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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평점 :
좋은 소설은 가시권이 매우 넓다. 이 소설은 가족, 민족, 국적, 인종, 세대 갈등, 노년, 위안부, 양심 문제 등 인간 실존에 대해 많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한국인이었으나 일본인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천황을 위해 일본군으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가 미국인으로 살았고 한국인 소녀를 입양했다. 우리가 어떻게 보든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전혀 없다. 입양되어 미국에서 자란 서니(내 귀에는 자꾸만 '선희'로 들리던) 또한 그렇다. 애국심이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자긍심은 '상상의 공동체주의'다. 생존본능에 가까워 그 땅에서 태어나 살아왔다면 사실상 벗어던지기 어렵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내 피부 색깔과 성별, 언어로 인해 규정되는 틀은 타국에서 쉽사리 공격 거리가 된다. 숨기고픈 과거는 함묵하며 인정받기 위해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 '척하기'에 골몰한다. 우리는 정말 당당하게 살고 있을까.
중산층의 노년에 대한 성찰은 필립 로스 『에브리맨』과 비슷하면서, 로스가 유대인이자 미국인의 삶을 그렸듯이 이창래는 동양인이자 미국인의 삶을 그렸다.
전쟁 중에 군의관 역할을 했고 전쟁이 끝나면 의사가 될 꿈을 꿨지만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클린이 되었다. Doc(doctor 약자) 하타로 불리며 평생 의료기기 판매상을 했고 은퇴했다. 위안부 K와의 일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굳이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두 사람은 원하는 가족이 되지 못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도 잘 살든 어렵게 살든 자신이 원했던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더 비참하게는 열심히 살고자 하고 사랑하려 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불운이 닥친다. 전쟁에서도 살아남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프랭클린이 지금껏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일본인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의 삶을 떠나 미국에 왔어도 프랭클린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주민으로 평생 체제에 순응해온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서 서니는 더 반항적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랭클린과 서니의 어긋난 관계도 그들의 남은 생의 결과도 각자의 선택이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삶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것들과 얽히게 되고 궤도가 달라지고 마니까. 삶을 '언제나 지금부터'라고 말하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것은 지난 삶의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라 다시 바꿀 용기와 각오를 위해서일 것이다. 프랭클린의 삶과 의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노력이 아니었고 앞으로의 선택은 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방향성은 이 소설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데, 둘러보면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과 개인의 영달만 꾀하는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소설은 매우 올곧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문제, 그것을 담은 문장들은 변함없이 현실적이고 현재와 닿아있다.
ps) 가혹한 피해자였기에 그랬을 테지만 위안부 k, 여성을 너무 신성시 다룬 게 아닌가 싶다.
1. 어떤 사람이 왜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떻게 해서 이런 행동은 하고 저런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는지, 과거를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아니면 평정한 마음 또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를 생각할 때조차 완벽한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다 아는 일이지만, 과거란 결국 매우 불안정한 거울이어서 너무 가혹하면서도 동시에 지나치게 비위를 맞추어 주기 십상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절대 진실을 비추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2. 히키 부인은 좋게 봐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뭐라고 토를 달지는 않았지만, 내가 좋게 봐 준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이해였다.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비뚤어진 태도를 보일 수 있고, 심지어 충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 중 무엇이 진정하고 핵심적인 것인지, 또 무엇이 어느 모로 보나 비정상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입장에서도 쓸데없이 되풀이해 생각하기보다는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 순간적인 실수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나 나름의 경험을 통해 그래야 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3. 은퇴를 하게 될 때 부딪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리브 크로퍼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다. 설사 그녀가 그녀 표현대로, ‘전방 180도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신경 쓸 것 전혀 없는 최고 수준의 콘도’를 찾아 준다 해도 그녀의 일은 거기서 끝이 난다. 내가 괜찮은 거처를 가지게 된다 해도, 거기서 어떻게 살지, 그리고 거기서 왜 살아야 하는지는 나 혼자 궁리해야 할 문제다. 흔히 말하는 은퇴 후의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에는 쉽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낚시를 하지 않고, 브리지도 하지 않는다. 작은 인형이나 이국적인 새나 골동품 장난감을 수집하지도 않는다. (중략) 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침대에서 책을 읽는 것 정도는 해 볼 수 있겠지만, 내가 그런 데서 듣고 보게 되는 것들 대부분은 나처럼 늙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냥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 속 편한 일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4.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 내가 가장 크게 우려했던 것은 모두가 이따금씩 느낄 수 있는 어색함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 다니는 거리나 가게에서, 또는 다른 경우라면 은은하고 푸릇푸릇한 공원 그 이상일 수 없는 곳에서 주변 환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저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한다)에 대해 의식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궁리하는 것. 내 생각이든 남의 생각이든 나는 정말이지 이런 식의 생각을 좋아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내가 이 타운에서 나 자신을 위해 꾸준하게 조성해 온 그런 상황 속에 들어가 있기를 늘 원해 왔다.
5. 우리는 그 말에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다. 기침이 자꾸 나왔지만, 레니 바네르지 같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생의 순간들이라는 것이 꼭 적확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느낌, 그렇게 ‘가치’가 충만하고 묵직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이면 된다. 이 경우에는 나와 레니가 다시 한 번 농담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가벼운 시간을 보내는 순간일 뿐이다.
6. 사람의 유년기가 놀랄 만큼 취약한 시절이라는 것에 대하여 공적인 논의와 토론이 많다. 시기와 상황이 사람의 성격과 관점, 심지어 행동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멋대로인 아이가 공동체의 생산적인 구성원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도와야 하며, 이것을 무시하면, 기본적으로 훌륭한 본성을 가진 아이라도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적 상호 작용에서 곤란을 겪을 수 있고, 심지어 병적이 되고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이 근래의 통념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아버지 없이, 낙인찍힌 가족으로 살아야 했던 베로니카는 어떻게 이렇게 나름 훌륭하게 성장한 것일까? 아이의 어머니 코모 경관은 어떻게 했길래 딸의 마음에서 타고난 기품과 선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베로니카든 다른 사람들이든 실제로는 신의 뜻에 따라, 또는 약간의 우연에 따라 한 가지 기질, 딱 한 가지 기질만 지니고 있을 뿐이고, 겉보기에 변종으로 보이는 것들은 각각의 윤곽, 일상적인 장식물에 불과한 것일까?
7. 은퇴하고 나서 몇 년 동안 이곳의 집단 기억이 내가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 짧다는 것, (중략) 나는 선량한 닥 하타에서 괜찮은 노인네에서 저 늙은 동양인이 누구냐로 바뀌었다. 그 질문(지난 여름 처치 스트리트의 새 식당에서 점심 값을 치르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에는 심각한 악의나 편견은 담겨 있지 않다. (중략) 이런 식으로 처량하게 자신의 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모두 겪는 일, 심지어 한창 때는 적당한 위치를 확보했던 사람들조차 겪는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 경우는 시간으로 인해 흐릿해지는 것과도 다르고 현대 생활에서 늙어 가면서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일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내가 어떤 인종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사실로 남기 때문이다. 내 얼굴이라는 단순한 항상성. 따라서 나와 같은 사람은 사소한 손실들은 받아들이면서, 삶에서 생기는 위안들에 행복해해야 하는 것일까?
8. 서니 의료 기기도 지금처럼 속이 반쯤 빈 채 문을 닫는 대신, 활기로 인해 눈부신 곳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환상적인 상상이 펼쳐지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너무 복에 겨운 상상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무슨 명예나 부의 측면에서 복을 누리는 상상은 아니다. 그저 매일 밤 가게를 나오면서 슬쩍 돌아보았을 때, 그곳이 우리를 담아 줄 만한 그릇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상상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 일본인 부부의 손을 잡고 정규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영광스러운 전쟁으로 일컬어지던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기까지, 그리고 이 나라에, 그것도 매우 품위 있는 타운에 정착하기까지. 그것이 내 오랜 어리석음, 나의 연이어 온 실패는 아닐까?
9. …… 내 집으로 돌아와 그 애의 아들과 함께 보낸 편하고 즐거운 시간들의 여파 속에서 내 집이 훨씬 더 거대하게 자라 버렸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훨씬 더 작아졌음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그와 더불어 내 인생이 갑자기 다시 잠정적인 것이 되었음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실제로 나는 마치 젊은이처럼 내 인생이 가능성과 선택을 향해 열려 있다는 느낌, 그만큼 취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늘 내가 진실로 두려워하던 존재 상태였다. 사람들의 취약한 상태는 오랫동안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물론 나는 전쟁 중에 임무를 수행하면서 죽음과 연약함을 목격할 때마다 경악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쟁을 맞아 무딜 대로 무디어진 남자들의 의지는 어떤 종속적 상태를 피해 가지 못했다. 들을 귀와 볼 눈만 있으면 무력하게 빠져들고 마는 그 비인간적인 행위들.
10. 우리는 좀 더 전방으로 이동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랑군 여행은 짧은 마지막 위로 휴가였다.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해변의 어스름 속에서 묘하게도 전쟁이 그렇게 끔찍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젊은 남자라 해도 공동의 목적을 앞에 두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동료 의식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사실 이보다 더 진정한 증명의 시간은 바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오노 대위가 나를 부를 때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심하게 쌓아 올린 모든 인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안쓰러운 고갈 상태에서는 순수한 증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솟구쳐 오르며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대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때 오노 대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1. 그는 위안부를 생경하게 ‘조센삐’라고 불렀다. 여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다가 천한 해부학적 욕설을 덧붙인 말이었다. 물론 나는 그가 동료들에게 허세를 부리려고 그런다는 것을 잘 알았다. (중략)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짐승 이야기를 하듯. 때문에 나는 잠시 몸이 얼어붙었다. 물론 나는 그 여자들을 짐승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때 내 시야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내 생각은 부자의 생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자기 집이나 소유지에서 일하는 수많은 하인들을, 그들의 노력과 몸부림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부자. 그들을 그의 삶이라는 메커니즘의 부품으로만, 매일 밤낮없이 꾸준히 돌아가는 기계로만 보는 부자.
(중략) 나 역시 생각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아마 여자들을 그런 식으로 대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살덩어리들로. 사라지기 전에 얼른 가져야 할 짧고 따뜻한 쾌락으로. 그것이 전시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12. "자, 그 아이를 위하여 뭘 할까?"
내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바는 먼 미래다. 그 아이의 교육, 훈련, 직업.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것들.
그러나 서니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애가 얼마나 자제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흔히 하는 말로 ‘신앙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이 아이 내부에서 용서의 비밀 창고 같은 것을 발견한 것 같다. 내 창고는 이미 오래전에 바닥이 났는데. 어쩌면 용서는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 현재 어떻게 되었다 해도, 아무리 찌꺼기만 남고 빈약하다 해도, 원하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가없이 늘 새로워진다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서니가 마침내 입을 연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요. 만일 첫 아이를 낳았다면, 아마 토머스는 낳지 못했을 거예요. 토머스고 누구고 아무런 존재도 없었겠죠.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래,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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