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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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이다.’ - 프로이트

 

 

훌륭한 품성과 재능, 좋은 스승을 알아보는 능력까지 있다면 이런 책이 나오게 된다. 올리버 색스의 신경과학 책은 알렉산드르 R. 루리야의 영향이 매우 컸다. 휴링스 잭슨, 쿠르트 골드슈타인, 헨리 헤드와 함께 알렉산드르 루리야는 신경학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는 그들의 여러 면모가 비판 비교되었는데 색스는 알렉산드르 R. 루리야를 특히 존경해 활발히 서신 교환을 하며 교류했다. 루리야는 신경학 분석에 있어 연구적 저작물 ‘고전적 과학’과 소설에 가까운 전기풍 이야기책 ‘낭만적 과학’이란 이중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의 후기에는 후자에 더 집중했다. 고전적 과학이 담을 수 없었던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을 담은 그의 후기작 『산산히 부서진 세계의 남자』(국내 제목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2008, 도솔)가 상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2007, 갈라파고스, 품절)가 과잉에 대해 다뤘듯이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1985) 글의 줄기도 그러하고, 『깨어남』(1973)도 “엘도파를 투여하기 전의 놀라운 결핍 상태(운동불능증, 무의지증, 무력증, 무반응증 등)와 엘도파 투여 후의 무서운 과잉 상태(운동과다증, 과다의지증, 과다수축 등)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 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공통점은 병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중심에 놓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사(이야기)가 필요했다.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습관은 19세기에 절정을 이룬 후, 신경학이라는 객관적인 과학의 도래와 함께 쇠퇴하였다. 루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글로 남기는 힘, 이것은 19세기의 위대한 신경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보편적인 자질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 우리는 이 힘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루리야가 각각의 환자에 긴 세월 전념하며 책을 썼듯이 올리버 색스의 모든 책이 환자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던 것도 이런 신념에 기반한다. 우리가 뇌와 정신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건 160년도 되지 않는다.

 

 

「뇌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86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브로카가 뇌 좌반구의 특정 부위에 손상이 생기면 그에 해당하는 특정한 장애 즉 언어상실증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대뇌신경학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그후 수십 년에 걸쳐 사람 뇌의 ‘지도’가 그려짐에 따라 언어, 지각 등의 능력은 각각 그에 해당하는 뇌의 특정 ‘중추’들이 관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세기 끝 무렵이 되자, 좀더 예리한 관찰자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특히 프로이트는 자신의 책 《언어상실증》에서 기존의 뇌 지도가 지나치게 단순하며, 모든 정신활동에는 매우 복잡한 내적 구조가 있고 그와 똑같이 매우 복잡한 생리학적 원리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인지나 지각 능력에 발생하는 특정한 장애를 연구하면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인식불능증’이란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언어상실증이나 인식불능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좀더 새롭고 세련된 과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로이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과학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러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A. R. 루리야(그리고 그의 부친 R. A. 루리야), 레온체프, 아노킨, 번스틴과 그 밖의 여러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고, 그것에 ‘신경심리학’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새로운 과학은 루리야의 일생에 걸친 연구에 힘입어 풍부한 결실을 낳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중요성에 비해, 신경심리학이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경심리학은 《인간의 상위뇌피질 기능》(영어판은 1966년)이란 기념비적인 책 안에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또한 일종의 전기 즉 ‘병적학’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영어판은 1972년)에도 실렸다. 이 책들은 그 나름대로 거의 완벽하지만, 루리야가 전혀 손을 못 댄 영역도 있었다. 《인간의 상위뇌피질 기능》은 뇌의 좌반구가 관장하는 기능만을 다루었다. 그리고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의 주인공 자제츠키 역시 좌반구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우반구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경학과 신경심리학의 역사는 좌반구 연구의 역사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열등한’ 반구라고 불리는 멸시를 당할 정도로 우반구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좌반구의 손상 부위와 그에 따른 증상을 밝혀내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었던 데 반해, 우반구의 각 영역에 해당하는 증후군은 알아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우반구는 좌반구보다 좀더 ‘원시적’인 것으로 비하되곤 했다. 반면 좌반구는 인간의 진화가 만들어낸 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주장이 옳다. 좀더 정교하고 전문화되어 있으며 영장류의 뇌, 특히 인간의 뇌에서는 가장 나중에 발달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 즉 생명체가 생존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능력을 담당하는 것은 우반구이다. 이 우반구에 컴퓨터가 연결되어 있고 그 컴퓨터에 해당하는 것이 좌반구이기 때문에 이쪽은 말하자면 프로그램과 도식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정신학은 사실보다 도식 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우반구에 원인을 가진 증후군이 나타나면 그것을 특이하고 기묘한 현상으로 간주했다.」

 

 

색스가 생각하기에 병은 상실이나 과잉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그 자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경장애를 넘어, 병에 걸린 생명체인 개인이 항상 반발하고 다시 일어서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며 주체성을 지키려는 현상에 주목했다. “정신의학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 즉 수단과 결과가 아무리 기묘하더라도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깨어남』은 어떤 하나의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복구와 재통합’을 묘사한 연구였고, 이후 이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과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복구와 재통합을 다루려 했다.

 

 

「제1부 ‘상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극히 특수한 시각적 ‘인식불능증’의 예, 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임상 보고는 고전적인 신경학에서 공리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기존의 견해에 따르면 뇌의 손상은 그것이 어떠한 손상이든 ‘추상적·범주적인 태도’(이것은 쿠르트 골드슈타인의 용어이다)를 마비, 상실시킨다. 이것이 마비 또는 상실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감정과 구체적·즉흥적인 태도뿐이라는 것이다(1860년대의 휴링스 잭슨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음악가 P선생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그는 감정, 구체성, 개인적인 것, 현실적인 것 모두를 잃어버리고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은 시각의 세계에 대해서 뿐이지만) 추상적·범주적인 것만을 부둥켜안고 살며 극히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곤 했던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신경학이나 심리학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만, ‘판단’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력의 결함(P선생처럼 특수한 영역의 장애도, 그리고 더 일반적인 장애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즉 이마엽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정체성의 문제〉와 〈예, 신부님, 예, 간호사님〉 참조)이야말로 수많은 신경심리학적 장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나 이런 환자들의 경우에는 개별성을 인식하는 능력과 판단력이 거의 재앙 수준에 가까울 수 있는데도, 신경심리학은 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생긴 원인은 신경학 그 자체가 상정하고 있는 가정들 즉 신경학의 진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학은 고전 물리학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기계적인 성격을 띠어왔다. 뇌를 기계에 비유한 잭슨부터 컴퓨터에 비유하는 오늘날의 신경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무서운 비유일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의 인지신경학과 인지심리학은 P선생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시각인식불능증이나 얼굴인식불능 증세는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만 사는 삶을 누가 원할 것인가. 데이비드 흄처럼 인간을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라 한다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색스의 지적처럼 그것은 정상적인 인간에게 적용할 수 없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고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한 통일을 유지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알코올로 인한 기억 손상이 심한 코르샤코프증후군의 환자를 살펴보자. 인간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감정, 의지, 감수성을 갖고 있는 윤리적인 존재’(알렉산드르 R. 루리야)이기도 하다. 문제는 깨달을 자신마저 잃어버릴 때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마스터》(2012)에 나오는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올리버 색스의 이 책에 소개되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지미(<길 잃은 뱃사람>)와 매우 유사한데 난폭한 코르샤코프증후군의 인물이지만 그들은 정신 집중에 몰두하는 행위(ex 종교)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연속성과 현실성을 되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색스는 자기 정체성의 극복 힘을 믿는다.

 

 

「지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쩌면 그가 ‘흄이 말하는 식’의 거품 같은 존재, 인생의 표피 위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그런 존재로 전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일관성 즉 그가 앓고 있는 흄식의 질병을 초월하는 어떤 길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경험과학에는 그런 길이 없다. 경험과학 즉 경험주의는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개인의 인격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쩌면 진료와 관련된 교훈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교훈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나 치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렸더라도, 혹은 심각한 기질적인 장애나 흄이 말하는 식의 용해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예술이나 교감, 영혼의 접촉을 통한 재통합의 가능성은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 조금이나마 남아 있지 않을까? 신경학적으로는 도저히 희망이 없는 걸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오감 외에도 자신이 자신임을 아는 ‘제육감(고유감각-근육, 힘줄, 관절 등 우리 몸의 움직이는 부분에 의해 전달되는, 연속적이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 1890년대에 셔링턴에 의해 발견됨)’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누구도 제기할 수 없는 우리 몸의 이런 확실성이야말로 모든 지식과 확실성의 출발점이자 기초’라고 생각했고 『확실성에 대해서』에서는 ‘우리 몸의 확실성을 빼앗아버리는 원인, 조건, 상황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고유감각을 잃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드러나는 장애가 없어 종종 거짓말쟁이나 얼간이로 취급되는데, 이들이 느끼는 ‘존재 상실감’ 혹은 ‘비현실감’은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것을 잃어버린 상태와 같았다. 편마비 증상으로 자신의 팔다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신체 이미지 장애’ 환자 경우 동작과 지각이 완전히 어긋나 버려 실존적 궁지에 빠진다.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다. 언어상실증 환자나 음색인식불능증 환자는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모든 표정(말투, 리듬, 박자, 음악성, 미묘한 억양, 음조의 변화, 높낮이) 등을 날카롭게 파악해 보통 사람보다 더욱 뛰어난 표정 이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손이 마냥 장애인 것은 아닌 셈이다. 신경학에서는 기능하든지 기능하지 않든지 두 가지 가능성에 주력해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의 반대 상태인 기능의 과잉이나 잉여는 엄밀히 따지면 신경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능의 과잉에서 오는 질환을 논하는 것은 신경학의 기본개념에 대한 도전이다. 자주 볼 수 있고 흥미롭기까지 한 이와 같은 질환에 당연히 기울여야 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환도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주목을 받고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흥분성 장애나 생산적인 질환(상상력 과잉, 충동 과잉, 조증燥症 등)을 질환으로 문제삼는다. 해부학과 병리학에서도 비대와 기형, 기형종과 같은 말을 사용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생리학에는 그런 말이 없다. 기형종이나 조증에 해당하는 과잉을 가리키는 말이 없는 것이다. 이것만 생각하더라도 신경계를 기계나 컴퓨터로 간주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개념과 비전은 지극히 편협하다. 따라서 좀더 유연하고 현실에 맞게 개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제1부에서 다룬 ‘상실’ 즉 기능적 결함에만 주목을 하는 한 그것이 지극히 편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기능의 과잉도 있을 수 있다고 하면, 결손에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억상실증뿐 아니라 기억과다증도 있는 것이다. 인식불능증과 반대되는 인식과다증도 있다. 이 밖에도 ‘과다현상’은 얼마든지 많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신경학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분석하고 결함에 중점을 둔 나머지, 실제 생활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생활이야말로 모든 대뇌 기능의 궁극적 표현이다. 적어도 상상 기능, 기억 기능, 지각 기능과 같은 고도의 기능이 거기에 나타난다. 기존의 신경학은 결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신생활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실제의 뇌와 정신 상태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뇌와 정신이 고양된 상태, 과도하게 활발한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병은 단순히 결손적 기능 장애가 아니다. 도취나 흥분에 대한 광적인 탐님 등 과잉의 상황도 나타나는데 이때 “자아가 병과 제휴를 맺고 한 몸이 되어 독립된 존재이기를 포기하고 병의 산물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1885년 질 드 라 투렛이 발견한 투렛 증후군은 기묘한 동작이나 생각이 과잉 현상을 보이는 신경학적 장애다. 정서, 본능, 상상에 관련된 모든 면에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면병 환자(기면성뇌염후 증후군)이나 투렛 증후군은 기존 의학 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해 제대로 분석되지 못한 채 잊혔다. 두 증상이 운동과다장애 즉 과도한 흥분 증세의 공통점이 있다는 건 최근에 다시 주목되었다. 이 두 증후군에 대한 건 색스의 『깨어남』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흥분과 충동 강박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병리 상태는 역설적인 행복감이다. 발작적 회상이 주는 행복감도 있고, 마음의 평온과 순수한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간질도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병리 상태이든 정상 상태이든 우리가 탄 배는 ‘나는 누구인가-정체성’을 향한다.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이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傳記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감각・사고・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와 같은 이야기에 대한 필요성, 아마도 그것이 톰슨 씨가 장광설 만들기에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이기도 할 것이다. 연속성, 즉 연속적인 내면의 이야기의 상실이 그를 일종의 이야기광이 되게끔 내몬 것이다. 끊임없이 말할 수밖에 없고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껄이며 몽상을 말한다. 진실한 이야기 혹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의 내적 세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것이다. 가짜 인간들 즉 유령들이 사는 가짜 세상 속에서 그리고 가짜 연속성 속에서 가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상태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색스의 표현대로라면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건강’한 것이 아니라 병과 싸우고 이겨내는 의지력이 ‘건강’이라 하겠다. 우리는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며 무언가에 의해 끊임없이 규제된다. 우리는 인간이 ‘신경기능과 신경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복잡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사고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라고 여기지만 기질적인 병의 개입으로 변화할 때도 있다. 3부에서는 그러한 환자들이 소개되었다. “제3부의 주제는 관자엽과 변연계에 특이한 자극을 가한 결과 발생하는, 사람을 과거로 이행시키는 심상과 기억의 힘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뇌 속이 어떻게 될 때 환영과 꿈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다.

 

 

「‘무의식의 기억’에 대한 훌륭한 저서를 남긴 에스더 살라만은 자신의 책에서 ‘어린 시절의 신성하고 귀중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 혹은 그것을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역설했다(《순간순간들》, (1970년)). 만일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면 인생은 아주 무미건조하고 근거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고 한다. 그러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얻는 깊은 환희와 존재감에 대해,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 등의 자서전에서 많은 인용문을 뽑아 논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살 수 없는 망명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학창시절도, 암페타민에 찌들었던 시절도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때와 비슷한 일은 그 이후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촉망받는 젊은 내과전문의가 된 스티븐은 친구이자 동료로서 나와 함께 뉴욕에서 일하고 있다. 후회랄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그는 때때로 향수에 잠기곤 한다.

“냄새로 가득 찬 세계, 너무도 생생하고 너무도 현실적인 그런 세계였답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어요. 순수한 지각의 세상, 모든 게 선명하고 생기 있는, 자족적이고 충만한 그런 세상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은 든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후각에 대해 인간이 성장하고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억압된 ‘희생양’이라고 쓴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는 인간이 직립을 하고 전생식기 단계의 원초적인 성욕이 억압당하는 과정에서 후각도 함께 억압당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시각이 지나치게(혹은 병리학적으로) 예민해지는 현상은 성도착증, 물품음란증의 경우에 흔히 나타나며 퇴행이나 도착倒錯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실제로도 보고되어왔다. 그러나 스티븐의 예에서 보인 탈억제는 그보다는 훨씬 더 일반적으로 보이며 비록 흥분(아마도 암페타민으로 인해 유발된 흥분일 것이다)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성적인 것이나 성적인 퇴행과 연관된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한 후각과민증(때로 발작을 동반하기도 한다)은 도파민 과민 상태에서도 발생할 수 있고, 뇌염후유증 때문에 엘도파를 투여받는 환자나 투렛 증후군 환자들의 경우에도 발생한다.

어쨌든 억제가 가장 기본적인 지각단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세련되고 범주화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식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헤드가 ‘원시 감각’이라고 이름 붙인 아직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인 느낌에 대한 억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억제의 중요성은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처럼 과소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부는 지적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질’을 더 헤아릴 것을 강조한다. 관념적·추상적 능력이 지능의 우위일까. 이 장에서 소개되는 지적 장애인들은 구체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이해하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사례였다. 그들을 이해하고 제대로 돕지 못해 상황을 좋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헤아리는 능력은 없지만 비상한 수리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쌍둥이 형제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적응시키려고 억지로 조치를 취해 그들을 그저 우둔한 존재로 만든 경우라든지(<쌍둥이 형제>) 스케치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폐증 소녀에게 가차 없이 치료를 가해 예술능력을 잃게 만든 경우(<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등이다. 백치천재나 자폐증 천재의 재능을 창조적인 인격이나 개인으로서의 인격조차 고려하지 않고 ‘단 하나 남아 있는 능력’이라든가 ‘조각조각 난 단편적인 기술’로밖에 인정하지 않는 건 우리 입장에서의 편견일 수 있다.

 

 

「자폐증 환자는 추상적이고 범주적인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 하나하나가 소중할 뿐이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기질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자폐증 환자에게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자폐증 환자들은 사물을 일반화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일반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세계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우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다중 우주’ 즉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정확하고, 엄청나게 열정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살고 있다. 그것은 ‘일반화’ 혹은 과학적인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존재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리얼한 하나의 현실적 태도이다.」

 

 

「자폐증 환자는 원래 좀처럼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내면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들의 독창성은 내부에서 생긴 것,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내부로 향하는 존재, 독창성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일찍이 자폐증은 유아의 정신분열증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증후학적으로 볼 때 완전히 정반대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항상 외부 세계에서 오는 영향을 호소한다. 소극적이고 타인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반면에 자폐증 환자에게 불만을 토로하게 한다면(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의 영향을 전혀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완전히 고립된 존재라고 호소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섬처럼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라고 존 던은 말했다. 그러나 자폐증 환자들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이다. ‘정통적인’ 자폐증이라면, 그 증상이 3세가 되기 전에 반드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본토’의 기억이 전혀 없다. 반면에 호세처럼 나중에 뇌장애로 인해 야기된 ‘2차적인’ 자폐증의 경우에는 기억이 어느 정도 남는다. 그 옛날에 관계를 맺었던 본토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호세는 다른 자폐증 환자보다 영향을 받기 쉬웠고, 적어도 그의 그림에는 자신과 외부 세계와의 상호교류가 나타나 있다.」

 

  

 

이 책을 통해서도 내 리뷰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인간과 한 인간이 그의 정체성을 이루며 만들어가는 삶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색스의 면면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다. 그의 다른 책에서도 그런 따스한 마음의 질을 느낄 수 있다. 620쪽에 달하던 벽돌책 『깨어남』이 그저 임상 분석 글이었다면 읽기 굉장히 고역이었을 텐데 그의 그런 면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단순히 기이한 환자나 병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그가 본문에서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우리를 닮은 이야기로서 삶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길 원한다. 최근 색스의 첫 저서 『편두통』(1970)이 국내 출간되었다. 보나 마나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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