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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기나긴 이별 (필립 말로 시리즈 6) ㅣ 필립 말로 시리즈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12년 11월
평점 :
"나는 하드보일드 작가로 간주되긴 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하드보일드는 그저 생각을 형상화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죠."
- 레이먼드 챈들러, 「나란 사람은」,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탐정소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탐정에 대한 소설’은 아닐 겁니다. 탐정은 오로지 촉매제로 이야기에 첨가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전과 정확히 같은 모습으로 이야기에서 빠져나가는 겁니다."
- 레이먼드 챈들러, 「촉매제로써의 탐정」,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 『기나긴 이별』을 쓸 당시, 챈들러는 아내 시시 챈들러의 병세를 알고 몹시 힘든 상태였다. 시시는1948년에 폐 섬유증 진단을 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챈들러는 훗날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아내가 조금씩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봤고, 그사실을 안다는 고뇌 속에서 내 최고의 책을 써야 했으며, 그럼에도 써 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서재에 들어가 눈을 감고는 생각을 모아 스스로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지요. 그러는데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957.2.11.)
「기나긴 이별』은 1953년 영국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챈들러의 최고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시시 챈들러는 1954년에 사망했다.
- 레이먼드 챈들러, 「스타일이 모방되거나 심지어 표절되다 보면」 각주,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챈들러는 순문학(시)을 쓰고 싶어 했지만 그 꿈을 포기했기에 자신은 "진정으로 뛰어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양자오 『추리소설 읽는 법』 참고). 그는 대중적인 B급 소설 작가라는 평가에 개의치 않았다. 그에겐 작품 자체의 스타일이 가장 중요했다. 평생의 사랑이었던 아내 시시의 병환을 비감히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서 쓰고 1953년 발표한 이 마지막 장편은 생생한 인물, 치밀한 플롯, 사실적 묘사, 탄탄한 문장력 등 탐정 소설만이 아니라 문학 전체에서도 좋은 작품이다.
하루키는 『기나긴 이별』을 12번이나 읽었다고 했는데, 그가 챈들러의 문체와 심드렁하고 독립적인 성향의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정말 흠모해 자신의 소설에 반영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키의 지적대로 이 소설의 키는 테리 레녹스 캐릭터의 비밀스럽고 독특한 매력에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필립 말로가 호감을 가져 우정을 나누고 곤경에 빠지면서도 사건을 추적하기까지 레녹스 캐릭터가 없었다면 내러티브의 동력이 쉽게 떨어졌을 것이다.
"스스로 만든 함정만큼 치명적인 함정은 없다"라고 말하며 말로는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챈들러는 스스로 만든 이 소설이 치명적 소설이 된 걸 기뻐할 자격이 있다.
ps) 하드보일드한 맛의 김릿 칵테일을 반드시 마시고 싶게 되는 소설ㅋㅋ
* 하루키식 묘사가 딱 떠오르는 대목
1. 촌철살인 직유
우리 지역에서 돌팔이 의사들은 기니피그처럼 번식한다.
2. 인물 비유
"... 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친구에게 매력이 있다고 쳐도 제철공 속옷 정도의 매력이겠지. 이 고객은 정신이 나가면 계좌도 없는 은행의 수표를 쓰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어. 그렇지만 이 사람은 항상 잘 빠져나왔고 내 호의로 큰집에 안 가고 버틸 수 있었지. 그 사람이 이걸 주더군. 대학살을 계획하는 한 쌍의 인디언 추장처럼 우리 둘이 이거나 같이 피워볼까?”
3. 장면 비유
날개가 너덜너덜해진 벌 한 마리가 나무 창문턱을 기어 다니며 피곤한 듯 가냘픈 소리로 윙윙거렸다. 이제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없으며, 자기는 끝장났고, 너무나 많은 임무를 수행했지만 다시는 벌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4. 음식
커피는 너무 우려냈고 샌드위치는 낡은 셔츠에서 찢어낸 조각처럼 냄새가 너무 진했다. 미국 사람들은 빵을 구워서 이쑤시개 두 개로 꽂아놓고 옆으로 양상추가 비어져 나오게 만든 것이면 무엇이든 먹는다. 그것도 시든 양상추면 더 좋고.
* 챈들러 특유의 깔끔한 문체
1. 대화
“태워다줘서 고마워요, 모건. 한잔 하겠소?”
“나중에 하는 걸로 하죠.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테니.”
“혼자 보낸 시간은 너무 많았소. 지겹게도 많았지.”
“작별 인사를 한 친구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그 사람을 위해 감방에 처박히는 것을 감수할 정도라면, 친구가 있었다고 해야겠죠.”
“내가 그 사람을 위해 그랬다고 누가 그럽디까?”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기사를 쓸 수 없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잘 있어요. 또 봅시다.”
2. 대화
“경찰을 불러야 합니다. 그게 바로 법이라는 겁니다.”
“그런 일은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린 현재 파리 한 마리 때려잡을 만한 증거도 없습니다. 경찰 스스로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도록 놔둬요. 법률가들이 해결하도록 놔두고. 법은 판사라고 하는 법률가들 앞에서 또 다른 법률가들이 토막 내기 위해, 다른 판사들이 첫 번째 판결이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 대법원에서는 두 번째 판결이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것이 법입니다. 우린 그런 것에 목까지 푹 파묻혀 있어요. 법이 하는 일이라곤 변호사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것뿐이에요. 변호사들이 법을 조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거물급 깡패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3. 대화
나는 뒤로 기대고 담뱃불을 붙였다.
“나를 왜 보자고 한 겁니까?”
“당신은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소, 말로?”
“전혀 모르겠는데요. 정보가 별로 없으니. 게다가 모든 사람들이 뭔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 아니오.”
“모든 사람이 술에 취하지는 않지.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소? 청춘이나 양심의 가책이나 이런 허접한 사업에서 허접하게 시간당 벌이나 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자각으로부터?”
“이제 알겠군.”
나는 말했다.
“누군가 모욕할 사람이 필요한가 본데. 계속하시지. 참지 못할 것 같으면 말해줄 테니까.”
4. 서술
일단 누군가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살인자는 언제나 비현실적이 된다. 증오나 공포, 탐욕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 계획을 짜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도망가려고 하는 교활한 살인자들이 있다. 그런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도 있다. 죽음을 사랑하는 살인자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살인은 막연한 형태의 자살과도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들 모두 제정신이 아니지만, 스펜서가 말한 의미와는 달랐다.
내가 마침내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거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전화가 따르릉 울려대는 소리에 나는 검은 잠의 우물에서 끌려 나왔다.
5. (정신 나간 작가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서술
달빛 위로 밤안개가 솟아올랐지만, 나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그 잔을 내려놓는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기다란 꽃병에 장미 줄기를 꽂아놓듯이. 장미는 이슬을 머금은 꽃송이를 흔든다. 나는 장미인지도 몰라. 형제여, 내가 이슬을 머금었네. 이제 이층으로 올라가야지. 그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독한 술을 조금 더 마셔야 할지도 모르겠군. 안 된다고? 좋았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럼 내가 이층에 도착하면 가지고 오라고. 내가 이층에 도착하면 뭔가 기대할 만한 게 있어야지. 내가 이층까지 무사히 올라갈 수 있으면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거야.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지. 나는 그처럼 나 자신에 대해서 아름다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니까. 나를 사랑하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경쟁자가 없다는 거지.
6. 서술
“근사하고 조용한 동네로군. 딱 적당할 정도로 조용하단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단을 내려가 자기 차에 올라타고 떠났다. 경찰들은 절대로 작별 인사를 하지 않는다. 항상 우리가 일렬로 서 있는 용의자 속에 끼여 있을 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