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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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터넷 보수신문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사무실이자 편집국인 한 오피스텔에서 동료 ‘기자’ (그들도 언론이며 기자를 자처한다.) 한명과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그는 김치 쪼가리를 삼키며 자신이 DJ정권에게 얼마나 탄압을 받았는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며칠째 감지 않아 냄새가 나는 머리와 눈꼽이 채 떨어지지 않은 몰골로 라면 국물을 튀겨가며 계속 지껄였다. 과연 그는 정권의 탄압을 받아 오랫동안 수배생활을 한 반정부 인사의 면모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천박한 말들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의 신문이 아직도 광고 탄압을 받아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으나 한 월간지 대표와 같은 ‘뜻있는’ 동지들이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그분들과 함께 얼마 후에 있을 3.1 구국궐기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민주화 이후의 개명천지에 독립군을 자처하고 있었다.   

  

가끔 모자를 쓴 그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억거렸다. 그들은 몇몇 시민단체와 개인들에게 “빨갱이”라고 했다가 소송을 당했고, 결국 법원으로부터 벌금형을 받았다. 한 시간여 그의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다 나오는데, "야 이 또라이 새끼야"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나는 저런 ‘존마니들’이 보수와 우익을 자처하다니, 참으로 추하고 비루하다고 느꼈다. 장정일이 우익청년 일대기를 쓴다고 했을 때 그의 선배는 “우익은 무조건 멋있어야 해”라고 말했단다. 현실의 비루한 우익과 존재하지 않는 멋있는 우익 사이의 이 아득한 ‘거리’. 그래서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익에 대한 위악적인 풍자다. 위악은 장정일의 특기가 아닌가.  


장정일이 10년 만에 냈다는 이 소설을 주말 동안 슬렁슬렁 읽었다. 그는 광주 출신의 ‘금’과 부산 출신의 ‘은’을 내세워 올드라이트, 뉴라이트와 대비되는 ‘퓨어 라이트'(pure light)를 그리겠다고 했다. 이 시대를 달리하는 ‘라이트’들은 동성애 코드로 연결돼 있다. 올드 라이트 ‘거북선생’과 퓨어 라이트 ‘은’은 비역질로 연결된 변태성욕자들이다. 동성애 자체가 변태성욕인 것이 아니라, 도덕을 내세웠던 네오콘 대부 앨런 블룸이 동성애자로 에이즈로 죽었듯이, 그리고 장정일이 그를 두고 “손가락질 받아야할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그의 위선이다”라고 썼듯이, 이념과 섹스의 그 추악한 모순적 병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올드’에서 ‘뉴’, 그리고 ‘퓨어’로 갈수록 변태성욕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덜하다. ‘올드’의 외설성과 변태성욕은 가장 강도가 높다. 실제로도 그들은 막무가내의 가스통 무리가 아니던가.

가령 그것은 “우리가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해 ‘빨갱이’와 같은 인장을 찍어대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논리가 없기 때문이야. 다시 말해 저 인장들은 그들과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들이지.(…) 그래, 그거야.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놈들을 향해 다짜고짜 ‘빨갱이’라는 인장부터 찍고 보는 거야. 그건 상대방과 대화를 더하지 않겠다는 우리들의 고귀한 거절의사고, 결기에 찬 그 침묵은 우리들의 패배이지만, 그 행위는 더 이상 논리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힘이야. 그래서 이기는 거야” 와 같은 변태성욕이다.

거북선생은 국립대 윤리교육과 교수이고 뉴라이트인 ‘은’의 작은 아버지는 법대 교수다. 또 은이 가입한 우익청년단체 ‘자유의 나무’의 회원의 이름은 ‘변지갑’이다. 이쯤 되면 이들이 누구를 빗대고 있는지 알 만하다. (장정일의 장난질이다. 거북선생은 조선일보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윤리교육과 교수를 닮았고, 뉴라이트인 작은 아버지 이름은 ‘상호’로, 가운데 이름자 슬쩍 바꿨다. 변지갑은 굳이 첨언이 필요없다.)  광주의 시민단체 지도자로 있다 노무현 청와대의 비서관으로 등장하는 금의 아버지 역시 여러모로 누군가를 닮아 있다. 물론 대강의 이력과 인상만 빌려왔을 뿐 장정일식으로 비틀었겠지만 말이다. 장정일은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로 은을 꼽으며, 구우익과 뉴라이트의 영향아래 있지만 사상투쟁을 거쳐 자긍심에 찬 젊고 순수한 우익으로 단련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은이 유일하게 앞세대의 우익과 다른 면모가 있다면 그는 최소한 구우익의 ‘위선’을 볼 줄 안다는 점이다. 마태수난곡을 들으며 자신이 빨갱이들한테 어용이니 회색분자니 하며 당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는 거북선생에게 그의 젊은 동성애 파트너 은은 “이 미친 늙은이, 노망도 단단히 났네. 도끼로 정수리를 꽉 찍어버릴까 보다. 이런 늙은이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려는 것일까”라며 속으로 비아냥댄다. 은은 “강한 것은 선하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강자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신념으로 무장한 우익청년. 장정일은 이런 순정한 우익이 이 땅에서 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을까. 이 소설로 보자면 장정일은 희미한 가능태만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태는 변태성욕자이자 ‘또라이’다. 순정한 우익이야말로, 순수한 또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소설은 장정일의 위악이자 우익에 대한 조롱인 것이다.

장정일의 ‘변태성욕’은 참으로 내력이 깊은데, 이 자의 첫 번째 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에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이 소설은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다. 나는 1988년 열음사에서 나온 이 문고판 작품을 알고 있거나 읽어본 사람은 이제껏 두 명 밖에 못 봤다. 흔히 장정일의 첫 소설은 <아담이 눈뜰 때>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이 작품이 시인이었던 장정일이 처음으로 쓴 소설이다. 장정일은 어쩐 일인지 책날개에 소개된 작품목록에 이 작품을 계속 빼놓고 있다.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건가?) 소년원에 처박힌 10대들의 ‘비역질’을 소재로 한, 이 소설도 논픽션도 아닌 것 같은 작품에서 변태성욕은 장정일의 자기모멸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그의 자기모멸은 <아담이 눈뜰 때>의 몇몇 단편을 거쳐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이어진다.

그의 소설을 이제까지 거의 다 읽어왔지만 이제는 이런 변태성욕이 구질구질하고 지겹다. 게다가 장관 청문회식 어법으로 따지자면, 그의 ‘자기표절’도 지겹다. 뒷 소설에서 앞 소설을 인용하고 까대는 방식의 자기표절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빙빙 동심원을 그린다. 그의 전작들은 후작들에서 줄줄이 불려 나와 조롱하고 조롱당한다. <구월의 이틀>에서는 전작인 <보트하우스>를 소환해 작가인 자신을 “3류 작가”라고 폄하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특전사 캠프에 대한 주인공들의 독백조차도 그의 독서에세이 <공부>의 한 대목을 빌렸다. 이런 장난질에 무슨 미학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거기에 토를 달 필요도 없으나, 이제는 좀 짜증이 난다. 내가 꼽는 장정일의 가장 좋은 소설은 <아담이 눈뜰 때>와 장정일 <삼국지>의 출발점이 된 <북경에서 온 편지>다. 아니 차라리 그의 <독서일기>나 <공부>가 장정일 식의 교양과 해석을 담고 있어 더 읽을 만하다.

장정일은 후기에서 부도덕한 우파가 득세한 나라에서는 우익청년 일대기가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문학이 줄창 ‘좌익 청년 일대기’만 쏟아낸 까닭도 그 때문이란다. “건전한 상식과 철학을 갖춘” 나라에서 나온 우익청년 일대기의 대표작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일 것이다. 예술적 방랑이라는 ‘수업시대’를 거쳐 보편적 가치에 대한 긍정에 이르는 여정은, 현실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수락이라는 점에서 ‘우파적 인식’의 획득과정이다.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괴테와 장정일이 공유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과정이자 매개로서의 예술이라는 경로다. 괴테의 빌헬름은 연극이라는 예술을 경유하여 ‘아름다운 영혼’에 눈을 뜨고, 장정일의 ‘은’은 시와 세계문학사 60권을 거친다. 은이 우익으로 전향했을 때, 문학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고 정치에서 문학으로 나아간 ‘금’의 몫이 된다.

괴테가 살았던 바이마르 시대의 문화와 가치는 그같은 긍정과 수락을 가능케 하는 전통과 힘,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전통과 기성의 가치는 부정과 파괴의 대상이었다. 조화와 균형, 감성과 절제와 같은 미덕들은 한국의 우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치다. 앞서 김기협 선생이 조선 망국에서 단절된 것은 ‘전통’이라고 했을 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유교적 교양의 정치가 단절되지 않았더라면(유교의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좀더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오늘날의 보수우익이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과 행위를 조회하고 심문할 수 있는 규제적 원리로서 전통이 있었다면, 적어도 추하고 비루한 모습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전통이 없으므로 그것은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조선일보와 낙성대 연구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승만과 건국을, 박정희와 경제발전을 ‘발명’하고, 새로운 전통으로 수립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감으로 충만하다. 장정일의 위악은 이런 전통의 발명 ‘이후’를 내다본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의 비루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일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탈자는 대략 6-7개 내외가 되는 것 같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노무현의 고향마을을 ‘봉화’마을이라고 쓴 것이다.(245p) 노무현의 고향은 ‘봉하마을’이 맞다. 이것이 편집자의 실수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장정일의 실수라면 치명적이다. 이 소설에서 노무현은 다큐멘터리를 상기시킬 정도로 세밀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실수라? 그렇다면 장정일은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던 것이고, 정교하지 못한 시사교양을 버무려 써낸 것이다. 이건 정운찬과 정운천을 헷갈려 “저번엔 쇠고기 갖고 지랄이더니 이번엔 세종시 갖고 지랄이냐”고 반응하는 멍청한 네티즌과 같은 수준인 것. 이로써 보건대, 장정일의 노무현에 대한 교양수준은 믿을게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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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15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구 영남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음. 90년대 중반 읽었음

이진성 2010-03-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리고 '봉화마을'에 대해 굳이 장정일을 변명하자면
마을 이름은 '봉하'마을 투신한 산은 '봉화'산
마을은 '봉화'산 아래 있다고 해서 '봉하' 마을임

모든사이 2010-03-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그래, 누가 도서관에도 책이 없다던?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장정일 독자가 자기가 밝힌대로 5만은 된다면 그 책을 언급하는 사람이 좀 나올 수 있을 텐데, 거의 없어서 하는 얘기지.

봉하/봉화 얘기를 꺼낸 건, 이 책 앞부분에 장정일이 언어/문장에 대한 자의식을 도드라지게 떠들어서 하는 말이다. 주인공 부모의 말을 전하면서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구사한다" 운운하며 예민하게 써놨길래 하는 소리다. 셜록홈즈를 말하면서 베이커가(baker street) 221B를 베이크가(bake street)이라고 쓰면 얼마나 우스울까.
 
밖에서 본 한국사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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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선생은 사학자로서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공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사학과 대학원을 가서 동양사를 공부해서 대학교수가 됐다. 마흔 무렵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 끝에 잘 나가던 대학교수직을 때려 쳤다. 그는 38살 무렵에 처음 읽은 아버지의 ‘일기’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풀어놓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부친은 6.25 전란의 와중에 유명을 달리한 김성칠 전 서울대 교수. <역사 앞에서>라는 표제로 공간된 그의 일기는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 ‘기록과 관찰’이라는 지적 노동을 성실하고 세밀하게 실천한 전범적 사례다. 김 선생은 그후 중앙일보 객원 논설위원으로 이 신문의 대표적 연재칼럼인 ‘분수대’를 다년간 집필했고, 출판기획자 등을 거쳐 재야(?) 사학자가 됐다. 중국의 고대역법으로 석사학위를, 마테오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블로그(http://orunkim.tistory.com/)에 따르면 프랑스와 일본, 미국, 중국 등에 ‘지적 방랑’을 하며 ‘외부자의 시선’을 기른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김선생의 <밖에서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건, 기존 역사서에 배어있는 ‘분노와 격정’이 싹 가신 문체가 주는 편안함이었다. 간난신고의 한국사를 읽다가/쓰다가 보면 누구나 열정적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던가. 임지현처럼 민족주의를 해체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것을 서너 발자국 떨어져서 요모조모를 살피며 소크라테스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정신적 국외자만이 확보할 수 있는 ‘거리’이리라. 그가 한국사학자가 아니라 동양사학자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 실린 김선생의 많은 글들은 이른바 춘추필법의 준엄한 평가이거나 역사적 교훈을 결론으로 도출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태의 옆에서, 뒤에서 이런 해석과 저런 평가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서술하는 양상이다. 선생이 말한 중층적 시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중정체성의 존재로서 ‘조선족’의 시각을 채택하는 것) 나로서는 그것을 좌충우돌(左衝右突) 전략, 성동격서 전략쯤이라고 말하고 싶다. 민족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목청 높은 언설에는 중국과 일본의 영향과 상호작용을 말하고, 한국사의 위대한 인물을 치켜세울 때는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과 상황을 서술하는 식의 거품빼기 전략 말이다. 


한국사에 대한 서술은 과잉 민족주의거나 뉴라이트 쯤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 같다.(아마추어인 나로서는 ‘같다’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과잉민족주의 언설에 대한 해체적 비판은 엉뚱하게 우파적 역사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가령,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자들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론적 진보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의 귀결은 보수담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윤해동 선생이 어느 글에선가 “포스트주의와 보수의 부적절한 만남”이라고 썼던 것이 어설프게 기억난다. 가장 급진적인 이론적 논리가 보수담론으로 귀결되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봐야할까. <재인식>의 집필에 동원된 상당수의 필자들은 이론적 좌파이자 ‘전향’은커녕 생래적으로도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김선생의 <밖에서 본 한국사>는 이 둘 어딘가의 중간쯤, 혹은 두 담론이 대립되어 있는 지점 바깥의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내게 일정한 ‘계몽’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로 이런 ‘좌’에 부딪치고, ‘우’를 깨는 좌충우돌식 접근이 주는 해체와 재구성의 역사서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최근 김선생이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는 ‘망국 100년’(http://www.pressian.com/의 모티브인 것으로 보인다. 근세사에 대한 서술의 일부는 망국 100년의 초기 글들과 겹쳐 있기도 하다. 그는 조선의 멸망은 1910년의 한일병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에 있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것은 국가라는 실체이거나 민족의 단절이 아니라, ‘전통’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조선의 오랜 ‘화이부동’의 전통, 조선의 문화적 역량의 힘이 훼손되거나 단절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는 내재적 발전의 과정이 일제의 침략으로 가로막혔다는 진술과 다르다. 농본주의 체제를 고수한 조선은 뒤이은 상공업 발전을 효과적으로 견인해내지 못했다. 조공체제의 대외관계는 근대적으로 혁신되지 못했다. 성리학은 소중화를 자처한 채(김선생의 말을 빌면, 차라리 眞중화), 근대적 삶을 해명하고 이끌어내는 사상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일본의 침략은 이러한 단절의 과정을 가속화하고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에는 기억할만한 대목들이 많다. 내 연필은 개개의 사실을 말할 때보다 그의 해석과 평가에 더 많은 밑줄을 그어댔다. 일본과 중국의 근대사를 관심있게 읽어온 처지에서 그중 주목이 갔던 것 중의 하나는 일본에는 존왕이라는 제3의 길이 존재했던 반면, 한국은 쇄국과 개항이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대목. 일본의 근대화는 천황제의 근대적 발명과정이기도 했다. 천황-막부로 이어진 이중권력의 상태에서 일본의 근대는 천황과 막부를 떼어내는 것과 양이에서 문명개화로의 극적인 변화가 어울려 가능했다. 존왕은 봉건제로의 복귀가 아니라 근대적 입헌군주국가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 김기협 선생은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과 일제에의 저항이 국가를 수호하려는 것인지, 왕권을 수호하려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쓰고 있다. 나로서는 그건 왕권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피살에 놀라 피신한 아관파천만 봐도 그렇다. 왕권의 회복=근대화였던 일본과 한국이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중 하나일 것이다. 역시 한국사를 읽는 건 재미보다는 우울함을 배가시키는 경험이다.

기억해야할 서술들(메모 혹은 요약) : 중국의 천하체제는 천자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구조로, 춘추시대에 형성되어 중국의 대외관계의 기본원리가 되었다. 한민족은 ‘화이부동’의 태도로 독자적인 생존을 이어왔으며, 그것의 본령은 군사적 힘이 아닌 문화적 힘이다. 낙랑은 점령군이 아니라 중국문명의 송유관 역할을 했다. 임나일본부설을 가야-왜 복합체로 해석하는 것. 한국과 중국은 고구려의 공동상속자였다. 신라의 당 원조(김춘추) 요청은 통일의 야망이 아니라 생존술 이었고, 통일전쟁의 핵심적 역할도 당나라 군대가 했다는 것. 신라의 진정한 통일은 당나라와의 저강도 전쟁으로 한반도를 민족정체성의 구성공간으로 지키고 만들어낸 것이다. 한민족의 공간은 고려의 천리장성 축조로 반도화되었다.

몽골에 대한 고려의 항복조건은 평등조약에 가까운 것(?)으로 항쟁의 성과라는 것. 공민왕은 비록 좌절했지만 고려중흥을 위한 개혁군주였다. 변방무장(이성계)과 정예문신집단의 접점이 조선의 출발점이었다. 고려말 개혁의 좌절은 개혁주체가 집권 이후 기득권에 집착했기 때문인데, 주체만 달리한 채 개혁을 반복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사대는 춘추시대 이후 천하질서의 원리로서, 사대와 사대주의는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와 같다. 사대는 명나라와의 대외관계 속에서 조선이 만들어낸 존재방식이다. ("임진왜란 때 외에는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사대관계는 지금 남한의 미국에 대한 종속관계보다 독립성이 강한 것이다." p. 180) 일본이 들고 나온 만국공법 체제는 허구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으로, 작고 약한 나라를 보호할 필요를 부정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한국이 독립을 지켜온 것은 화이부동의 문화노선을 견지해온 덕분이며, 이 노선을 안정시킨 것이 세종의 업적이다. 성종 이후의 사화는 성리학적 통치의 주체로서 사림이 자리잡는 과정의 진통이었다. 광해군은 폭정이 아니라 정치투쟁의 와중에 폐위된 것으로 그것은 그의 정치력이 가진 한계다. 청은 입관 후에 합리적 조공관계로서 중-조 관계를 재조정했다. 정조의 서학에 대한 태도 : 정학의 쇠퇴가 가져온 그림자일 뿐, 그림자를 주물러 현실을 바꿀수 없다는 실용주의. 서학은 보유론으로서 중국에 적응하려 했는데, 학문적 실천으로서의 보유론과 신앙적 실천의 두 갈래에서 탄압의 와중에 근본주의로서의 신앙적 실천만이 살아남았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는 조선의 주권을 부정하는 성향을 보였고, 이는 정조의 탕평책에서 세도정치로 넘어가는 전환점의 소용돌이에 서학이 말려든데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독교의 신앙적 순수주의, 이후 한국기독교의 ‘전통’인 보수반공 기독교의 형성과도 연관이 될 듯하다.)

조선은 농본국가체제의 근본틀을 바꾸지 못했고, 임란이후 형성된 상공업 체제 역시 정경유착을 부채질해 체제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했으며, 조선은 이런 과정을 통해 기울어져 갔다. 일본에게는 서세동점의 현실속에서 존왕이라는 제3의 돌파구가 있었으나, 조선은 쇄국과 개항의 이분법에 묶여 있었다. 조선 은 중국의 천하체제에서 벗어난 일단계의 망국을 거쳐, 일본의 지배아래 떨어진 2단계로 마무리됐다. 고종이 수호하려던 것이 재위 40년의 행적으로 볼 때, 국권인지, 왕권이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임정이나 해외에서 정치다운 정치가 나오지 못한 것은 조선이 정치의 전통을 제대로 남겨주지 않은데 큰 이유가 있다. 이승만의 퇴임자리에 있었던 것은 송요찬 국방장관, 허정 외무장관(대통령 유고시 대리인), 그리고 미국 대사 매카너기였다.(최후의 보루인 군부와 미국) 이승만은 무능을 드러내고 미국에게 해고당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여실해 보여주는 세 사건 : 반민특위 탄압, 보도연맹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재벌체제는 권력중독증이 경제계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었다.(독재와 재벌의 쌍생아적 구조) 과거처럼 특권의 주재자가 아닌 두 대통령 아래 남한 상당한 자생력과 안정성을 가진 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는 김대중 - 노무현의 노선에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대목으로, 김선생의 정치적 지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얕은 층위의 가치훼손과 깊은 층위의 가치관 훼손이라는 두 층위가 존재한다. 애국자임을 자부하는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것은 일본의 관점을 내면화한 것들이 많은데, 이는 거울에 비친 오리엔탈리즘이다. 일본의 한국통치의 유산 중의 하나는 “한국인의 눈에는 모든 공무원이 권력자였고, 순사와 군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것.(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심성구조에 자리잡은 불신과 저항의 내력은 이러하다.)

남북관계에서의 변화는 평형상태를 벗어나는 데 있는데, 평형에 집착하는 상호주의로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보수의 상호주의에 대한 이색적이고도 발본적인 비판이다.) “인구의 안정을 설명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을 인간에 대한 태도가 한 차례 정리되는 것으로 나는 본다. 산업화는 자연을 타자로만 보는 공격적인 태도로 출발했다. 이제 더 이상의 공격은 인간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닐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인간과 자연을 묶어서 보는 생태론을 이제 아무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 인구의 평형상태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공격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평형’을 깨는 것은 인간의 삶에 불가피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후보들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4년 후 선거에서는 아마 극우파 후보들만이 그런 공약을 들고 나올 것이다. (이런 예측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예측대로라면, 진보가 요즘 주장하는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성장친화형 진보’는 어떻게 가능할까? 과연 그건 진보일까, 성장일까?) 과거에는 근공원교였지만, 이제는 근교원공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벌거벗은 이기심을 지역차원에서 정제, 순환하지 않고는 세계차원에서 효과적 화합을 바라볼 수 없다.”  “동아시아 지역은 19세기 이전에 위대한 문명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린 후 한 세기 반동안 이 전통의 가치를 잘 살리지 못했다. 유대감도 전통도 별로 요긴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팽창의 시대는 앞만 보고 달릴 뿐, 뒤를 돌아보지 않는 시대였다. .. 균일한 가치의 획득을 위해 만인이 경쟁하는 동이불화의 세계는 자원의 벽앞에 파국을 면할 수 없다. 다양한 가치관이 병행하는 화이부동이 인류의 존속, 인류다운 인류의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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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3-1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무개혁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고종을 근대개명군주로 해석하려고 하던데, 사실 일본의 존황양이파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눈에 뜨이는군요.

모든사이 2010-03-1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종이 과연 근대개명군주이자 망해가는 조선을 일으켜세우려던 근대적 개혁가인지 도대체 모르겠더라구여. 서울대 이태진 교수님이시던가요? 일제에 의한 패망이 주는 비극성과 안타까움의 한 표현이라는 '이해'는 들어도, 대체 동의는 할수 없더라구여. 그게 다 제가 문외한인 탓이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3-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영우와 이태진이 대표적이지요.한영우는 더 보수적입니다.건국60주년 기념사업 때 그런 특징이 더 드러났지요.이태진은 민비나 대원군까지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고종황제 역사청문회>는 고종시대를 둘러싼 논쟁을 담은 책인데 특히 김재호와 이태진의 논전이 볼만합니다.김재호는 전문적인 경제사학자의 시각에서 고종시대의 근대화가 별볼일 없다고 주장하지요.

강준만<한국근대사 산책>에서 고종시대에 대한 각주의 인용문헌에도 읽어볼 만한 책(신문,잡지 포함)이 많이 나오니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모든사이 2010-03-1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한겨레를 보니 김용섭 교수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 사학계의 논쟁이 재연된 모양이더군요. 김재호 교수도 거기 가세한 것 같은데.. 의견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보수성'은 결국 과잉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군요. 강준만의 '한국사 산책' 시리즈는 그 특유의 저널적 글쓰기라고 생각돼 개인적으로 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기회되면 한번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해동의 논문이 촉발했더군요.자본주의 맹아론은 진작 비판대상이지만 윤해동은 김용섭 학설을 직접 분석한 상당분량의 논문이더군요.<역사학의 세기>에 실린 다른 논문도 주목할 만하니 정독하려고 합니다.김재호를 비롯한 낙성대 학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뉴라이트 운동하는 집단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많은데 내재적 발전로-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고 봅니다.

강준만의 산책 시리즈 밑의 참고문헌을 보면 중요한 연구성과는 단행본이나 논문은 물론 정기간행물에 실린 글까지 거의 다 망라되어 있어서 그 책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될 것입니다.

미국사람 2011-08-2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기협이 김성칠 선생의 아들이라는건 오늘 처음 알았네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요 정말....
 

계절이 바뀌는 건 몸으로 체득하는 일이지만, 책을 사고 읽는 일로 깨닫기도 한다. 내게는 <창작과 비평>가 바로 그런 ‘환절기’의 필수 도서목록. 점심 시간에 교보에 가서 사다. 이명박 시대를 ‘3대 위기’로 규정하고 있는 특집이 우선 눈길을 끌고, 20대 ‘아해’들의 좌담과 백낙청 선생의 ‘포용정책2.0을 향하여’도 들춰보게 된다. 김철과 황종연의 문학적 민족주의 비판에 대한 ‘원로’ 김흥규 선생의 글도 눈에 띤다. 연세가 꽤 되셨을 것인데, 자신의 문학연구의 출발점이자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는지, 이론적 반격의 서슬이 꽤나 단단하다. 어서 읽고 리뷰를 쓸 것. <문학과 사회> 봄호에는 한강의 신작 소설에 대한 작가대담이 실려서 교보에 서서 들춰봤는데, '비평가' 강계숙과 '소설가' 한강이라는, 나에게는 두 사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두 사람 모두 예전보다 훌쩍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이준구 교수의 홈피에서 눈에 익은 안병길 박사의 책. 역시 이준구 교수의 서평에 힘입어 사다. 참여정부 초기 임혁백 교수와 정치개혁연구실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참여정부의 지향했던 정치개혁의 방향을 우회적으로 읽어낼 수 있으리라 짐작이 됐다. 첫 머리의 추천사에는 이준구, 임혁백, 정준표 등 무려 세명이나 동원됐다. 저자가 뒷표지의 짤막한 ‘주례사’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 누군가의 평가처럼 내가 ‘도저한 리버럴리스트’라면 ‘자유민주주의’ 라는 언어에 육친적 친화력을 느낄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은 ‘자유민주’를 자처한 자들이 남긴 트라우마일까. 하여간,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알기”라는 부제를 보니 MB 비판을 바닥에 깔고 있을테고, 문득, 참여정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간들은 왜 이리 책 내고 담론을 개발하는 것을 좋아하나.(3월 9일, 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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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6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사이 2010-05-06 20:11   좋아요 0 | URL
방금 전에 리뷰 이메일로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리브로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조제프 푸셰’의 이름을 떠올리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 2007년 대선 무렵일 것이다. 17대 대선이 한나라당의 경선으로 ‘사실상’ 끝이 나고 정권교체가 명백해지던 무렵, 나는 푸셰와 그의 정치적 삶을 떠올렸다. 권력변동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자들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는 베버적 의미의 ‘영혼부재의 관료론’이 언론의 비아냥 속에 오르내리면서 실존적으로 떠올리게 된 질문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책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한길사, 1998)을 찾게 된 내력도 그러하다. 푸셰의 삶을 뒤따라간다는 것은 권력교체기에 불가피하게 ‘정치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어떤 운명들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시골교사에서 급진 자코뱅 당원으로, 다시 왕당파로, 나폴레옹의 최측근으로, 복귀한 루이 18세의 경무대신으로, 실로 현기증 나는 배반과 변신을 보여준 이 정치적 인간의 한 생애는, 5년 주기로 사람 하나 바뀌는 것일 뿐(?)인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정치적 운명’에 대해 던지는 의미가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츠바이크의 푸셰 평전에 손이 가질 않았다. 왜 그랬을까. 200여 년 전에 등장하고 사라진 한 인물의 삶을 읽어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일 것인가. 이게 무슨 자본론도 아니고, 읽기 버거운 요즘의 철학서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서구 인문주의의 적자이자 그 세례를 듬뿍 받은 츠바이크의 저작이라면 책장을 넘기는 재미도 만만치 않을 것인데, 왜 나는 이 책을 선뜻 펼치지 못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당대의 내 삶과 일을 스스로 정당화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류적 지배질서와 오랫동안 섞이지 못했던 개인적 이력도 그렇거니와 지금의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퇴행성에 생래적 거부감을 느끼고 있음에도 이미 스스로 퇴행의 일원이 되어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자기모순. 박권일의 말을 빌어 ‘먹고사니즘’으로 손쉽게 합리화하기에는 내 안의 ‘정치사회적 우울증’이 이미 중증이었다.


Joseph Fouche(1759-1820)
조제프 푸셰는 1759년 5월 30일 프랑스의 낭트에서 선원이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820년 12월 26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죽었다. 그의 60여년 생애는 프랑스 혁명과 그에 뒤이은 국민의회, 자코뱅 독재, 나폴레옹의 출현과 유럽의 전쟁, 나폴레옹의 몰락과 왕정복고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는 “세기 전환기의 한복판에서 모든 당파를 이끌었고, 이 세계 전환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 한 남자”였다. 그의 혁명 동지들인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라마르틴도 죽고, 바라스 탈레랑 등의 재상들도 가고, 나폴레옹마저도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에서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쳤지만, 오직 한 사람, 푸셰만이 “배신자, 음모가, 파충류, 변절자, 비열한 경찰근성, 배덕한”의 정신과 기질로 살아남았다. 


그의 출발은 참으로 미미했다. 창백한 표정의 이 과묵한 사내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를 퀴퀴한 수도원에서 라틴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사제로 보냈다. 프랑스 혁명의 열기가 수도원의 담을 넘어오자 그는 정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수도복을 벗어버리고 ‘거리의 정치가’로 변모했다. 그런 노력으로 32세 때인 1792년 국민의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중앙의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그의 외모를 묘사하는 츠바이크의 필치는 눈에 잡힐 듯 생생하다 ; “거의 망령과 같이 뼈뿐인 말라붙은 육체, 모가 난 가느다란 얼굴, 그것은 흉하고 불쾌했다. 코는 날카롭고 언제나 다물고 있는 입도 날카롭고 좁다. 졸고 있는 듯한 무거운 두 눈은 생선 눈과 같이 차가왔다. 고양이 같은 회색의 동공은 유리알 같았다. 막 질병으로부터 벗어난 회복기의 환자 같다.”  외모로서 보자면, 그는 만화와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든 음모가와 사술(邪術) 전문가의 전형적 유형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푸셰는 대세의 흐름을 주도면밀하게 읽어내는데 능숙했다.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기술이다. 루이 16세에 대한 국민의회의 평결에서 그는 ‘대세’를 따라 국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대열에 줄을 섰다. 이념적 자코뱅이 아니라 처세로서의 자코뱅. 그에게는 “언제나 승리자 편에 있고, 결코 패배자 밑에는 남아 있지 않는 일”이 중요했다. 외적으로는 온건주의였지만 자신이 자코뱅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리옹에 국민의회의 파견의원이 되어 귀족과 왕당파를 처단하고, 교회와 신성을 파괴하는데 앞장선다. 부자의 재산을 박탈하고, 모든 시민은 전시에 애용되는 똑같은 빵을 먹어야 하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강요한다. 심지어는 수백 명의 인간을 모아 놓고 대포로 쏘아 죽이는 제노사이드도 서슴지 않았다. 푸셰가 파견된 이후 몇 주 동안 소도시 리옹에서 1천6백명이 학살된다. 그의 목표는 자신이 자코뱅에 충성하고 있는 혁명의 충실한 주체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츠바이크는 그를 세계 최초의 볼세비키이자 공산주의자, 마르크스보다 1백여년 앞선  ‘공산당 선언’의 기초자로 묘사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학살의 책임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돌연 태도를 바꿔 모든 책임을 함께 부임한 콜로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살아 남는다. 뱀처럼 교활하게.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두 번의 걸쳐 반복된 푸셰 자신의 운명을 건 정치적 대결이다. 그 첫째 상대자는 로베스피에르이고, 두번째는 나폴레옹이다. 물론 두 번 모두 최후의 승자는 푸셰다. 푸셰를 탄핵하는 로베스피에르의 격정적 연설 : “이 세상에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민중에게 가르칠 사명을 누가 그대에게 부여하였는가. 우리들에게 공개하라. 모든 맹목적인 힘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고 때로는 미덕을, 때로는 악덕을 아주 우연히 두들겨 부수고 인간의 영혼은 무덤의 입구에서 소멸하는 연한 입김에 지나지 않는다고 민중에게 믿게 하는 선동에서 그대는 어떠한 이득이 있다고 보는가. 무고한 자들에게서 이성의 왕홀을 탈취해서 악한의 손에 넘겨주는 일을 그대는 어떠한 권리로 감히 행했던가. 그대는 자연의 모습에 수의를 걸어주고, 불행한 자들을 더욱더 절망케 하였다. 범죄자의 죄를 가볍게 해주고, 미덕을 암담하게 하고, 인류를 비천하게 했을 뿐이다. … 자연이 우리들에게 무 이외에 어떠한 아름다운 것도 보낼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을 경멸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범죄자일 따름이다.”(91p) 이 추상같은 연설이 주는 준엄함! 피가 튀고 살점이 난무하는 혁명의 와중에도, 인간의 목숨을 단두대가 선 형장으로 내보내는 무시무사한 탄핵연설에 동원되는 ‘정치담론의 수사학’은 이토록 우아하다.

급진 자코뱅 로베스피에르에게 푸셰는 하잘 것 없는 존재였으나 테르미도르 반동을 거치면서 죽은 것은 오히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충실한 심복 생쥐스트였다. 로베스피에르의 격정적 단죄에도 불구하고, 푸셰는 온갖 음모와 술수로 로베스피에르의 친위대이자 혁명의 사령부인 ‘자코뱅 클럽’의 영수로 선출된다. (로베스피에르의 분노에 찬 토로, “푸셰, 네놈이 감히!”) 그 뒤 ‘청교도적 공화파’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짓눌려 있던 국민의회 온건파의 반란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이게 테르미도르(프랑스 혁명력 제11월, 7월19일 ~ 8월 18일, 프랑스 혁명력은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 같은데서 다시 쓰여지고 있는데, 이 희한한 달력의 울림은, 프랑스어를 잘 모르는 나에게조차도 시적으로 느껴진다.) 9일에 벌어진 인류사적인 반동이다. 후일의 역사는 로베스피에르를 굵은 고딕체로 기록하지만, 현실의 역사에서 주인공은 그가 아닌 푸셰다.

역사에서 간주곡은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승승장구할 것 같던 푸셰는 리옹의 학살 책임이 뒤늦게 문제되어 회색의 망명객으로, 화려한 국민의회 의원에서 가난한 평민으로 전락한다. 가난한 시골의 다락방에 살며 ‘돼지먹이’ 일로 겨우겨우 살아가던 푸셰는 당시의 권력자 바라스의 ‘밀정’이 되어 남이 하는 말을 엿듣고, 뒤를 캐는 일로 그의 신임을 얻는다. 그의 기질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이 스파이 짓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의 특기와 장점을 살리게 된다. 그 ‘실력’으로 당대의 권력자 바라스의 눈에 들어 하루아침에 맨 밑바닥에서 5인 집정내각하의 프랑스 공화국 경무대신으로 등극한다. 한국사회로 치자면 ‘경찰총장’이 된 그는 과거 자신에게 해꼬지를 한 자코뱅파를 처단하고, 해고하고, 감옥에 가두는 일에 혈안이 된다. 여기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 그를 바깥세상으로 끌어내어 출세를 시킨 바라스 역시 후일 푸셰에 의해 ‘추방’된다는 것. 츠바이크에 의하면 이는 “배은망덕에 대한 세계사적 교훈”을 실천한 것이다.

초라한 포병장교에서 쿠데타를 통해 일약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은 푸셰의 과거와 음모가적 기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완전히 몰락시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주지도 않는 방식으로 푸셰의 목줄을 쥐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경무대신직에서 면직되고, 한직인 원로원 의원이 되어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지만, 대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데 그건 바로 ‘돈’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사업수완으로 백만장자가 된다. 하지만 돈보다 더 달콤한 것은 권력이었다. 말하자면 권력중독자인 푸셰에게 돈의 세계보다 더 달콤한 것은 권력이었다 : “권력은 메두사의 눈을 갖고 있다. 한번 그 놈의 얼굴을 본 자는 그 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고, 언제까지나 정신이 홀려 사로잡혀 있게 된다. 한번 지배하고 명령하는 도취감을 맞본 사람은 결코 그 도취감을 단념할 수 없다. 세계 역사를 훑어보면 권력을 자진해서 단념한 실례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181p)

종신집정관에서 황제를 꿈꾸던 나폴레옹과 다시 권력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푸셰의 욕망은 맞아 떨어졌다. “카이사르가 되려는 자는 안토니우스와 같은 자를 필요로 하는 법”. 푸셰는 나폴레옹에 의해 경무대신으로 다시 복귀한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 둘 사이의 스파이질과 반대 스파이질은 교활해지고 추악해진다. 나폴레옹은 푸셰를 믿지 못하면서도 그에게 ‘오트란트 공작’이라는 작위를 수여한다. 이 공작가문의 문장은 황금의 기둥 둘레를 뱀이 휘감고 있는 모습, 나폴레옹의 재치가 빛나는 대목이다. 푸셰가 나폴레옹과 싸워 이기는 순간은 푸셰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초기 프랑스를 구한 영웅에서 ‘황제가 된 이후’ 나폴레옹이 숙명처럼 안고 있던 전쟁광 기질이 빚은 참극이기도 하다. 엘바섬에 유배됐다 탈출한 나폴레옹에 의해 세 번째로 경무대신에 임명된 푸셰는 영국과 메테르니히 등 적대국가들과 은밀하게 거래를 벌였고, 결국 100일 천하를 이끌다 워털루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에게 결정적 타격을 안긴다. 재기를 꿈꿨던 나폴레옹은 루이18세를 옹립하여 왕정을 복고하려는 푸셰의 계획에 따라 서서히 침몰하다가 결국 반동의 물결에 의해 처단된 것. 최종 승자는 역시 푸셰였던 것. 그는 왕정복고를 위한 준비기간 동안에는 5인의 집정내각중 두명을 매수하여 5일동안 프랑스의 절대군주가 되기도 했다. 가난한 시골교사에서 경무대신, 오트란트 공작, 임시정부 의장으로 최고권력까지. 세인트헬레나의 나폴레옹은 이렇게 외친다 : “나는 오직 한 사람, 참으로 완전무결한 배반자를 알았다. 그 사람은 푸셰다.”

츠바이크의 탁월한 점은 한 인물이 가진 복잡다단한 성격과 기질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복원하면서도 역사의 우연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적절히 통찰하고 배합할 줄 안다는 점이다. 푸셰의 몰락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된다. 모든 사람들이 푸셰의 추악한 과거를 잊거나 잊으려 했지만, 단 한사람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의 딸 앙굴렘 공작부인. 그녀는 푸셰가 자기 아버지 루이 16세에게 사형을 외쳤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으며, 푸셰를 포함한 자코뱅들이 어머니와 부모의 친척, 친구들에게 한 짓을 아주 끔찍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 다시 재개된 왕정에서 루이 18세는 앙굴렘 공작부인이 가진 푸셰에 대한 미움을 핑계로 그를 외국으로 추방해 버린다. 이제 절대권력자에서 몰락한 푸셰는 한 때 친한 사이였던 유럽의 모든 실력자들에게 거부당하고, 오스트리아의 시골과 프라하를 거쳐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죽었다.

츠바이크는 푸셰가 마지막이자 최초로 범한 우매한 짓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말한다. 그게 몰락의 시작이었던 것. 다시 말해, “배반해야할 주군도 없는 푸셰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배반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배신과 배신의 배신, 배신의 배신의 배신으로 점철된 생애가 결국 마지막에 배신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츠바이크가 말하는 ‘정치적 인간’의 가장 깊은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정치적 삶의 숙명이 살아 움직이는 권력의 생리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것이라면 ‘배반’은 불가피하다. 영속적인 권력이란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 배반의 귀착지는 결국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온 자신의 역사에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인간에게 ‘자기 성찰의 회로’가 존재한다면 그는 더 이상 정치적 인간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성찰은 반성을 부르고, 반성은 정치적 생존과 비약을 위한 선택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을 반복하는 회의주의자는 정치적 성공을 하기 어려운 법이다. 물론 이는 정치의 영역을 좁은 의미의 정치사회, 적어도 권력자와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국한했을 경우다.

성찰의 결여와 더불어 푸셰가 진짜배기 ‘정치적 인간’이라는 점은 그가 가진 모든 음모의 기록, 공개되면 피바람이 불 모든 문서들과 편지들을 불태웠다는 점이다. “그토록 완고하게 과묵했던 사람은 무덤속에서조차 진실을 누설하지 않았다.” 행복한 망각을 선택함으로써 후대의 재평가를 통해 역사적으로 ‘재기’ 할 기회를 노렸던 것일까. 츠바이크는 “정치적 인간의 유형학”을 수립하려 했다지만, 이것은 유형학이라기보다 차라리 정치적 인간의 ‘생태학’이거나 ‘인류학’에 가깝다. 그것이 생태학이자 인류학인 까닭은 정치적 인간의 속성은 규모와 크기를 달리하여 지금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배반’은 ‘변화의 수용’으로, ‘역사적 퇴행’은 ‘시대정신’으로, ‘존재에 대한 성찰’은 ‘(불가피한) 숙명에의 너그러운 수락’으로 치부되는 수사학만이 조금씩 달리 구사될 뿐. 그러니, 어찌 푸셰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2007년 말,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의 제목은 “우리는 모두 조제프 푸셰의 후예다”라는 것이었다. 
 

* ps.  정치적 ‘거물’들의 세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간들의 생존법을 일러주는 한 에피소드 :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기) 당시는 시간이 전부였다. 다른 사람들이 규탄하고 있는 동안에 조용히 있기만 하면 사람들은 묵인할 것이다. 공포정치 수년동안 줄곧 의회에 앉아 있으면서도 한번도 입을 열지 않다가 후일에 그 전체 기간중 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살고 있었습니다”라고 천재적인 대답을 한 시에예스의 그 유명한 처방대로 마치 많은 동물들이 떼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음을 가장하듯이 푸셰는 죽은체 하고 있었다.”
 - 이게 많은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쓸모있는 지혜일 것이다. 근데, 이 재밌는 책이 왜 품절일까. 변절의 시대에 매우 유용한 참고서이자 교과서인 이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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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순례는 세가지 욕망에서 비롯한다. 그 첫째는 ‘의외의 발견’에 대한 기대다. 사고 싶었으나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을 발견한다거나 오래 전에 나온 책 가운데 이런 책도 있었네 하는 경우다. 이미 품절된 지 오래고 다시 나올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이는 아도르노의 <신음악의 철학>(까치) 같은 경우가 전자일 것이고, 60년대 졸부들의 거실을 채웠던 전집류 중의 하나인 <세계의 대사상> 시리즈에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제4인터내셔널의 이론가였던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 평전>을 발견하는 경우가 후자다. 반공주의가 극성이던 시대에 극좌라 할 수 있는 도이처의 책이 소개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빨갱이 저자의 책이 나올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스탈린 비판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핑계로 서슬퍼런 ‘간윤’의 ‘필증’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데, 물론 여기에는 지금도 그렇듯이 공안담당자들의 무식함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진보당의 조봉암이 사법살인을 당하던 시대에 전집에 이런 책을 슬쩍 끼워 넣을 줄 안, “심장이 왼쪽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편집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돈이 없어 포기했던 책을 싸게 대량구매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경우 카드를 남발하게 되고, 책에 대한 어떤 예의도 없이 그저 노끈으로 책을 묶어 사들고 오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워낙 많은 책을 샀으므로 살 때의 욕망과 달리 읽기도 거의 포기하거나 한두권에 그친다. 이런 책 사재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리즈 같은 것들에 ‘삘’이 꽂힐 때 감행된다. 처음으로 헌책방에서 대량 사재기를 한 것은 1980년대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온 <구술 민중자서전> 20여권을 샀을 때다. 서울역 주변의 헌책방에서 샀다. 내가 만난 우리나라 최고의 '읽기 매니어'와 함께였다. 평범한 민중을 불러내어 지역의 토박이 언어로 살아온 내력을 구술케 한 이 시리즈는 90년대 이후 널리 확산된 ‘구술사적 역사방법론'의 선구적 사례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세 번째는 초판본이나 고서와 같은 오래된 책에 대한 욕망이다. 한문해득에 능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고서’의 진가를 알아볼 리도 만무하고, 더구나 그같은 책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내가 감히 꿈도 못꿀 터이니, 겨우 살 수 있었던 책의 연대기는 60년대 어름까지가 한계다. 인사동 고서점인 통문관을 그닥 좋아하지 않은 까닭도 그것이다. 이런 서점은 일반인 헌책방 순례객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에 출간된, 그만큼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는 책을 구경만 하다 입맛만 다시며 발길을 돌려야 했던 기억은 조금 씁쓸하다. 창비의 편집위원인 최원식 선생이 한 평론에서 1948년에 나온 레닌의 <제국주의론> 번역서를 인용한 것을 읽었을 때, 그 시절 그 책을 번역한 한국의 볼세비키 추종자의 열정을 생각했었다. 왜 나는 비평을 보면서도 각주에 인용된 책의 ‘연대’에 눈길이 가는 것일까. 이런 스노비즘도 병이라면 병이다.

바로 그 세 번째 경우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리고 조금은 후회되는 기억이 있다. 1990년 여름, 전주의 구시가지를 산책하다 그 주변에 즐비했던 헌책방을 들어갔을 때, 일제 시대 나온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책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제목에 마르크스라는 일본어가 박혀 있고, 출간일이 쇼오와(昭和) 00년 식으로 찍힌 이 책들에는 세월에 바랜 만년필 메모나 밑줄도 있었다. 낡은 나무 책장 서너 칸 쯤을 차지하고 있던 이 책들을 보면서 이게 동경에 유학했던 호남의 ‘마르크스 뽀이’들이 탐독했던 책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염상진이 ‘동무’들과 읽었음직한 책들, ‘소년 빨치산’이었던 박현채 선생이 유년기에 읽었음직한 책들 말이다. 그들은 이런 책들을 독파한 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거나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을 터였다. 대구가 좌파들이 득시글대는 ‘동방의 모스크바’였다지만, 전주니 광주도 그에 못지 않은 좌파 지식인들의 집단서식지였으니 이런 짐작이 틀리지는 않았으리라. 일어를 못해 비록 읽지는 못할 지라도 한 두권쯤 살 수 있었을 텐데, 가난한 대학생이니 책장만 쓸어본 채 나오고 말았다. 때로 책은 내용보다 '아우라'로 감동을 전달하기도 하는 것이다. 몇 년 후에 다시 전주를 방문했을 때 그 많던 헌책방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고, 당연히 이 책들도 폐지수집상의 수레로 쓸려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제법 큰 돈을 주고 샀던 '오래된 책'은 고 임종국 선생이 편집한 <이상전집>(1956, 고대출판부) 초판본이었다. 이상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아마 이 전집의 공로가 크다고 할 것이다. 하드커버라기엔 너무 소프트한 표지, 낡은 갱지에 인쇄된 본문, 지금의 북한식처럼 보이는 명조체 활자, 세로 조판의 두권 짜리 전집의 가격은 15만원. 그 후 이어령의 전집(1977-1978, 갑인출판사), 김윤식․이승훈의 문학사상사판 전집(1989-1993), 가장 최근에는 김주현의 전집(2009)이 나왔으나 모두 출발은 임종국의 이 전집일 것이다. (임종국 선생의 이상연구와 친일문학연구 사이, 곧 모더니즘과 민족주의(혹은 실증주의)의 간극과 길항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임종국 선생의 이 <이상전집>은 한 지인이 서대문에 ‘어제의 책’이라는 헌책방을 열었을 때 3만원을 받고 팔아버렸다. 젊은 나이에 책이 좋아 헌책방을 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돋보였고, 사라져 없어진 서점 ‘오늘의 책’의 역사를 잇겠다는 옥호(屋號)에 감명받은 바 있어 “헌책방이라면 이런 정도 책 한 두권은 구비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미련없이 판 것이다. 내게는 문학사상사판 전집도 있으니 판본비교 같은 쓸모없는 짓을 하지 않을 바에야 기부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책을 산 어느 호사가에게 복이 있을 진저.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역에서 남영역으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는 헌책방이 가로로 죽 늘어서 있었다. 대개의 책들은 참고서거나 허접한 삼류 소설들이었으나 그 사이에 가끔 보물이 끼어 있었다. 또한, 이광수, 김동인 류의 근대소설가들의 초간본 책들도 안전한 카운터 뒷자리에 꽂혀 있었다. 이광수의 <무정> 초간본이라든가(초간본이긴 해도 표지는 심하게 닳았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같은 책들. 대개의 책들이 당시 가격으로 10만원이 넘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책들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 금액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윌리엄 모리스가 만든 초서의 책 

 

책의 ‘내구성’을 구성하는 한 측면이 내용의 지속가능성이라면, 다른 측면은 물리적인 것으로서  제책의 견고함일 것이다. 분명 전후 미국원조를 통해 들어왔을 질나쁜 종이에 인쇄된 50~60년대의 책은 그런 측면의 내구성이 무척이나 허약하다. 식민지 시대에 나온 근대간행물들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다. 한지로 만들어진 옛책의 견고함과 내구성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전후에 나온 책들을 보면 마구잡이로 지어진 판잣집 같다는 인상이다. 여태까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산책 중 60-70년대 책 중에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면서도 장정이나 제책 면에서 점수를 줄만한 것은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전후문제작품집>(1964) 시리즈다..(미국의 비트세대 소설가들이나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같은 소설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아마 이 전집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에 책의 명장 윌리엄 모리스가 없다는 것은, 아니 명장이전에 한지로 만들어진 옛책이 충분히 ‘근대화’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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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 임종국 이상전집 나한테 한 권 기증한 거 기억 안 나우?
근데 나한테 준 건 또 어디서 구한 거유?

이진성 2010-03-0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헌책방에서 고른 책중에 내가 점수를 준다면 정음사판 셰익스피어전집!
번역도 장정도 최고!
게다가 가격까지. 헤이리 헌책방에서 권당 500원에 샀다면 믿겠수?

모든사이 2010-03-0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한권을 따로 구했던 거 같다. 내가 여기서 언급한 건 묶음으로 산 온전한 전집 한질이라..ㅎㅎ 정음사판 세익스피어 전집은 아직도 여기저기 많아. 근데 그건 사고 싶지도 않고 읽고 싶지도 않아.

미국사람 2011-08-2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책방 순례에 미친 양반이 또 있군요.

근데 그 책을 어디에다 쌓아두지요....
한20년 모으면 집이 좁아져서....
마누라 등쌀에 견디기 힘들게 되지요...

어쨌건 동업자를 만난 것같아 흐믓합니다. 다만 저와은 독서 취향이 달라 이 블로그에서는 건질 것이 별로 없군요. 하지만 건질 것이 있는지 천천히 다시 보아야 할 것 같군요. 꾸뻑

모든사이 2011-08-2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할때마다 한 짐씩 정리하지요.ㅋㅋ 재작년 이사때는 책장 두개 분량의 책을 후배에게 '분양'해 주었지요. 아, 그리고 우리나라 만화방에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중 책장이라고 있습니다. 책장이 앞에 하나 있고, 바로 뒤에 책장이 하나 더 있는...말하자면 좁은 공간에 책을 두기가 아주 좋습니다. 앞쪽 책장에 바퀴가 달려서 이리저리 밀수도 있고.. 고걸로 그나마 조금 해결하고 있지요.. 마누라 등쌀은 애진작에 흘려버리고 있고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