서 주목받으며 큰 상을 탄 것도 이런 시대 분위기의 반영이자 관심이기도 할 테고.


🎉 알라딘 이벤트 당첨

📘 헬렌 레이저 『밀레니얼은 왜 가난한가』(2020, 아날로그)

아래 댓글을 남겨 받은 책 선물

"『90년생이 온다』를 읽었는데요. 밀레니얼 세대는 일이나 조직보다 자기 삶의 가치를 더 추구하는 가장 적극적인 세대죠. 임홍택 저자는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진취성이 없거나 나약해서 공무원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만연한 불평등, 한국의 나쁜 조직문화, 안정적인 수입과 여유 시간을 가지기 위한 그들만의 타산 방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죠. 공무원과 대기업 근무자의 임금 비교를 보면 장기적으로는 공무원이 더 수입이 많고 안정적이죠. 방학 시즌이면 해외여행을 하는 교사분들을 자주 만나며 일 년에 자기 시간을 이렇게 여유 있게 가질 한국인도 많이 없지 싶었습니다. 헬렌 레이저는 어떤 시각으로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하고 있을지 읽어보고 싶습니다."

헬렌 레이저가 성소수자 권리 운동과 맑시즘 중심의 좌파주의자라 목차만 봐도 대략 감이 온다.

 

 

 

 

📘 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2020, 생각의 힘)는 도서관에 희망 도서 신청했다. 임홍택 저자가 간과한 밀레니얼 세대 내에서의 계층 차이와 그 내부에서의 갈등 양상을 짚어낸 것이 흥미로워서. 한국 밀레니얼 세대가 조국 사태에서 분노한 기저를 잘 간파한 듯도. 그런데 코로나19로 도서관까지 폐쇄되어 언제 받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_-

 

 

 

 

 

📘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컬러의 말』(2018)을 빨리 읽으려고 e book으로 사고 되게 후회했는데(멍충이🤢), 캐런 할러 『컬러의 힘』(2019)은 종이책으로 생겨서 좋다. 역시 이런 책은 컬러를 감상하며 이리저리 넘겨 봐야! 데헷~ 미용실에서 머리하면서 재밌게 봤다. 각종 테스트들도 재밌고 내 색깔들도 찾아보고.

 

 

 

 

 

 

2월은 사회에 대한 책들에 관심이 많이 갔다.

 

📘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세계의 모든 조직이 '아웃소싱'으로 굴러가고 있는 한편, 개인도 그와 유사한 각종 '대행' 서비스를 이용한다. 관혼상제 서비스부터 가사 도우미, 대리모 출산까지 원한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다소 기이한 사회 현상이 포착된다. 거품 경기가 꺼진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는 매년 10만 명이 실종되고 있는데, , 이 중 8만 5,000명이 스스로 증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취업 실패, 시험 낙방, 이혼, 퇴사 등의 각종 이유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이 현상은 더욱 증가했는데, 『인간증발』의 저자인 프랑스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와 그녀의 남편이자 사진작가 스테판 르멜은 우연히 이 사실을 접하게 돼 5년에 걸쳐 도쿄, 오사카, 도요타, 후쿠시마 등을 돌아다니며 슬럼 지역에 숨어들어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일본인과 그들의 사연을 취재했다. 이들의 상황은 증발이 아니라 사실상 추락인 것 같았다. 뾰족한 대안도 없어 보인다. 한국은 '간병 살인' 같은 실태 조사도 전무한데 이런 증발에는 더 관심이 없을 것이다.

 

 

 

 

 

 

 

📘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에서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라고 말하며 그렇기에 더욱 기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람의 원초적인 분리 불안은 고립의 공포와 고독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여러 합일의 형태들을 찾게 되는데,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그 관습, 관례, 신앙-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사이비 사랑의 형태를 사랑이라 착각하며 사랑한다. 사랑은 자아도취가 아니라 자립적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이다. 이 순수한 생산적 활동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반한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나타남이라고 보고 리비도는 다른 사람을 향하거나(사랑),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자기애)고 가정”했다. 자기애를 자아도취적 낮은 단계로만 해석한 프로이트 이론에 반박한 프롬의 지적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그의 견해도 전통적 가부장적 해석에서 아주 벗어났다고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프롬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요소로 ‘전 생애를 통한 훈련’, ‘정신 집중’, ‘인내’, ‘최고의 관심’을 거론했다. 자아도취와 반대되는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도 사랑의 기술에 요구된다. 자본주의 극복도 중요하다.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런 책 제목은 어느 시대에나 먹히지 않을까. 내용은 더 그렇다. 미니멀한 일기 형식의 짧은 칼럼 글인데도 자체 지성이 반짝반짝~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기 전에 어리석음부터 해결을 해야... 평생 처리해야 하는 일이니 더욱 한숨.

 

📖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악의나 잔혹함에 분개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없지만,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양식(良識)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조차도 자기 안의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루에 1시간 45분 정도가 남는 셈이다. 나는 이 시간을 섹스, 친구나 가족과의 대화, 장례식 참석, 병원 진료, 쇼핑, 스포츠, 공연 관람 등에 사용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나는 인쇄물(책, 기사, 만화)을 읽는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모임 장소로 이동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 즉 323시간 동안 페이지당 5분꼴로 독서(페이지 여백에 간단한 주석을 다는 정도의 독서)를 했다면, 나는 3,876페이지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봤자 이것은 300페이지짜리 책 12.92권에 해당될 뿐이다. 독서할 시간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다. 담배 말이다. 하루에 60개비꼴로 담배를 피우고, 매번 담뱃갑을 찾아 불을 붙이고 끄는 데에 30초가 걸린다면 1년에 182시간이 필요하다. 내게는 그 시간이 없다. 아무래도 담배를 끊어야 할 모양이다."(1988)

 

 

 

 

📘 윤이형 『붕대 감기』는 소설보다 심진경 평론가의 해설이 더 좋았다.

📖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이 때로는 더 가혹한 가부장제적 규범(왜냐하면 맨얼굴인데 예쁘기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으로 작동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탈코르셋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과 투블럭 커트 헤어스타일, 노브라로 요약되는, 탈여성화된 외모 규범을 요구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탈코르셋은 여성들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강요되고 내면화되어온 모든 팬옵티콘적 남성 감시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여성자결권을 획득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얼마나 험난하며 또 얼마나 지지부진할 것인가. 때론 여성주체성 획득이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호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예컨대 1990년대 한국 대중문화가 요구한 새로운 주체적 여성 이미지가 사실은 새로운 소비주체에 대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즘이란 사실상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중략)

작가가 그렇게 나이 든 페미니스트와 젊은 페미니스트를 각각 '영악한 여자 꼰대/분노하는 천방지축 어린애'로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문제 삼는다. 그 프레임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그런데 정말 경혜와 형은의 갈등과 입장 차이는 단순히 세대 간 격차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한 걸까. 여성 내부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지금의 문제만은 아닐뿐더러, 세대 간 갈등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성정체성, 계층, 지역, 학력, 직업 등등에 따른 여성들 간의 차이는 예전부터 있어왔으며, 그 차이만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서로 다른 입장과 견해차는 존재해왔다. 문제는 그러한 여성 내부의 차이와 다양성을 단순히 세대 간 차이로 몰아가면서 더 다양한 페미니즘 논의의 가능성을 제한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늙은 여성/젊은 여성’으로 대변되는 페미니즘 이분법의 프레임은 선악의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전화轉化하면서 페미니즘을 ‘좋은 페미니즘/나쁜 페미니즘’, ‘진짜 페미니즘/가짜 페미니즘’으로 나누는 진품명품쇼로 전락시킨다. 그런데 도대체 좋은, 진짜 페미니즘은 어디에 있나.

그런 페미니즘은 없다. ‘진짜 페미니즘’이란 마치 어떤 이상적 형태를 상정하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텅 빈 기표와 같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가짜 기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진짜’, ‘좋은’,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우리 사회의 젠더 문제를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왜냐하면 순수하고 완전한 페미니즘이라는 이데아는 이 현실 세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당위와 대의명분에서 벗어나, 진짜인지 가짜인지 재단하지 않는, 각자의 복잡한 경험이나 개별 특성을 인정하는,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인 사고방사고방식을 벗어난,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모순이 공존하는, 잡종적인, 오염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소문자 페미니즘들’을 만드는 일이며, 그럴 때라야 비로소 여성연대는 가능할 것이다. 이때 여성연대란 단수적이기보다는 복수적이고, 통합적이기보다는 해체적이고, 무질서하고 개방적인, 그래서 비非연대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될지도 모른다. 윤이형의 『붕대 감기』가 여성들끼리의 화해와 연합이 아닌,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끝나는 것은 이런 인식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 사회 문제에 주목하는 김혜진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9번의 일』 주인공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동자였다. 80년대 경제 성장기의 거품이 꺼진 뒤 새로운 동력으로 IT 산업이 떠오를 때 사회생활을 시작한 486 세대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에서 자아 만족을 얻으며 살았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워라밸(일과 생활의 조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생계에 대한 부담은 우리 대다수의 고민거리다.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을 읽고 이 소설을 읽었다면 더욱 좋았을 듯.

 

📖

“일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더 인간다워진다는 자부가 있었고, 그 자부 안에 함께 성장해온 회사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회사는 오래도록 살아 있는 어떤 실체에 가까웠다.”

 

 

 

 

 

📘 민음북클럽 선물로 오디오북을 받아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게? 듣게? 되었다. 말미에 이제훈 배우 해설과 낭독도 실려 있다. 《건축학개론》 이미지 때문인가. 지금 35살인데 여전히 청춘의 이미지.

와타나베가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이상 읽었듯 나도 이 책을 세 번째 읽었다.

나오코가 말한다. 1~2년에 한 번씩 들판 한가운데 숨은 '우물'에 사람이 사라지는 얘기를. 문득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떠올렸다.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뭐지? 그 태양의 서쪽이라는 것은?"

 

"그런 장소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고 하는 병 들어 본 적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

 

"옛날 어느 책에선가 그런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어요.

중학생 시절이었든가. 무슨 책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지만 ...

아무튼 그것은 시베리아에 사는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에요.

있잖아요. 상상해봐요.

당신이 농부고,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홀로 외로이 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매일매일 밭을 갈아요.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죠.

북쪽에는 북쪽의 지평선이 있고, 동쪽에는 동쪽의 지평선이 있고,

남쪽에는 남쪽의 지평선이 있고, 서쪽에는 서쪽의 지평선이 있어요. 그저 그것뿐.

당신은 매일 동쪽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면 밭으로 나가 일을 하고,

그 태양이 머리 위에 올라와 있으면 일하던 손을 멈추고 점심을 먹고,

그리고 서쪽 지평선으로 해가 기울면 집으로 돌아가 자는 거예요."

                   

"그런 생활은 아오야마 부근에서 바를 경영하고 있는 것과 몹시 다른 종류의 인생일 듯이 들리는데."

                                       

"그렇겠죠" 하고 그녀는 말하고 웃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몹시 다르겠죠. 그런 생활이 계속 몇 년이고, 몇 년이고, 매일 계속돼요."

                                       

"하지만 시베리아에서는 겨울에는 밭을 갈 수 없을 텐데."

                                       

"겨울에는 쉬어요, 물론." 하고 시마노토는 말했다.

"겨울에는 집안에 있으면서,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지내죠.

그리고서 봄이 오면 바깥으로 나가 밭일을 해요.

당신은 그런 농부인 거예요. 상상해봐요."

                                       

"해보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죽어 버리고 말아요."

                   

"죽다니, 어떤 것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무엇인가요. 동쪽 지평선에서 떠올라, 높은 하늘을 질러서,

서쪽 지평선으로 기울어가는 태양을 매일매일 보고 있는 사이에,

당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뚝하고 끊어져서는 죽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지면에다 괭이를 내던지고는, 그대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서쪽을 향하여 걸어가는 거예요. 태양의 서쪽을 향해서.

그리고는 무엇에 홀린 듯이 며칠이고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줄곧 걷다가,

그대로 지면에 쓰러져 죽고 말아요. 그게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예요."

                   

나는 대지에 엎드려 죽어가는 시베리아 농부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태양의 서쪽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데? " 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또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죠.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지도 몰라요.

아니면 무엇인가가 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무튼, 그것은 국경의 남쪽과 좀 다른 곳이에요" 

 

언제나 그녀들은, 하루키는 누군가 사라지는 얘기를 한다. 그것은 내가 사랑한 사람들, 끝끝내는 나의 얘기이기도 하다.

최근 나온 은희경 『빛의 과거』는 『노르웨이의 숲』을 벤치마킹한 것을 부인할 수 없을 듯.

 

 

 

 

 

 

 

 

 

📘 강렬한 흑백 콘트라스트 다큐멘터리 사진도 좋았지만 그의 세계관도 좋았던 『이정진』 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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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사진은 결과이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한다. 현실의 재현이나 시각적 아름다움의 재구성이기보다는 근본적인 사색의 바탕으로서ㅡ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 가지로 주장하거나 강조할 수 없는 생각들, 흐름도 멈춤도 아닌 어떤 찰나, 무한히 열린 공간에서의 단절, 침묵하고 있지만 뜨거운, 일상의 초현실적인 단면들, 은유적인 표현수단으로서ㅡ이미지들이 선택되어 왔다."(「사물」 연작 작업노트에서, 2005)

 

“한때 예술은 내 삶의 ‘절대’ 또는 ‘본질’과의 악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절대는 하나가 아니고 본질은 유동적이다. 그것은 내 인식의 한계일 뿐이다.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 도달한 절대의 높이만큼 다시 추락하기를, 작업을 통해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절대’란 것은 여러 개의 세로 줄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은 하나의 가로 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이정진

 

 뉴욕, '우리는 모두 타인이다', 1988-1989

 

 

 

📘 볕이 좋았던 날 들고나가 읽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2010, 사피엔스 21)

상대를 후려치는 듯한 비트겐슈타인의 명징한 논박은 늘 정나미 떨어짐과 존경 둘 다 보내고 싶은 심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사고한다면 황색 언론과 여론에 휩쓸리거나 사이비 종교 신봉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의 전기를 읽어서 이미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삶은 얼마나 고독한지...

 

📖

하디 교수가 나에게 다가와서 "비트겐슈타인, 나는 거대한 발견을 해내었네. 나는 ......라는 것을 발견했다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수학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말한 것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발견했는지를 알기 이전까지는 당신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말한 것에 대해 놀랄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영어를 말한다 할지라도, 그가 말하는 것의 의미는 그가 행한 계산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이 책 현재 품절인데 그러면 안 될 책이다. 강의집이라『비트겐슈타인의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보다 좀 더 수월하다는데 으허허;;

 

  

 

📘윌 듀런트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이 책 제목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는 자살을 생각하는 어떤 이가 듀런트에게 다가와 건넨 질문이기도 했다.

내게 이 책은 삶의 의미에 대한 답보다 이 책 자체에 있다. 역사가가 정리한 시대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산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을 직접 읽으며 그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시대에도 이런 기획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세계 대변동이 아닌 때가 없었던 것도 같지만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을 헤쳐가기 바쁘고. 나는 삶에는 게으르고 의미를 책 속에서 찾는 바보인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계속 읽겠습니다.

 

 

 

 

 

 

 

📘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도 빨리 완독하고 싶다!

"한국인이라는 특수한 사상적 지평을 넘어 당신을 인류 보편의 지혜로 도약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으로서 이 책보다 더 쉬운 책은, 단언컨대 없다"는 채사장의 호언장담처럼 정리 요약이 잘 되어 있다. 물리학, 과학, 인문학 책 즐겨봐서 아는데 빅뱅 이전부터 설명하는 책 흔치 않다. 거기다 세계, 자아 등 철학으로의 통합까지 뻗어나가니 채사장 참 대단하다ㅎㅎb

이 책 삽화가 참 재미난데 누가 그린 건지 알 수 없어 웨일북에 문의ㅋ 난 참 쓸데없는 오만 것에 관심을 가지는╭(๑•ㅂ•๑)و

 

 

더 쓸데없을 지도 모르지만 알라딘 스티키 북마크 얇게 만들어 줄 수 없냐고 문의도 넣음🤣 

책 읽으며 수시로 반 잘라서 쓴다. 인덱스용으로만 쓰는데 이 폭은 낭비~

제 의견에 동의하신다면 알라딘 고객센터 1:1 문의 [칭찬/비판/건의] 문의 유형 분류 선택해 참여해 주세요✧(๑˃̵ᴗ˂̵)و

 

 


 

 

 


 

📕 아무튼 사고 사고 또 사고

📘 마르셀 프루스트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민음사 2019-12-30)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 장작용ㅎ

• 중고도서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2012-07-12)

-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에 이어 읽고자 한 에리히 프롬 책을 다 완비했다. 『모비 딕』을 멋지게 번역했던 김석희 번역이라 더 믿음이 간다.

📘 성백효 『최신판 논어집주』(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7-12-26)

- 구판 팔고 재구입. 성현의 말씀이 칫솔질처럼 시원할 때가 있으니까 갖춰놓고 있으면 마음에 안식.

📘 장 뤽 고다르 & 데이비드 스테릿 『고다르 X 고다르 - Jean-Luc Godard Interviews』(이모션북스 2010-11-10)

- 읽고 싶던 인터뷰집이었는데 마침 중고로 보이길래 겟~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까치출판사 1998-02-25)

- 동서문화사와 비교해봐야지. 헉스, 커버가 없다뉘; 양장본 중고 살 때 종종 변수ㅜㅜ

📘 리사 랜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사이언스북스 2015-12-15)

- 리사 랜들의 다중 우주론을 좀 읽어봐야겠기에.

📘 오타베 다네히사 『서양미학사』(돌베개 2017-12-11)

- 요즘 모습은 매우 실망스럽지만 진중권의 예전 미학사는 꽤 유익했고 재밌었다. 서양 미학자가 아닌 일본 미학자의 관점도 궁금했다.

📘 프랜시스 베이컨 『신기관』(한길사 2016-02-05)

- 고전, 고전, 고전

📘 롤랑 마뉘엘 『음악의 기쁨 3』( 북노마드 2014-12-05), 『음악의 기쁨 4』( 북노마드 2014-12-31)

- 이 시리즈 이제 다 모았다♡

 

 

 

 

 

 

 

 

 

 

 

 

 

 

 

☆ 2월 알라딘 굿즈 - 더블 포켓 파우치(스탠다드)

- 기존의 북파우치보다 크기는 작고 앞뒤 양면 포켓에 속주머니가 여럿 있어 실용성 굿٩(•◡•)۶ 알라딘 다이어리가 쏙 들어가 다이어리 파우치로 써도 좋다.

 

 

 



 

 

 

 


 

📚 중고도서

📘 필리프 아리에스 『죽음의 역사』(동문선)

📘 에드가 모랭 『인간과 죽음』(동문선)

📘 게오르그 짐멜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새물결)

📘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늦여름 1, 2』(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 알라딘 이벤트 또 당첨

2020년 들어 전자책 할인 행사가 대폭 조정된 이후 e book 이벤트가 색달라졌다. 댓글 기대평 달면 e book 적립금 1000원 or 종이책 선물을 주는 구성의 이벤트가 대세. 알라딘에 책세상 브랜드전이 있길래 반가운 마음에 "책세상 하면 니체 전집이죠^0^)b" 남겼더니(다 쓰고 아, 책세상 문고 고전의 세계도 좋은데 깜빡했네 했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종이책 당첨(๑˃̵ᴗ˂̵)و 책만 온 게 아니라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가 담긴 누드 제본 노트까지 챙겨 주셔서 매우매우 감사했다! 맘에 쏙 들어 문구덕후 감동(❁´▽`❁) 💕


📘 오흥명 『감정의 형이상학』(2019-12-02, 책세상)

탄탄한 철학으로 쓴 글이라 문장 하나하나 맘에 와닿고 멋지다. 어렵지 않게 쓴 것도 장점. 가벼운 에세이에 질린 독자(나?)가 반길 책. 궁금하신 분은 e book 90일 대여 5, 250원으로 봐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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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이라면, 철학은 철학에 관해서가 아니라 불행에 관해 말해야 한다. 삶과 존재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이들은 언제나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몸과 정신으로서의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어두운 감정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인간의 삶과 존재를 원형 그대로 되살피는 일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게 불행의 감정들은 얼마간 추스르고 나면,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감정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때가 올 것이다. 인간의 불행에 대한 집요한 응시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불행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서문)

 

 

 

 

 

역시 이 달도 e book 포함 30권 구매 이상으로 넘어가 버렸다. 휴... 지쳐서 사진에 못 찍은 것도 많다.

 

📘『셀프 트래블 북유럽』

📘 제임스 테이트 산문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창비)

📘 폴 모랑 『밤을 열다』 『밤을 닫다』(민음사, 쏜살문고)

📘 봉준호 『마더 이야기』(마음산책)

봉준호 영화 중 나는 마더가 가장 좋다. 엄마 없어?" 대사는 정말이지......

 




 

 

 

☆ 2월 알라딘 굿즈

더블 포켓 파우치 스탠다드, 슬림까지는 샀는데 맘에 드는 스퀘어는 품절이라 못 샀다. 각각 다이어리와 미니 노트 파우치 & 필통으로 쓸 수 있어 좋다. 지난달엔 노트 잔뜩 사고 이 달엔 파우치 잔뜩 사고. 알라딘 때문에 내가 미쳐ヾ(。>﹏<。)ノ゙

본투리드 샐러드 포크(모비딕)

 화이트 색상의 앨리스 포크 잘 쓰고 있어서 블루로 하나 더 장만.

 

 

 

 

 

 

 

📘 알라딘굿즈랑 데코하다가 읽어본('완독을 해라' 목록 책) - 리처드 세넷 『무질서의 효용』

청소년기와 도시(공간)이 우리 시대 정체성 형성에 매우 결정적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시공간을 배제한 채 '나의 정체성(자아)'을 말하는 건 명백히 오류다. 무려 25살에 쓴 40년 전 글인데도 그의 '정체성', 공동체' 분석은 요즘 세대론의 빈 곳을 짚어 준다.

 

 

 

 

 📘 어슐러 k. 르 귄 『어둠의 왼손』

작가가 쓴 머리말부터 맘에 쏙 든다.

테드 창도 그렇고 SF 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구성하는 세계관을 정확히 알고 쓰고 있다. 일반 문학(?) 작가들에 비해 뛰어나고 존경스러운 장점이다.

인물과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썼다는 일반 문학 작가들의 변은 문학의 특성이라기보다 구시대적인 문학 작법일 수도 있다. 자유주의적인 나이브함도 포함.

 

📖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 과학소설은 은유이다. 이 과학소설을 고전적인 허구 형태와 달라 보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대생활의 골간을 이루는 어떤 거대한 지배체제-그 가운데는 과학 즉 각 분야의 학문과 기술 그리고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관점 등이 있다-로부터 도출된 새로운 비유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계있지 않나 생각된다. 우주여행은 이 은유들 중의 하나이다. 대체역사도 그렇고, 대체생물학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래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그런 것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허구화된 미래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은유한다는 말인가?

만일 내가 은유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도 물론이다. 그리고 조금은 장엄한 투로. 이 소설의 주인공 겐리 아이가 나와 당신에게 진실이란 상상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내 책상에 앉아 잉크와 타자기의 리본을 소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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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2-29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AgalmA님 한동안 안 보여셔서 겨울잠을 주무시나 했는데, 페이퍼를 보니 면벽 독서 수행으로 동안거를 하셨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봄이니 동안거에서 나오셔도 좋을 듯 합니다.ㅋ

AgalmA 2020-03-01 13:47   좋아요 1 | URL
요즘 전국민 자가 격리 조치 시즌이 되어 버렸죠^^;; 음식점, 카페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손님이 없어 난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 주말이나 한창 성업할 저녁에도 거리나 버스까지 한산하고, 소설이나 재난 영화에서나 보던 이상한 상황을 현실로 체험하니 밖에만 나가면 계속 비현실적이에요. 봄 내내 이럴 거 같은데 이게 사회를 또 이상하게 바꿀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처럼요.
아무쪼록 겨울호랑이님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페크pek0501 2020-02-29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대단히 풍성합니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은 페이퍼올시다.
한 번만 볼 게 아니라 저장해 놓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풍부한 정보!!!

˝철학은 철학에 관해서가 아니라 불행에 관해 말해야 한다.˝
배우고 갑니다.

AgalmA 2020-03-01 11:20   좋아요 0 | URL
배가 부르기보다 식음전폐나 소화불량이 되는 쪽에 더 가까운지도요;;
빠진 게 있어서 더 추가해야 하는데 지치네요. 어허허
건질 게 있으셨다니 감사합니다 :)

moonnight 2020-02-29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_@;;; 어마어마한 독서일기 굿즈네요. 부럽고 존경합니다. ^^

AgalmA 2020-03-01 11:23   좋아요 0 | URL
모아보면 한 달이 금세 간 거 같아 제 늙어감을 더 느끼게 됩니다ㅡㅜ);
자본주의 상술에 저도 당할 재간이 없어 이젠 책과 굿즈가 한 팀처럼 느껴지니ㅎㅎ;;

송지미 2020-04-21 0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산 책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리뷰했는ㄹ 보다가 이렇게 재밌고 유익한 리ㅠ는 처음이예요;; 잘봤습니다

AgalmA 2020-05-03 16:00   좋아요 0 | URL
가끔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올리나 싶은 것도 있는데, 도움된다는 분도 계셔서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올리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종이달 2021-10-13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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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방역 조치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 코로나19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한국을 공포에 몰아넣으면서 깜빡하고 마스크를 안 쓰고 바깥에 나가면 내 건강 걱정보다 민폐가 되는 것 같아 더 당황스러운 날도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며(이 책 리뷰를 쓰고 있는 와중에도 3번 문자를 받았다) 우리는 어떤 정의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 근본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인가. 이런 질병 사태가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인종 차별과 이기주의, 은폐와 왜곡, 책임 탓을 하는 분노로 가득한 말들의 범람을 매일 보게 되는데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정의로운가이다.

 

 

마이클 샌델은 가격 폭리 방지법, 상이군인에 대한 훈장, 구제 금융에 대한 찬반 주장을 살펴보며 정의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라기보다 ‘복지, 자유, 미덕’ 세 가지 항목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에 주목했다. 즉 우리가 정의를 따질 때는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려면, 어떤 미덕에 명예와 포상을 주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은 이 두 가지 견해가 서로 경쟁한다. “정의에 선택의 자유뿐만 아니라 미덕도 포함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뿌리 깊다.” 자유를 근간으로 정의를 규정하는 접근법은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이끄는 ‘자유방임주의 진영’과 평등을 옹호하는 ‘공정성 진영’의 대결로 나뉜다.

                           

📖

“우리는 때로 도덕적 추론을 타인을 설득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도덕적 추론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분별하는 수단이자, 우리가 어떤 신념을 왜 믿는지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중략) 도덕적 사고가 우리의 판단과 원칙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라면, 그런 사고로 정의나 도덕적 진실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 가령 도덕적 직관과 원칙에 입각해 평생을 헌신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되풀이되는 편견의 타래에 머물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도덕적 사고란 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고 답하고자 한다. 따라서 친구, 이웃, 전우, 시민 등의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때로는 그 대화 상대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상상 속의 존재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과 논쟁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자기 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정의 추구는 어떤 식이었던가 . “벤담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통해 자신의 원칙에 도달한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과 쾌락의 감정에 지배된다. 이 감정은 우리의 ‘통치권자’다. 이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배할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란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허구의 집단’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도덕적 다툼은 알고 보면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공리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이견일 뿐, 원칙 그 자체에 대한 이견이 아니고, 도덕적 논증의 유일한 출발점은 바로 공리 원칙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공리주의를 좀 더 정교하게 다듬으려 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와 무관한 도덕적 이상(인격과 인류 번영)을 주장해서 오히려 공리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

“밀은 가장 뛰어난 사람도 “때로는 다른 영향과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고급 쾌락 대신 저급 쾌락을 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누구나 가끔은 tv나 보면서 소파에서 빈둥거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렇다고 렘브란트와 tv 재방송 프로그램의 차이를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밀은 이를 지적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낫고,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약 바보나 돼지가 이 말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자기 시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급 능력을 신뢰하는 이 표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밀은 이 말에 기대면서, 공리주의 전제에서 벗어나고 만다. 욕구는 더 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이제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과 욕구와는 별개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상에서 나온다. 어떤 쾌락이 고급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더 원해서가 아니라 더 고급임을 깨닫고 좋게 보기 때문이다.”

 

안락사 허용 문제를 생각해보자. 안락사에 찬성하는 대다수는 ‘인간은 자기 목숨을 보전할 의무와 논리’가 아니라 ‘존엄과 연민’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다. 병역 문제는 어떤가. 다른 사람을 고용해 군에 입대시키고 자기 대신 목숨 걸고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 남북전쟁 때의 대리인 고용과 현대의 모병제는 전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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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을 시민의 의무로 본 가장 유명한 발언 가운데 하나는 제네바 태생의 계몽주의 정치 이론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의 말이다. 그는 『사회 계약론The Social Contract』(1762)에서 시민의 의무를 거래되는 물건으로 바꾸는 행위는 자유를 증진시키는 게 아니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지상주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존중해야 정의롭다고 말하지만, 대리 출산 계약은 그 문제를 철저히 고려하지 못하는 합의의 결함과 여성 출산 능력까지 사고파는 인간 존엄의 상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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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출산하거나 전쟁을 하는 것처럼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행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대리 출산과 앤드루 카네기가 남북 전쟁에서 자기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한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사례에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다 보면 정의에 대해 둘로 갈라져 경쟁하는 두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자유 시장에서 우리가 하는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세상에는 시장에서 취급하는 것이 영예롭지 못하며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존재할까?”

“인간의 권리가 공리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권리의 도덕적 근거는 무엇일까?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대답은 이렇다. 그들은 자기 소유권이라는 기본권이 침해될지 모르기 때문에, 개인은 타인의 복지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내 생명, 내 노동, 나라는 인간은 오직 내게만 오롯이 속하며, 사회가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자기 소유라는 개념을 일괄되게 적용해 보면, 열렬한 자유지상주의자들만이 찬성할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낙오자들을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간섭받지 않는 시장,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이 배제된 최소 국가, 합의를 완벽한 행위로 칭송하여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합의한 식인 행위나 노예 매매 등)마저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소유권과 제한된 정부를 지지했던 영국의 위대한 이론가 존 로크John Locke(1632~1704)조차 제한 없는 자기 소유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 생명과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하지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로크의 이론은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탓에, 종교의 논리에서 벗어나 권리의 도덕적 근거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회적 행위의 규준을 찾으려 할 때, 그 행위의 특수한 목적 혹은 목표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를 인간 본성에 맞는 목적이나 선의 적합성 문제로 보며 권리보다 선을 앞에 둠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선을 선택할 여지를 남겨 두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반대하면서,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그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한 동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칸트는 의무와 권리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을 소유한다거나 우리 목숨과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주장에 기반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성적 존재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녔다는 생각에 근거를 둔다.” 존 롤스도 권리가 선에 앞서는 선택의 문제로 본다. 미국의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서 우리는 그런 동기를 찾아봐야 한다. ‘다양성 증대’라는 동기는 ‘입학 허가가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자 ‘(학교와 사회의) ’공동선‘이라는 관점이다. 이 논리에 반박하는 사람은 부당한 원칙이자 현실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어떤 논리를 대든 우리는 정의에 영예를 받을 자격을 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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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은 앞서갈 자격이 있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한 사람들의 성공은 그들의 미덕이 반영된 결과라고 칭송한다. 이러한 확신은 좋을 수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이 확신에 집착하면 사회 결속이 어려워진다. 성공을 자기 행동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끈질긴 믿음은 그저 오해며, 근거 없는 생각이다. 롤스는 행운의 도덕적 임의성을 지적하며 그 믿음에 강력히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롤스와 드워킨의 주장처럼 정의를 자격 논쟁으로부터 단호하게 분리하기란 정치적·철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정의는 흔히 영예의 측면을 갖고 있다. 분배 정의에 관한 논쟁은 누가 무엇을 갖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어떤 자질이 영예와 포상의 가치가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 사회 기관이 사명을 정하고 난 뒤에야 어떤 특성이 장점으로 떠오른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정의에 관한 논쟁에서 흔히 거론되는 각종 기관들(학교, 대학, 전문직, 공직 기관 등)은 사명을 멋대로 정할 수 없다. 이들 기관의 사명은 최소한 어느 정도는 이들이 장려하는 고유의 선에 따라 규정된다. 법학전문대학원, 군대, 오케스트라 등이 어떤 사명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시점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사명이든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사회 기관이든 그에 적합한 선이 있으며, 역할의 배분에서 이러한 선을 무시하면 자칫 타락으로 흐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강조되었는데, 정치의 목적은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공정한 규칙을 제공하는 경제적 차원이 아니다. “정치의 목적은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좋은 삶의 본질과 인간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데 있다.” 이 뜻은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미국의 노예제는 1865년에야 폐지되었고, 여성은 1920년에야 투표권을 얻었다. 이제라도 이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인간이 정의와 도덕적 자격을 갖는 길은 멀고도 멀다. 많은 부분 정부가 정의의 집행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도덕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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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좋은 삶의 의미를 판단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고대의 정치 개념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치의 목적은 경제 교환을 용이하게 하고 국가를 공동으로 방위하는 책임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격을 기르게 하고 좋은 시민이 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정의에 관한 논의는 좋은 삶에 관한 논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썼다. “이상적인 법의 본질[을 조사하기] 전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본질부터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불분명하면, 이상적인 법의 본질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좋은 책이 대체로 그렇듯 마이클 샌델은 이 책 요약을 친절히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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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을 탐구했다. 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자유 시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자유지상주의의 견해)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 있을 경우 ‘하게 될’ 가상의 선택(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견해)일 수도 있다.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당신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선호한다. 왜 그런지 설명해 보겠다.

공리주의 접근 방식은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첫 번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모든 선을 하나의 통일된 가치 척도로 환산해 획일화하여, 그 질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자유 이론은 권리를 중요시하며, 정의는 단순한 계산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권리가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중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지만, 몇몇 권리들은 기본적인 것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인다. 하지만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권리를 가려내는 것 이상으로, 이 이론들은 사람들의 기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우리가 공적 삶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취향과 욕구에 의문을 가지거나 시험해 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적 가치,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의미와 중요성,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질과 특성은 하나같이 정의를 논하는 영역을 벗어난다.

이 부분이 내게는 실수로 보인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원칙이나 절차로 소득·권력·기회 등 모든 것이 정당하게 배분되길 바라겠지만, 정의는 애초에 중립적일 수도 없고 영광,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해 경쟁하는 여러 개념과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의는 올바른 배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투표 행사로 정치 참여의 소임을 다한 게 아니듯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 해야 할 일이 많다. 관심 어린 관찰,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 키우기(시민 의식, 희생, 봉사), 시장 논리 및 시장 친화적 사고에 대한 경계, 불평등에 반대하고 연대하며 시민의 미덕 키우기, 정치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공적 참여(도덕적인 참여 정치) 등이다. 정의는 법이나 정부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넘게 그래왔듯이 우리 모두가 움직여야 가까스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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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2-29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흥미롭게 읽은 책입니다. 특히 좋은 방법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해 준 소중한 책이죠. 제 글에 인용을 한 책이기도 하죠.
좋은 문구가 많아 재독할 책으로 뽑습니다. 한때 끝 부분이 시시하다는 등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저는 좋은 책으로 꼽습니다.

“이상적인 법의 본질[을 조사하기] 전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본질부터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불분명하면, 이상적인 법의 본질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 이런 멋진 문장이 많죠.

AgalmA 2020-03-01 11:37   좋아요 0 | URL
네, 명문 많지요^^
결국 정의는 내 도덕적 추론과 타인의 추론 사이의 간극을 조율하는 일인 거 같죠. 시대가 혼란하면 이게 참 어려운 일이 되고요.

끝을 시시하게 느낀다는 건 우리가 늘 당위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있어서 겠지요. 사실 그게 제일 잘 안 되는 것이라 이렇게 문제인데 말이죠.

막시무스 2020-02-2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볼까하는 고민을 강하게 던져주시는 리뷰입니다!ㅎ 즐건 주말되십시요!ㅎ

AgalmA 2020-03-01 11:45   좋아요 0 | URL
베스트셀러 기피하는 습관 때문에 이 책을 너무 늦게 읽은 거 같습니다. 요즘은 좀 바뀌어서 좋은 책이란 입소문 들으면 어서 읽겠다는 욕심을 부리게 돼 더 힘드네요ㅋㅜ
좋은 책을 알아보고 읽는 이가 더 많아져야 할 테지요.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도 평안한 주말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