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슬랩스틱 - 친구를 위한 BGM 2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리뷰를 정리해야지 맘이 편할 거 같아 어머니에게 혼나면서 귀성길을 미뤘다. 쓰고 나니 속이 시원한가 하면 잘 모르겠다. 가지고 갈 책이 기대되면서도 한편 맘을 무겁게 하기 때문에. 아아, 책은 미니 감옥 같다. 미니라고 하기엔 무게가 상당;;
읽기 시작한 로저 에커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에드워드 S. 케이시 《장소의 운명》은 모두 놀라운 책이다. 두 사람 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밤과 장소에 대해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경위를 밝히는데, 우리는 참으로 모르는 게 많고 그보다 더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다. 두 책 다 밑줄 긋기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어느 걸 가져가야 하나 고민이다ㅜㅜ;; 안 가져가면 내려가서 내내 궁금해할 테니 말이다.
흡사 바슐라르의 글을 떠올리게 하는 로저 에커치의 유려한 문장을 보라!
"예민한 눈으로 보면, 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간다. 계곡에 먼저 나타난 그림자가 산중턱의 경사를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해 빨아올리기'(sunsucker)라고 알려져 있는 저무는 햇살은 마치 다음날을 위해 빨려 들어가는 듯 구름 뒤로 빛을 쏘아올린다."
장소에 대한 수많은 개념 정리와 멋진 인용들로 가득한 에드워드 S. 케이시의 글은 또 어떻고!
"그러므로 뭔가를 생각하려 할 때, 그것을 어떤 장소 내에서 생각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ㅡ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이렇게 경계했다. "사람은 목적이 없기보다는 차라리 공허를 목적으로 삼으려 한다.""
어쩌다 보니 제임스 글릭 《카오스》를 읽게 됐는데, 이런 책을 사놓고 당장 읽지 않았던 것이 매우 후회됐다. 이런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만;
소화할 내용이 많아 힘들지만 내용이 어렵다기보다 생각하지 못 했던 부분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한 거 같다. 과학이 왜 점점 더 예술과 문학의 상상력을 넘어서고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수학과 기하학의 역할이 더 크긴 하지만 카오스 이론은 특히 더 그렇다.
최근 제임스 글릭의 새 책《인포메이션》 나왔던데, 내가 제임스 글릭을 읽어야 할 때라고 우주가 알리는 신호ㅎ! 제임스 글릭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후속작을 무조건 읽게 된다는 것에 500원 건다~ 문장력, 문학성, 서사성, 전문성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너무하잖아ㅎㅎ;
명절 때마다 친구를 위한 BGM을 틀어놓고 갔는데, 이번에 안하고 가자니 좀 (나만) 섭섭한가 싶어서 몇 곡 올리고 간다.
늦었어, 늦었어. 앨리스의 토끼처럼 그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