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피아나 -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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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1이다 •
찌든 때(오염된 과거) 제거와 표백(새로운 인생)을 한 번에~ 하는 세제 광고는 아니다;
체코 소설가 파크리트 오우르제드니크 《유로피아나》를 읽으며 신선한 화법에 단번에 매료됐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죽은 각 나라별 병사 시체들을 이으면 몇 킬로가 되는가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공간을 종횡무진 오가는 플롯과 블랙 유머로 자신이 참전했던 2차 세계대전을 연결해 써 내려갔던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 생각도 나고, 백과사전 식 나열과 실험적 글쓰기로 유명한 조르주 페렉 생각도 났다. 조르주 페렉도 전쟁 피해자인데,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고 어머니는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해 고모에게 입양되었다. 그 트라우마는 《W 또는 유년의 기억》에서 건조한 문체와 독특한 설정으로 표현되었다. 《W 또는 유년의 기억》은 소설 속 알레고리 읽기를 어려워하는 독자에겐 호감도가 떨어지겠지만, 보르헤스나 이탈로 칼비노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를 만끽할 소설이다.
커트 보네거트, 조르주 페렉 다 천재 글쓰기꾼으로 통하는데, 《유로피아나》를 읽어 보면 파크리트 오우르제드니크도 뒤지지 않는다. 역사 사실과 허구 일화를 교묘하게 섞어 어디까지가 진짜고 가짜인지 알 수 없어하며 읽게 된다. 역사가 사실 그렇고 소설이 원래 그렇기도 하다. 사람에 의해 전해지고, 그 의도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표현되는 성질을 생각하면 말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아주 정색하는 말투로 신문 논설 같기도 한데, 그게 또 만연체다. ㅋㅋㅋ 다른 소설에선 또 어떤지 궁금하다. 만연체를 싫어하는 독자라도 전개가 재밌고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158 페이지)이라 어렵지 않게 읽으리라 본다.

 

 

 

 

 

• 내 이름은 역사만큼 어렵다? •

나는 작가 이름이 소설보다 어렵다;; 성은 당분간 계속 헷갈릴 듯. 《기억이 나를 본다》 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때는 발음이 어려웠지만, 오.우.르.제.드.니.크는 읽고 나서 바로 헷갈림. 오우...이런...르...제...길.... 역사 재해석 전에 기억 재구성부터 고민해야 할 듯_-)
짧은 소설인데도 읽는 내내 이런 저런 것들이 자꾸 겹쳐 보여 딴 생각을 참 많이 했다.

 

 

 

 

 

 

 

 

 

 

 

 

 

• 나는 1+1+1……이다 •

* 제임스 워드 《문구의 모험》 생각나는 대목

뜯어서 쓰는 화장실용 휴지는 1901년 스위스의 종이 제조업체에서 발명했는데 그날은 스위스 정부가 이탈리아 왕을 암살한 것으로 의심되는 어떤 무정부주의자를 이탈리아 정부에 넘겨준 날과 같은 날이었고 신문에서는 화장실용 휴지가 소박하지만 중요한 발명품이라고 보도했다.

ㅡ 파크리트 오우르제드니크《유로피아나》 -p24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생각나는 대목

영국에서는 1백만 명의 여성이 군수 공장에서 일했고 그중 평균 열여덟 명이 매일 실명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오렌지색에 얼굴은 노란색이어서 사람들은 그들을 카나리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의사들은 전쟁이 끝난 뒤 그 여자들 중 3분의 2가 불임이 될 거라고 추정했다.

ㅡ 파크리트 오우르제드니크《유로피아나》, p22

어떤 도시에서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시신 화장법에 대한 특별 교육 과정을 열기도 했다. 나흘간의 교육에 열다섯에서 스무 명의 수강생이 편성되었다. 그들은 뼈 부수는 기계를 조작하는 법과 시신을 넣은 구덩이를 고르게 덮는 법과 나중에 그 구덩이 위에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흙을 체 치는 법을 배웠다.

ㅡ 파크리트 오우르제드니크《유로피아나》, p29

 

 

 


* 박상연 소설 《DMZ》를 각색한 영화 박찬욱 《JSA 공동경비구역》 생각나는 대목
카랑시에서는 191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독일군과 프랑스군 병사들이 함께 캐롤을 부르면서 서로의 건강을 위해 건배했고 서로 소리치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독일군은 프랑스군에게 정말로 개구리를 먹는 거냐고 물었고 프랑스군은 독일군에게 정말로 맥주를 마시면 턱수염이 자라는 거냐고 물었다.

ㅡ 파크리트 오우르제드니크《유로피아나》, p26



 

이 짧은 인용들에서도 수많은 정보와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이게 진짜야? 읽는 내내 눈으로 깜짝~깜짝~ 위에서도 당부했듯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사실에 바탕을 뒀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하지만 왜곡을 목적으로 한 글이 아니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실을 충분히 섭렵했기에 이런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유로피아나》는 역사에 대해 알면 아는 만큼 또 모르면 모르는 대로 공부가 되고 재미를 준다.


요즘 ˝지대넓얕˝이 선풍이라지? 이 책은 바로 그런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은 아닌 거 같지만) 지식˝에 걸맞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하면서도 잘 요약된 정보로 가득한데, 역사 책을 소설 식으로 썼다고 해도 말이 되는 작품이고, 르포 문학의 새로운 모험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할 수도 있다. 누가 보면 출판사에서 책 제공이라도 받은 줄 알겠네; 책이 너무 궁금해서 내 돈 주고 정가에 샀음-ㅅ-!


 

 

• 재해석 되어야 할 이야기, 역사와 소설 •
역사는 언제나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은, 철학이나 사회학 개념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를 나타낸다. 현재 국내 정치 사회 상황을 보면 가장 절실한 문제이기도 하다.
기발하면서도 기이하기도 한 《유로피아나》는 역사를 살피며 작가의 생각을 선언처럼 문장 속에 잘 녹여냈다. 과장 좀 보태면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이 생각나기도 했다.

최근 소개된 공쿠르 수상작 《오르부아르》(피에르 르메르트, 2013 수상)는 1차 세계대전을, 《울지 않기》(리디 살베르, 2014 수상)는 에스파냐 내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는 그곳이 조금 부러웠다. 빠진 것이 없나 역사를 돌아보는 수행들이 건강하게 현재 진행형이라는 소리니까. 한국에서는 몇 해 전 5.18을 소재로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써 큰 성과를 보여 줬지만, 6.25 전쟁 경우 《태백산맥》 이후로는 주목되는 작품 얘길 들은 바 없다. 자료 접근과 수집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실질적인 작업 여건(경제 사정)과 의욕 문제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린 역사 앞에 너무 얼어 있는 건 아닌지. 무기력이면 더 심각하고.

 


 

인생에서 태어남과 죽음이 가장 큰 변화라면, 역사에서 생과 사가 요동치는 전쟁만 한 격변은 없다. 시간이 흐르며 전쟁을 겪은 세대가 사라지면서 전쟁은 옛이야기 같이 취급되고, 현 세대는 현재를 전쟁같이 살아가기 바쁘다. 물론 어딘가에서는 계속 전쟁 중이다. 끝없이.
역사 속 망령들을 끄집어 낸 현 한국에서는 ˝빨갱이˝를 다시 ˝종북˝으로 바꿔 칼처럼 휘두르는데, 이 귀신 놀음 속에 빠진 자들은 현재를 재해석하기는커녕 누구든지 잡히는 대로 시신 구덩이에 처넣을 기세다.

정신 나간 시대를 분노와 우울 속에 살면서 내가 파크리트 오우르제드니크 《유로피아나》를 펼친 것은 세상을 읽고 말하는 작가의 혜안으로 또 어떤 것이 있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있음과 없음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자가 새로운 초점을 만들어 보도록 하는 소설, 그것만으로도 아니 그것이 진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실을 경직되어 보지 않으면서 재미도 만점인 젊은 한국 소설도 속속 상륙해주길 바란다. 미래파나 후장 사실주의 같은 사조가 나타날 때 그들만의 리그라고 비난하지만, 내 보기엔 한국 문학 전반이 상처 핥기와 방어와 차단막 속에 도취되어 있는 인상이다. 각자 그들만의 리그 중이다. 이런저런 작품이 다 공생한다는 데 이의는 없다. 그러나 소재주의에 빠진 시야 좁은 작품이 너무도 많다. 그러니 표절 문제도 끊이지 않는다. 이런 풍조는 작은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단편 소설이 한국 문학을 주도해 온 탓도 있다고 본다. 등단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과 ˝어떻게˝는 같이 가는 법이다. ˝무엇˝이 목적이나 소재로 전락할 때 그 문학은 정말 ˝무엇˝을 말하겠는가. 작가도 사람인데 시대 풍랑 속에 혼자 요령껏 헤쳐 나와 보라고 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유로피아나》가 세상의 파도를 글로 서핑타기 하는 모습은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도착할 것은 꼭 도착한다고 나는 믿는다

 


♪ Jon Brion - Something You Can`t Return To




 

 

•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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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08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원뿔상품이군요^^ 책표지 보고 잡지인줄 알았어요 ㅎㅎ

AgalmA 2016-01-08 20:51   좋아요 0 | URL
소설 코너에 이 책 있는 걸 보고 생뚱맞게 느껴지긴 했어요ㅎ; 제목 아녔으면 문구도 그렇고 표지가 사회학 책 느낌이 나서^^;

물고기자리 2016-01-08 18: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러시깁니까?^^ 프루스트 덕분에 시력저하가 오려고 하는데, 와중에 자꾸 본의 아니게 영업도 하게 되는데, 이젠 만연체로 꿈도 꾸는데, Agalma 님은 색감과 구도가 인상적인 사진도 찍어 올리시고, 심지어는 다른 작가 님에게 매료되다니욧!ㅎ

AgalmA 2016-01-09 06:59   좋아요 1 | URL
프루스트 활자가 작은 건 아닐까요? 저도 프루스트 볼 땐 눈이 아파요ㅋ;; 만연체 꿈ㅎㅎ 저도 문장을 좀 만연체로 쓰는 편인데, 프루스트와 오우르지드니크 연타로 읽다보니 증세가 더 심각해졌;; 중간 중간에 일부러 단문의 다른 책을 읽어 눈 가글을 하기도;;
위 글도 만연체 안 되려고 엄청 수정했는데, 더러 보이죠;
사진이야 잘 찍으시는 분 많으니까 쑥스럽고요a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우르지드니크는 이번 한 번 매료지만 프루스트는 아직 만날 횟수가 많아서 유리하죠ㅎ;

cyrus 2016-01-08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토피아나》는 한 편의 문학적 꼴라주 같습니다. 한 편의 소설에서 또다른 여러 개의 소설들의 장면 일부를 떠올리게 하니까요. ^^

AgalmA 2016-01-08 20:59   좋아요 0 | URL
네. 문학 콜라주, 정말 그래요. 위에 인용들도 올렸다시피 스쳐가는 소설, 영화 등등이 엄청 많아요.

비로그인 2016-01-08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대문 형무소는 지난 2013년 가을 모 재야 단체가 주관한 역사 글쓰기 대회 시상식
에 참석했다가 나오는 길에 옆에서 보았습니다. 시상식장이 형무소 옆 그러니까 같은 울타리 안에
있었지요. 정신 나간 시대이지만 점차 세련된 야만이 극에 달하는 시대라고도 보입니다.

AgalmA 2016-01-08 21:02   좋아요 0 | URL
흔적님은 참 몸이 세 개라도 모자라시겠습니다.
형무소 안에 기념관 등등 해서 건물이 많더군요. 참 울적한 공간이라 눈 쌓인 겨울은 어떤 느낌일까, 다시 와야지 하고 있었는데 아직 실천을 못 했어요. 조만간 눈 오면 가봐야 할 듯...
한국에서 세련된 야만이요? 좀 어렵지 않을까요...수가 너무 보여서...

비로그인 2016-01-08 21:19   좋아요 0 | URL
듣고 보니 그런 듯 합니다... 우직한 야만이라고 해야 할까요? 소개하신 소설 읽어보고 싶네요...

AgalmA 2016-01-08 23:51   좋아요 0 | URL
우직도 글쎄요...야만 짜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 지 야만이 참 빨리빨리 배달이 잘 돼서;; (중국집 비하 의도는 없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야만 짓도 워낙 잘 해대니...
전세계적으로 보통 사람은 휘둘려 상하고...

CREBBP 2016-01-08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대문 형무소 사진,... 상처는 씻기지 않았지만 사진은 멋지구리 네요. 저도 유토피아나 샀는데 너무 얇아서 사기당한 기분이었는데 읽으면 나아지겠군요

AgalmA 2016-01-08 21:09   좋아요 0 | URL
저도 너무 얇아서 애걔~~했었는데, 요즘 시집 한 권도 8000원이고, 소설 내용의 깊이를 생각하면 비싼 건 아니라고 생각 들어요 :) 그간 읽어왔던 사회, 역사 이슈 거리를 정리하게도 해 주니까.....소설 참고서? 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1-08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글 보면, 세상에 제게 새로운 책이 정말 많다고 새삼 느껴집니다. 언제 이런 책 읽어 볼 수 있을지. 흑 ㅠ

AgalmA 2016-01-08 21:08   좋아요 1 | URL
저도 국내 출판된 것만 읽는 걸요; 원서로 실시간으로 더 다양한 책을 읽는 분들 생각하면 더 놀라웁겠죠.
아니, 과학, 뇌과학 책도 열심히 읽는 분이 이런 책 못 읽는다고 우시면 어쩝니까ㅎ;

서니데이 2016-01-0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필사진이 자주 바뀌네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AgalmA 2016-01-08 23:52   좋아요 1 | URL
기분 내키는 대로 막 바꿉니다.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ㅎㅎ
서니데이님도 주말 잘 보내시길요~

해피북 2016-01-09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와 소설, 영화까지 이야기 하셨으니 1 1 1 아닐까요 ㅎㅎ 이 <문구의 모험>이 궁금하긴했는데 어떤 책처럼 장황하게 늘어지는 이야기일까봐 망설이고 있는데요. 이 책 가독성이나 재미(뭐 크지 않아도 상관없지만요) 면에서나 괜찮을까요...아 아니 음 ...잔소리같은 이야기만 아니면 좋은데 말이죠 ㅎㅎ

AgalmA 2016-01-09 18:31   좋아요 0 | URL
111 ㅎㅎ 그....그렇군요! 리뷰 상품 이미 팔아서 고치긴 그렇고ㅎㅎ
<문구의 모험>은 아직 절반 밖에 못 읽었지만 잔소리ㅎ 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작가가 문구를 만나고 쓰는 얘기는, 정보는 내가 더 많이 알지? 라기 보다 공감을 얻고자 하는 시시콜콜함과 조심스러움이 더 강하죠^^ 덕후들의 두 양태 중 후자쪽ㅎ 국내에 없는 문구 얘기들이 많아 생소하기도 해서 관심도가 떨어질 지 높아질 지는 독자 호불호에 있을 거 같고요. 문구와 시대적 에피소드들이 많아 인문학 책으로도 좋아요. 마케팅 팔림 현상으로만 볼 수 없는, 제겐 좋은 인상을 준 책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