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칠순이 넘은 노작가는 ‘지옥불 같은 열정’을 숨기며 살았던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왔다. 대가(大家)라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됨이 없는 소설가 박완서(73)씨의 열다섯번째 장편 ‘그 남자네 집’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발밑의 언땅이 고무공처럼 온몸에 탄력을 주었던” 첫사랑의 순간을 회억한다. 그녀의 많은 전작들이 그러하듯이 6·25 전란이 흑백사진처럼 배경 처리돼 있다. 박씨의 장기인 정겹고 곡진한 ‘수다’는 이 작품에서도 장관을 이루며, 놀라운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소설은 중년의 여주인공이 첫사랑의 상대였던 ‘그 남자’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느날 그 남자가 어머니와 함께 그녀가 살던 돈암동 안감내의 홍예문이 달린 기와집으로 이사왔다. 그 남자와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전란의 와중에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두 사람은 우연히 퇴근길 전차 안에서 만나 길고 긴 인연의 끈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남자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백수에다 ‘마마보이’였다.

소설은 박씨 자신이 밟아 왔던 행로와 엇비슷하게 전개된다. 박완서씨가 6·25의 와중에서 오빠를 잃어야 했고, 미군 부대 PX에서 일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데뷔작인 ‘나목’에서부터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 그녀의 상당수 소설들은 그 시절의 궁핍과 고통을 실감나게 그려낸 바 있다. 이 때문에 한 문학평론가는 박씨의 소설을 두고 ‘기억의 서사’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도 1950년대의 삶은 손에 잡힐 듯 실감나게 그려진다. 첫사랑의 열정과 그것이 사그라드는 과정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여자가 무능한 남자 대신 은행원을 선택하면서 끝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안락한 생활을 가져다주지도 않았고, 사랑의 묘미도 없었다. 우연히 그 남자를 다시 만나 함께 밀월 여행을 떠나기로 했으나 남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여자는 “어딘가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열패감에 빠진다. 그 후 남자가 뇌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지만 이미 그는 시력을 잃었고, 그녀는 귀여움을 잃은 채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만 담담하게 포옹을 나누며 결별한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50년대라는 남루한 시절에 “문학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나면 피가 맑아진 느낌이 들곤 했다”며 “문학은 내 마음의 연꽃이었다”고 고백한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그 시절의 ‘그 남자’를 회고하듯이 작가는 척박한 시대에 그녀를 매료시켰던 문학을 추억한다. 그 때문에 첫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작가가 젊은날의 문학에 바치는 헌사처럼 읽힌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애틋하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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