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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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사다 지로를 읽는 건 마치 히로카네 겐지의 만화거나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같은 만화를 보는 느낌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작고 사소한 일들을 소박한 휴머니즘으로 덧칠해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재주. 아마도 일본식의 휴머니즘일 듯한데, 여기에는 회사인간으로 살아가는 일본인의 내면에절절한 인간적 욕망과 화해를 향한 열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백화점의 여성복과장이었던 한 성실한 회사원이 죽은 뒤 7일 동안 ‘이승’에 내려와 자신의 가족과 주변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이야기. 여기에 인간적인 야쿠자였던 한 사내의 삶이 겹쳐지고, 야쿠자의 아이로 태어나 보육원에 맡겨졌던 한 아이의 스토리가 거기 또 엮어져 있다. 목숨의 이쪽과 저쪽 세계가 연결돼 있고, 휴대폰으로 연결되며, 공적 서비스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등장한다는 식의 상상력이 발랄하다.

아사다 지로의 다른 소설들이 그렇듯이 아무런 부담 없이 술술 잘 읽히고, 재미도 쏠쏠하다. 주말 동안 서울과 부산을 KTX로 왕복하며 읽었다. 그러나, 아사다 지로 소설의 본령은 역시 단편에 있다는 생각. 가장 뛰어난 단편집인 <철도원>이 그렇고, <장미도둑>이나 <사고루 기담> 같은 단편집도 심금을 울리는 진진한 작품들이 담겨 있다. <지하철>이나 <천국까지 1000마일>, <칼에 지다>같은 장편은 단편이 주는 재미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인상이다. 돌이켜보니, <프리즌 호텔> 정도를 제외하면 꾸역꾸역 이 사람의 소설을 거의 다 읽어온 셈인데,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곱씹어 읽는다기보다 마치 휴일에 배 깔고 누워 만화를 보는 경험과 비슷했다. 가끔 웃기도 하고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여전히 ‘감성적’이었다.


아사다 지로가 보여주는 일본적 감성에 대해서는 일종의 ‘버텨읽기’가 필요한 대목도 있다. 그의 소설이 가진 인간적 축축함은 감동스러운 바가 있지만, 어느 순간 이성적 합리를 훌쩍 뛰어넘어 휴머니즘을 강요하는 듯한 진한 감성은 뭔가 찜찜하고 불편하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들은 저마다 상처를 안고 있으며 자신의 과거로 인해 현재의 삶이 불행하거나 문제가 되고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순간 현실 혹은 인간적 관계에 대한 전면적 긍정과 화해의 길로 접어든다. 자신을 잘 보살펴준 보스를 위해서라면 눈물을 머금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자들의 순백의 내면. 2차 대전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일본인들의 고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많은 텍스트들이 그러하듯이, 전쟁의 비극과 인간적 고통은 절절하지만 정작 전쟁의 책임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물음은 실종된 상황과 유사하다.

성실한 백화점 맨으로 평생을 살다 죽은 주인공 쓰바키야마 과장은 이승으로 건너가 자신의 아내와 오랫동안 불륜 관계에 있던 부하직원을 만나지만 정작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신이 일하던 백화점의 바겐세일의 매출액이 얼마냐 하는 것이다. 사후 7일간의 허락을 얻어 이승으로 자신을 버린 야쿠자 부모를 찾아간 아이는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오직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저 세상으로 간다.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건, 자기 아들이 불륜사이에 낳은 아들임을 알건 모르건, ‘회사’일에 충실한 가장. 옳든 그르든 오야붕을 잊지 못하고 그를 위해 사후에도 충성을 다하는 야쿠자 ‘고붕’들. 한 남자를 사랑하고 20년동안 섹스파트너로 지냈으면서도 사랑을 숨긴 채로 결혼을 축하해주는 여자. 이들은 직업적 성실성으로 충만해 있고, 조직의 위계구조, 보스, 연인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은 절대적이다.

이같은 주인공들의 스토리가 주는 감동은 있으나 이런 멘털리티가 ‘무책임의 체계’를 가능케 한 일본적 정신구조는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다소 과장해서 이해하자면 사람은 저마다 인간적 진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이자 다른 모든 것들을 일거에 무화시킬 수 있다는 전언. 이 전면적 ‘인간주의’의 숨겨진 구석에는 파시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 헨리의 단편집과 비슷비슷한 느낌들인데, 그와는 달리 한구석에 불편함이 느껴지는 이유도 이런 의문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이고, 재미있으면 그로서 평균 이상은 되는 것이니, 이 따위 혐의가 무에 대수랴.  내 우중충한 시간을 종종 구원해줬던, 이 전직 야쿠자 출신 소설가에게 복이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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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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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회고체를 부른다. 나 역시 한때 르뽀의 세계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80년대 초중반 5공정권의 폭압이 극성에 달하던 시절, 일련의 무크지를 중심으로 르뽀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전설이 된 <마당>이니 <뿌리깊은 나무>니 하는 잡지들이 앞다투어 르뽀를 실었고, ‘르뽀시대’니 하는 동인들도 생겨났다. 8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한 내가 더 흥미를 느낀 것은 전시대의 그늘진 유산들이었다. 그런 책들을 통해 읽은 김현장의 ‘무등산 타잔’ 같은 소설같은 이야기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극우가 돼 버린 조갑제의 <유고>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같은 뛰어난 르뽀집들, 그리고 황지우의 반짝반짝 하는 재기발랄한 현장 르뽀르타쥬.

창비와 문지가 강제폐간된 당시에 르뽀를 통한 ‘게릴라 전술’은 일종의 ‘숨구멍’이기도 했던 듯 하다. 무크지 아니면 단행본을 통한 당대 지배질서에 대한 대항 기동전. 단행본으로 나온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나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같은 노동자의 현장 수기도 그에 못지않은 감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어느 헌책방 구석에 쌓여 있을 70~80년대의 목소리들은 ‘귀족노조’가 등장하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생생한 감동이다. 하지만 이제 누가 이 70년대의 노동자의 현실을 기꺼워하면서 읽을 것인가. (이 시기를 다룬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70년대편>이 제법 팔리는 것을 보면 당연히 지금은 ‘역사화’되어 가는 것 같다. 강준만의 ‘짜깁기로서의 역사’도 이런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대학 초년 시절, 어느 우파 교수가 사회과학적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박한 휴머니즘’이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정치경제학 이전에 <전태일 평전>이 있었고, <자본론>이전에 멘체스터 방직공장을 나오는 어린 노동자를 연민으로 쳐다보던 맑스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르뽀의 재미와 감동으로 따지자면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만한 것이 있으랴. 그 책을 읽으면서 잠시 마오주의자가 되어 중국 사회주의의 거대한 뿌리를 슬쩍 만져본 것 같은 경험이 아직도 쟁쟁하다.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간>, 조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 역시 선명하다. <카탈루니아 찬가>는 아마 고종석이 당시 한겨레신문에 소개한 <스페인 내전>(형성사) 때문에 읽었을 것인데, 반파시즘 국제연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감격스런 깃발 아래서 벌어지는 사상투쟁과 내부분열이 참담했다. 후일담 문학이 지배하던 당시의 지리멸렬한 풍경 속에서 이런 르뽀에 코박고 ‘소설 같은 현실’에 몰입했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이런 옛 기억을 불러냈다. 한겨레에서 이 책의 소개를 봤을 때 나는 이것이 황석영이 썼던 ‘사북사태’ 르뽀와 비슷한 것이리라 지레 짐작했다. 궁핍과 비참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인간적 연대감과 근육과 땀으로 삶을 일구는 자들에 대한 동경.(이것이 극단적으로 미학화되면 김훈의 문장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위건 부두’는 없었다. 이 지명에서 한창 시절 마론 브란도가 연기했던 ‘워터 프론트’에서와 같은 부두 노동자의 삶을 기대할 건 없다. 영국 북부 탄광지대 노동자의 빈곤한 삶과 곤궁이 적나라하게 나올 뿐이다. 더구나 1부를 제외한 2부는 1930년대 유럽에 유령처럼 출현한 파시즘과 그것에 사회주의가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를 설파한 ‘정치평론’이다.

‘제국의 영광’을 찾아볼 길 없는 1930년대, 조지 오웰은 극도의 궁핍과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노동계급’의 삶을 찾아 나선다. 르뽀라기 보다 한 사회학자의 현장 보고서 같은 날카로운 분석과 관찰력이 빛난다. 노동계급의 삶과 주거, 가족의 면모를 묘사하는 그의 필치는 그닥 심금을 울리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노동계급에 대한 오웰의 시선, 영국 사회에서 계급문화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더 눈길이 간다. ‘h' 발음을 하지 못하는 자(하층 노동계급)과 할 수 있는 자(상류층)로 구분하는 섬세한 문화적 계급구분법. 
 
오웰이 전하는 전형적인 노동계급 가정의 풍경은 정겹고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 “겨울날 저녁에 차를 마시고 난뒤, 조리용 난로에서는 불꽃이 춤을 추고, 난로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셔츠 차림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경마 결승전 소식을 읽고, 어머니는 다른 한쪽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은 1페니 주고 산 박하사탕 때문에 행복해하고, 개는 카펫에 드러누워 불을 쬐는 정경을 볼 수 있는 집은 정말 가볼만한 곳이다.” 영국 노동계급은 우리처럼 경제적 계급 상승을 위해 애면글면 하지 않는 모양이다. 뚜렷이 구분되는 문화적 계급구분 속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방식의 경직된 사회적 이동성은 ‘계급정치’가 가능한 토대이리라.  


나로서는 이 책의 2부가 더 흥미로웠다. 역자가 붙인 소제목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은 글쎄, 그렇게 타당한 제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노동계급 앞에서 ‘이데올로기’니 ‘동지’니 하는, 우리로 치면 ‘운동권 용어’를 남발해대는 ‘사회주의자’를 비판하는 대신, 사회주의적 가치의 필요성과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사회적인 상식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본론>의 이론을 구현한 세계인 것도 아니고, 볼셰비키의 집단주의도 아닌 “정의와 자유”의 세계다. “모든 억압자는 언제나 그르며, 모든 피억압자는 언제나 옳다”라는 인식 아래,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의와 자유”를 외치는 것이다. 193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이 유럽의 절반을 장악한 지금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오웰의 사회주의는 ‘정의와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소박(?)하다. 이 책 후반부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한 오웰의 위기의식이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아마도 반파시즘의 현실적 이념이자 실천적 운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상당분량을 할애해 그같은 사회주의로 갱신하지 못하는 당대의 “사회주의자들”과 “귀족적 사회주의자들”(여기엔 버나드 쇼나 시드니 웹, 웰즈같은 사람도 포함된다.)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이 책이 당대의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아마도 오웰이 제안하는 사회주의의 재구성이 한국의 진보세력 반성과 성찰에 일정한 통찰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량한복으로 상징되는 시민운동가들, 두루마기가 보여주는 후진적인 미적 감수성, 별나고 이상한 사람들로 비치는 운동권들 등. “연합해야할 사람들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라는 통찰도 그렇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 : “여기서 우리는 서구 계급 차별 문제의 진짜 비밀과 맞닥뜨린다. 그것이 부르주아로 자란 유럽인은 자칭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몹시 애쓰지 않는한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요즘에는 차마 발설하지 못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꽤 자유롭게 쓰곤 하던 섬뜩한 말 한마디로 요약된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냄새’는 이성적, 경제적 계급 구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전면적이고, 넘어설 수 없는 깊은 차별의 강이다. 어설픈 사회주의자, 강단 좌파, ‘학출’ 여부를 폭로하는 기제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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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월호의 ‘진보좌파의 길’이라는 특집을 읽다가 잠시 상념에 젖다. 한 인터넷 논객은 해방이후 좌파의 궤적을 예의 그 ‘싸가지 없는 문체’로 이 잡지 한 면에 요약하더니, “자본주의 시민의 욕망과 자본주의를 벗어나려는 좌파의 욕망이 대화하고 섞이는 곳”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 ‘진보좌파의 길’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하나마나한 얘기다. 이게 이제는 퇴색하다못해 너덜너덜해진 주사파의 ‘대중노선’과 실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나는 모르겠다. 욕망이라는 담론의 수사학이 덧붙여졌을 뿐, 그것은 “오래된 농담”이다. 앤더슨이 서구 좌파가 실천의 부재로 망했다더니, 한국 좌파의 실천은 여전히 앙상하다. 그 실천은 불가피하게 우원하고 더딘 대로 정책적 사고(이미지를 거부하는 좌파가 정책 말고 뭐가 있겠나)일 수밖에 없을 진대, 그럴 듯한 정책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능한 좌파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이 점에서 이 친구가 민노당 학출들의 ‘경력부재’를 말하는 대목은 전적으로 옳다. 그 경력은 국가를, 사회를, 조직을 제대로 움직여보고 운영해본 자들이 갖는 경험적, 암묵적 지식과 지혜일 것이다. 선험적 담론이나 이론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갈고 다듬어진 실천적 정책대안 말이다. 언젠가 진보정당의 후배에게 정말로 좌파가 집권하기를 바란다면, 10년 프로젝트로 100명 유학을 보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브라질에서 가서 룰라를 배워오든지, 공교육 정상화 떠들지 말고 핀란드에 가서 교육정책을 배워오든지, 독일에 가서 사회적 시장경제를 배워오든지. 레디앙 같은 좌파 인터넷 매체의 기사에 달린 그악스럽고 모진 소위 “좌파들의 댓글 비판”을 보면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어떻게 저렇게 심하게 상대를 몰아부칠까, 저런 심성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집권하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까. (이점, 결코 대칭적이라 말할 수 없으나 수구꼴통들의 댓글에 스민 멘탈리티도 마찬가지다. MB시대, 우리는 그걸 이미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또다른 글에서 전 민노총 위원장인 이갑용은 노무현, 김대중 시절의 노동운동가들이 어떻게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이들 ‘우파 정권’에 투항했는지를 냉소적으로, 암울하게 들려준다. 그랬을 것이다. 가령 노동운동가였다가 한미FTA 국내대책본부장을 맡았던, 이제는 현역 의원인 홍모씨의 경우 같은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의 비판에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소박하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전직 노동운동가들이 김문수, 이재오, 권용목 보다는 낫지 않나 라는 반감도 있다. 이들에게는 적어도 “쪽팔려할 줄 아는 양심” 정도는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갑용에게 찾아와 노무현 시대의 노동정책이, 비정규정책이 잘못됐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철학과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최원은(이 사람이 대학시절 ‘프롤레타리아 시’를 쓰던 그였던가?) 영호남 지역주의와 서울 지역주의에 대한 돌파를 주문한다. 적어도 계급적 구분선 못지 않게 지역적 구분선을 ‘현실’로서 포용한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한발은 더 나아간 듯 하다. 하지만, 현재의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 아니 그 이전에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에 대해서, 민노당이, 진보신당이 무슨 말을 했던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 내부에서는 그게 이슈화할 정치담론이라고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원이 주문하는 ‘정치적 리얼리즘’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앞으로도 당분간, 요원할 것이다. 참, 허망하고 안쓰럽다. 그 허망함은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린 민노당 ‘불법 후원금’(이라 경찰이 우기는)에 관한 기사가 전하는 권영길과 천영세에게 전달된 금액이 “10만원, 15만원”이라는 “팩트”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10만원, 15만원 때문에 ‘당’의 이미지와 대중적 공신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현실이라니.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좌파란, 스스로 지식인이고자 하는 자들의 ‘페이퍼 담론’이다. 여기서 지식인은 고전적 의미의 지식인이라기보다 ‘좌파담론의 소비자’를 말한다. 그건 애거서 크리스티 팬클럽이나 짐모리슨 동호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 이건 비아냥도 무엇도 아니다. 담론의 소비도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려니, 그 애호의 대상이 마르크스인들, 지젝인들, 밥 딜런인들, 진중권인들 무엇이 다를 것인가. 패배주의라는 비판도 기실은 어떤 초월적 권위를 상정한 뒤에야 가능한 비판이니, 초월도 권위도 사라진 마당에야 설득력이 없다. 누군가 내게 <르몽드디플로마티크>를 구독하라고 계속 권유를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와의 관계를 따진다면 그쯤 구독할 수 있겠으나, 실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나같은 좌파담론 소비자에게 ‘재미’란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니까. 물론 그 재미에는 좌파의 현실적 성취에 대한 것도 포함이 된다. 재미를 포기하면 담론의 소비도 지탱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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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토킹 - 초현실주의 그룹의 킨제이 보고서
앙드레 브르통 외 지음, 정혜영 옮김 / 싸이북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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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무렵이면 어떤 ‘허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허술한 공복감, 그게 어디서 연원은 알 수 없으나 대략 직장인으로서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어떤 퇴행감의 일종임은 분명한 것 같다. 서둘러 집으로 가지 않고 교보문고쯤을 헤매거나 누군가에게 엉뚱한 통음의 제안이라도 기다리게 되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더불어 이 누추한 시대에 욕을 퍼붓고 불콰한 얼굴로 흔쾌한 연대감을 맛보기를 기대하는 것. 이틀 연속의 만취 덕분에 통음을 포기하고 효자동 가가린에 들렀다. 의외의 발견이라도 할 양으로.

일본 작가들의 양장본 책들 (요즘 왜 이리 일본 작가들의 번역소설들이 그리 많은지!!) 가운데서 아주 재밌어 보이는 책이 눈에 띄었다. <섹스토킹>(싸이북스) 제목이야 OL들의 은밀한 독서욕이거나 발랑까진 아해들의 욕망을 부추길 만한 것이었지만, 이런, 부제가 ‘초현실주의 그룹의 킨제이 보고서’라니, 거기다 앙드레 브르통, 만레이, 폴 엘뤼아르, 막스 에른스트, 루이 아라공, 자끄 프레베르라니, 헌책방 가격으로는 지나칠 정도인 6천원을 주고 서둘러 챙겼다.

혼자서 베트남 쌀국수를 꾸역꾸역 넘기며 책장을 넘겼다. 국수 한가락 입에 물고 낄낄대며 읽을 만큼 이들의 잡설과 요설들은 재밌다. 문학사에 굵은 고딕체로 남은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들이 정색하고 내놓는 섹스에 대한 솔직한 정담. 문학사의 문제아들답게 비행청소년들이 뒷골목에 모여 음담패설을 주고 받는 것 같다.


초현실주의자들
피에르 나빌 : 프레베르, 자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런 질문의 방식이라니, 너무 포멀하잖아)

자크 프레베르 :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에 직접할 때는 많이 생각했죠.(그래, 너도 아픈 시절 많았구나, 근데, 지금은 남이 해주나 보지?)
피에르 나빌 : 더 이상 하기 힘든 나이가 있나요?
자크 프레베르 : 그런 나이는 없고, 개인에 따른 문제겠죠. 자위에는 거꾸로 슬픈 면이 있어요.(이 작자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과도하게 정서를 주입해대기는)
피에르 나빌 : 항상 어떤 결핍을 수반하기 때문에요?
자크 프레베르 :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항상.(오, 불쌍한 프레베르)
이브 탕기 : 저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얘는 또 누구야?)
피에르 나빌 : 자위에는 항상 여자 이미지가 따라옵니까?(동성애자가 아니라면 그렇겠지)

자크 프레베르 : 거의 항상.
피에르 나빌 : 이 의견에 브르통씨는 어떻게 생각하죠?
앙드레 브르통 : 제 의견은 다릅니다. 자위가 받아들여지려면 항상 여자의 이미지가 동반돼야 합니다. 나이는 상관없고요. 슬플 것도 없죠. 자위는 삶의 어떤 슬픔에 대한 정당한 보상입니다. (ㅎㅎㅎ ‘슬픔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 얼마나 기막힌 자위에 대한 규정인가. 브르통, 네가 연애에 실패한 뒤 그거에 몰두한 경험이 있구나. 오, 두루 불쌍한.)
피에르 우닉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자위는 그저 작은 보상이 될 수 있을 뿐이죠.
레몽 크노 : 자위가 보상이나 위로와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위는 동성애처럼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죠.(자위에 무슨 정당성 운운이니?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앙드레 브르통, 피에르 우닉, 벵자맹 페레 : 그것과는 아무 공통점이 없습니다!(세명이 입을 모아 떠드네. 그래, 자위랑 동성애랑 뭔 관계가 있지?)
벵자맹 페레 : 여자 이미지 없이 자위는 없습니다.(빨간책 깨나 봤군. 그게 아니라면 에두아르드 푹스가 모았음직한 외설 동판화라도.)

 

다음은 더욱 측은함을 느끼게 하는 대화의 한 대목.  


루이 아라공 : 뭐가 제일 자극적이죠?
마르셀 뒤아멜 : 여자의 다리와 허벅지, 그리고 그 다음에 성기, 허벅지와 엉덩이.
자끄 프레베르 : 엉덩이
레몽 크노 : 항문
루이 아라공 : 여자의 오르가슴에 대한 생각
마르셀 놀 : 저도 그게 유일하게 흥미로운 것입니다.
마르셀 뒤아멜 : 저도.
마르셀 페레 : 몸의 부분에 관해서는 다리와 가슴, 그 다음에는 여자가 자위하는 것을 보는 것.
만 레이 : 가슴과 겨드랑이.
앙드레 브르통 : 눈과 가슴, 그와는 별도로 도착과 관계있는 육체적 사랑의 모든 것.
루이 아라공 : 그 답의 두 번째 부분에 도착이 소모적인 한이라고 덧붙이고 싶군요.
앙드레 브르통 : 저로서는 그게 반드시 쓸모없는 것이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크 바론 : 입, 이, 젖몽오리, 도착과 탐구와 관계된 모든 것.  


성도착자이면서 호모포비아인 앙드레 브르통, 자신의 ‘역량’에 대해 무척이나 자신이 없어 여자의 눈치를 살피는 아라공, 각기 다르다 못해 섬세하기까지 한 ‘욕망의 감각들’, 자신이 선호하는 체위와 여성의 스타일, 첫번째 성적 판타지, 어린시절의 성적 수치심, 몇번이 가능한가를 묻고 대답하는 당대의 철학자, 예술가들. 좌담의 사회자도 주도자도 없고, 가끔씩 정색하고, "그 발언의 경박한 면에 항의합니다"라고 화를 내는 이들.  벌거벗겨 보니 이 작자들도 그저 ‘수컷’일지니. 프랑스 넘들은 별 걸 다 책으로 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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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1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청각교육에 익숙한 수컷들 사이에선, '살가운 접촉'에 관한 섹스 토크야말로 크게 결여된 게 아닐까요..?^^ 남녀가 원래는 한몸이었는데 떨어져서 합일을 그리워하게 됐다는 플라톤 <향연>에서의 사랑 기원설을 재음미한다면 남자든 여자든 메마르게 꼴리기만 하는 시각적 섹스의 판타지에서 좀 헤어날 수 있잖을까요?^^ 얼마 전 노인 섹스를 과감하게 다룬 영화도 그런 점에서 다시 봐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아라공의 말마따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면 남자는 여자를 통해 좋건 나쁘건 자기 욕망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 아닐까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영혼의 색조이다
여자는 남자의 떠들썩하고 기운찬 소리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그저 신성모독
열매 못 맺는 텅 빈 씨앗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의 입은 거친 바람만 내불고
남자의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져
제 손으로 때려 부서진다
-- 루이 아라공, '미래의 시'에서

모든사이 2011-07-20 13:4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여자는 남자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절절한 과거이자 생생한 현재이기도 하지요. ㅎㅎ 아라공 글이 멋지군요..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9세기말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레즈비언 소설. 이 여사의 후의와 강력추천으로 <벨벳 애무하기>에 이어 두 번째로 사라 워터스를 읽다. <벨벳>보다 스토리 구조는 더 복잡해지고, 분량도 길어졌으며, 반전이 이끄는 재미도 볼만 하다. 곳곳에 스민 ‘하이틴 로맨스’적인 심리묘사와 서술도 여전하다. 전작보다 분량이 길어진 탓인가, 중간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BBC 드라마를 봤기 때문일까. 1부까지 흡인력 있게 읽히던 작품이 2부를 지나면서 툭, 맥이 끊기는 경험. 읽는 속도가 한결 더뎠다.

이 소설의 매력은 두 번에 걸친 대반전에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히는 1부는 귀족 딸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음모에 가담한 여주인공 수전이 또다른 여주인공 모드에 사랑에 빠지고 ‘음모’에 배반당하는 스토리다. 이 소설의 가장 극적인 반전의 대목인 셈인데, 음모의 가담자에서 은밀한 쾌락의 공유로 변화하는 수전의 감정적 궤적을 따라가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경험이다. 그 뒤의 반전과 재결합은 췌사에 가까울 정도로 느릿하고 지루하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BBC 드라마는 원작의 미묘한 재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아쉬웠다. 불안한 감정상태를 표현하기에 딱 알맞은 얼굴을 가진 엘레인 캐시디, 순진무구함과 천박성, 감춰진 성적 매력을 동시에 품고 있는 듯한 샐리 호킨스의 연기는 볼만 했다. 하지만, 스토리의 전개가 다소 비약적으로 비칠 정도로 빠른 데다 원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불친절하다는 인상이다. 아주 고전적인 장면들로 인해 19세기말 런던 뒷골목의 음습하고 패덕스러운 분위기는 잘 살아나고 있다.


이 소설이 레즈비언 소설인 이유는, 여자들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폭력적인 남성성에 맞서는 ‘여성성’의 세대적 연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드-석스비 부인, 매리언-수전의 모녀 관계는 삼촌/젠틀먼의 폭력적 남성 세계와 대비되는 모성과 사랑의 연대다. 여성들은 이대에 걸쳐 수난을 당하지만, 결국 남성(들)은 파멸하거나 죽고, 끝까지 사랑을 쟁취하는 것은 여성(과 여성의 연대)이다. 어머니와 딸로 이어지며 허스토리를 구성하는 여성들의 ‘略傳’, 사랑이야기이면서 페미니즘 소설로 읽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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