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죄수 -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 최후의 비밀 회고록
자오쯔양.바오푸 지음, 장윤미.이종화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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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중국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학생과 노동자가 총과 대포로 학살당했다. 정확하게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모르는 이 ‘천안문 사건’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초년생 시절에 봤던 교지에서였다. 천안문 사건 당시의 대자보와 구호, 사진과 외신보도를 그대로 전재한 대학 교지의  특집은 1980년 광주의 학살을 연상시켰다. 거친 질감의 흑백사진들은 ‘사회주의 중국’의 정치적 억압성과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민의 정부, 인민의 당을 표방하고 있는 ‘공산당’이,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상대로 저런 폭력과 살인을 행한다는 역설. 그것은 그해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나온 구호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로 재연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천안문 사건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당시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던 쟈오쯔양(趙紫陽, 1919-2005)의 실각소식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었다. 천안문 사건도 스탈린의 학살이나 북한의 연안파․소련파 숙청처럼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벌어졌던 여느 사건과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천안문 사건 특집을 실은 대학교지 편집자의 의도 역시 사건 자체보다는 ‘사회주의 중국’에서조차 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부르짖는 마당에 우리도 마땅히 거리에 나서야 할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당시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군부 잔당들이 지배하는 곳이었으므로, 대학 교지의 ‘천안문’은 당시에 한국사회에 대한 오마쥬였던 것이다.

쟈오쯔양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천안문 사건 전후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는 ‘죄목’으로 16년간의 가택연금을 당한 끝에 2005년 사망했다. <국가의 죄수>는 천안문 사건에 대한 자오의 회고이면서 중국 정치엘리트 내부의 정치적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갈등과 쟁투를 보여주는 실록이다. 자오는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진 “동란 지지와 당 분열”이라는 죄목의 부당성에 대해 격정적인 어조로 토로하고 있다. 자오는 천안문 사건이 ‘반사회주의, 반혁명 분자들에 의한 동란’이라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과 달리, “시대는 변하고 있고, 민주와 법제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이와같은 사고방식(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하는 오랜 이데올로기)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으며 학생시위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자오의 다음과 같은 옹호는 공산당 간부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시각이다 : “우리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행한 민주제도는 완전히 형식에 치우쳐 있고, 인민이 주인되지 못하며 소수, 심지어 개인이 통치하는 것이다. ... 오히려 서구의 의회민주제가 그 생명력을 보여준다. 이 제도가 지금 찾을 수 있는 비교적 좋은, 더욱 충분한 민주를 구현할 수 있고 현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또한 비교적 성숙한 제도인 것 같다. 지금은 아직 이것보다 더 좋은 제도를 찾을 수가 없다.”

공산당 일당 지배의 중국사회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신념’으로 가진 자가 ‘공산당 지도자’이니 그의 축출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서구의 의회민주주의에 대해 중국은 ‘전인대’(전국인민대표자회의)라는 또다른 ‘대의기구’를 가지고 있으며, ‘인민’의 당인 공산당이 지배하는 곳이니 ‘의회제도’는 ‘부르주아의 정치위원회’ 쯤으로 격하돼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이같은 시각은 천안문 사건의 직접적인 촉발 계기가 됐던 인물 후야오방(湖耀邦, 1915-1989)과 더불어 자오와 중국 최상층부 엘리트 내부의 정치개혁파들이 공유하는 입장이었다.

후야오방이 자오보다는 훨씬 더 능동적이고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면, 자오는 이 책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치개혁에 대한 신념은 있되 우유부단하고 ‘정치적 처세’에 능숙하지 못한 인상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4.19 직후의 장면과 비슷한 꼴이랄까. 그는 학생 시위대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것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줄기차게 주장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덩사오핑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노심초사 한다. ‘후견정치’가 지배하는 중국에서 최고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는 늙은 자오의 모습은 안쓰럽다 : “나는 단지 그가 오랫동안 신임해왔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주었던 내가 비록 학생시위에 관한 그의 결정에는 따르지 않았으나 결코 절박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거칠게 말해, 중국 지배엘리트들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중심으로 경제적으로 개혁파와 보수파(마오주의 노선)과 구분되고, 공산당의 개혁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다시 개혁파와 보수파가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의 사망과 4인방의 숙청 이후 개막된 ‘덩의 시대’는 중국경제의 눈부신 성장을 가져왔고, 이와 동시에 부상한 반부패,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는 덩사오핑의 4대 기본원칙(마르크스레닌 마오주의 노선, 공산당 영도, 사회주의 원칙, 인민독재) 하에서 억압되었다. 요컨대, 정치적 민주화 자유화의 사회적 요구는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과실’과 맞교환 된 것이다. 경제를 줄 테니, 정치개혁에 대해 입다물어라. 역자 장윤미 박사는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사건으로 인해 입은 정치적 타격을 경제성장을 통해 정당화․합리화하려 했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하자면, 박정희 노선의 중국 버전?

장 박사는 한국의 90%가 넘는 ‘미국박사’들이 가진 불안감을 소개했다.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가로 잘 나가던 시절에 이 나라로 유학을 했던 한국 대다수의 학자․지식인들은 미국 패권의 몰락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 중국의 부상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한다는 것. 어서 빨리 미국 패권시대가 다시 도래했으면 하는 게 이들의 바램. 아마 이들이 걱정하는 건 자기들이 공부해온 ‘워싱턴 컨센서스’와 같은 미국식 표준과 가치들의 몰락일 것이다. 물론, 그것을 대체할 다른 패러다임은 잘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식 가치와 표준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현실을 제대로 해명하지도 못한다. 천안문 사건이 벌어졌을때 미국내 파워엘리트들이 보여준 태도도 마찬가지다.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천안문 사건이 중국 붕괴의 서막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인민의 군대’가 자국 인민 수 천명을 죽였으니, 이제 중국은 망할 거라는 파국적 인식을 가졌던 것. 그러나 중국에서는 홍수로 수만명이 죽어도 꿈쩍않았고, 대장정으로 함께 도망쳤던 홍군이 10분의 1로 줄었어도 동요가 별로 없었다. 이런 중국인의 태도를 어찌 미국식 민주주의의 가치와 척도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잊을만 하면 나오는 미국발 북한붕괴론도 이와 똑같다. 와인과 영화를 즐기는 뚱뚱한 독재자가 지배하는 나라는 곧 망할 것이라는 미국의 예견은 그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지독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장 박사는 “국가가 시장화 개혁을 주도하고 일당영도와 민주가 공존하며, 사회참여와 국가통제가 공존하는 이른바 ‘중국식 발전모델’”을 말한다. 맑스레닌주의는 중국에 와서 마오주의라는 중국적 마르크스주의가 됐고, 시장경제는 중국에 와서, 분명 모순어법일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됐다. 민주주의는 중국에 와서 ‘민주집중제’가 됐다. 지오반니 아리기가 희망적으로 관측했던 ‘중국식 발전모델’은 이런 요소들의 모순적 융합의 산물이다. 그것이 국가자본주의이든, 국가사회주의이든, 관료자본주의이든 다른 국가와 경제시스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가 될 것이다.

천안문 사건은 발생한지 20년이 넘었다. 지금도 중국 지도자들은 권좌에 오르면서 당시의 진압을 칭송하는 선서를 한다고 한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수백 만명이 죽었지만, 인민의 군대가 직접 인민에게 총을 들이댄 경우는 오직 천안문 사건 하나뿐이다. 천안문은 중국 현대 정치의 아킬레스 건이란 얘기다. 20년도 넘은 이웃나라의 한 사건과 그 사건의 핵심당사자의 회고를 도대체 내가 왜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들었는데, 반쯤 읽고 나니 읽지 않는 것보단 낫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자오쯔양은 정말 매력없는 정치인이다. 마오나 덩사오핑에 비하면 중국사에서 단막극 조연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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