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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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문고에 갔다가 황석영의 신간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엉겹결에 샀다. 서가배치에 상대적으로 민감한 나는 작가명이나 가나다순 배치를 싫어하는 편이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출판사별 배치인데, 그것도 장르별로 따로 구분해 놓은 게 아니라 한 출판사의 인문, 사회, 문학 등 출판 분야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의 배치다. 10여년 저쪽의 교보나 종로서적은 아마 그런 식의 배치를 했던 듯 하다. 그래야 해당 출판사의 ‘색깔’을 알 수 있고, 편집자의 개성도 느낄 수 있다. 어쨌거나 황석영의 <강남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표지를 드러낸 채 누워 널찍한 매대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눈에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황석영 말마따나 ‘강남형성사’다. 그런데, 황석영이 강남형성의 주역으로 꼽은 것은 룸살롱 호스티스와 국정원 직원, 건설업자, 부동산 투기꾼, 그리고 조폭이다.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양상은 강남 나이트클럽과 백화점, 떳다방 등이다. 한마디로 강남은 환락과 투기와 조폭의 세계다. 권력이 은밀하게 개발을 추진하고, 투기꾼들이 가세해 부풀리고, 조폭이 지켜주는 공간이다. 황석영은 꼭두각시 놀음과 같은 소설을 구상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각기 제 몫을 해내며 오늘날의 강남의 전사를 충실하게 재연해낸다.

먼저 전직 북창동 호스티스인 박순녀. 그녀는 아리따운 몸매 덕에 북창동 룸살롱에 진출하고, 여차저차 인연을 이어가 강남에 대형 나이트를 세운다. 서울의 유흥가가 종삼과 북창동 시대에서 강남 룸살롱으로 중심이동 하던 흐름을 그녀의 동선은 정확히 재연한다. 아니, 그 흐름을 타고 떼돈을 번 유흥세력의 면모를 연기하는 꼭두각시다. 오늘날의 북창동은 4대문 안의 대표적 유흥가라는 과거의 전력을 잃어버리고 다소 퇴락했지만, ‘북창동식’이라는 보통명사화된 룸살롱 스타일이 보여주듯이 그 위용은 여전하다. 물론, 강남의 ‘텐프로급’ 이상에 비하면 수질이 한참 모자라지만 말이다.

친일파 밀정이었다가 미군정의 하급관리로, 6.25를 거치면서 정보부 요원으로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했던’ 김진. 그는 강남의 역사적 뿌리를 상징한다. 지금의 강남 아파트들 상당수가 한강 모래사장을 메워 만들었듯이, 그는 봉건 귀족 문화도, 근대 부르주아 문화도 취약한 한국사회에 갑자기 등장한 강남부유층의 뿌리를 드러낸다. 친일과 독재의 그늘에서 쌓아올린 부와 그것의 허망한 추락.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려 나듯이 전쟁과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벼락부자가 된 전후 1세대 부유층은 뒤이은 IT와 금융 부자들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말죽거리 신화의 실제 주인공들인 부동산 투기꾼 심남수와 박기섭. 부동산 불패신화를 만들고 부추겨온 이들은 최근 몇 년까지도 시중의 부동자금을 쥐락펴락하던 떳다방의 원조인 셈이다. 지난 정부는 ‘투기시대의 종말’을 호기롭게 떠들었으나 결국 이긴 것은 이들이었다. 강남개발의 역사가 70년대부터이니 가히 40여년 이상을 승승장구해온 이들의 ‘체험적 진리’앞에서는 어떠한 부동산 정책도 요지부동이었던 것.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부동산 불패신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남은 것은 손낙구의 지적대로 ‘부동산 계급사회’다.

호남 조폭 홍양태. 부산 조폭 칠성파가 상경하지 않은 까닭은 그곳이 일찍부터 일본과의 밀수 등 ‘먹을 것’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호남 조폭은 먹고 살거리를 찾아 대거 서울로 상경해 자유당 시절 이정재와 임화수가 지배했던 서울 뒷골목을 차지했다. 전통적 건달의 시대와 신흥 조폭의 시대를 가르는 분기점이 바로 홍양태와 같은 호남 조폭의 서울 상경이 이뤄지던 1970년대. 이들 역시 명동과 종로, 북창동 일대에서 강남으로 진출하면서 강남 형성사의 한축을 담당한다.

그리고 도시빈민의 딸인 임정아. 무너진 삼풍백화점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 그녀의 부모는 70년대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공돌이/공순이였으며, 지금의 성남시에서 벌어졌던 ‘광주대단지 사건’의 주인공들. 황석영은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 인물’로 묘사되는 임정아를 통해 기형적으로 개발된 도시의 새로운 주역이자 미래를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은 하지 마세요”라는 당당한 자기인식을 드러내는 그녀는, 저항보다는 굴종을 선택했던 부모세대인,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와는 다르다.

이들이 이런 저런 인연으로 얽혀 만들어내는 ‘꼭두각시 놀음’은 흥미롭다. 1995년 삼풍백화점의 붕괴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강남의 고현학(考現學)이 아니라, 고고학(考古學)이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소설적 내러티브거나 주인공들의 각축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이 주인공들과 사건들의 실제 인물과 배경을 추리해내는 재미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황석영은 이 소설의 인물과 배경을 대체로 실제 인물과 사건에서 따왔다.

무너진 백화점의 회장 김진의 모델은 몇 년전 유명을 달리한 삼풍백화점의 실제 회장 이*다. 군 보안사 준위 출신의 그의 배경부터가 소설속 인물과 닮았다. 투기꾼이자 건설업자인 박기섭은 은마 아파트 건설과 분양 성공으로 느닷없이 중견건설사로 부상했던 한*건설의 정** 회장이 모델이다. 실제의 정회장 역시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강남 개발과 더불어 재력을 쌓았고, 그 재력으로 정치자금으로 권력에 손을 대고, 철강회사를 차리려다 부도를 맞고 말았다. 호남 조폭 홍양태와 그의 라이벌  강은촌 , 그리고 두 조폭간의 갈등 속에서 신흥 강자로 부상하는 인물도 서방파의 김태촌, 양은이파의 조양은, OB파의 이동재 등 실제 보스들이다.

소설 속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명동 사보이 호텔 사건(1971)은 바로 전통적 건달의 잔재였던 신상사파의 몰락과 이들 삼대 패밀리의 등장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양은이파의 보스가 행동대장으로 나선 이 사건은 명동 신상사파가 급속하게 몰락하고, 호남 조폭 패권시대를 개막시켰다. 주먹이 사라지고 회칼이 등장하며, 업소보호에서 직접 사업으로, 구역다툼에서 전국구로라는 조폭 세계의 변화는 이들 삼대 패밀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다.  한국 조폭의 계보와 역사에 대해 얼마쯤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 속의 내러티브는 픽션 아닌 르뽀 수준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 소설이 실망스럽다면 바로 이런 측면에서였을 것이다. 강남의 형성이 투기와 유흥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거기에는 70년대의 중정과 박정희 정부가 깊숙하게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도시사학자 손정목의 다섯권 짜리 <서울도시계획 이야기>(한울)가 더 흥미진진하다. 실제 서울시 도시계획 담당 간부였던 저자가 쓴 이 빼어난 실록은 서울이 왜 파행적으로 건설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600년 수도였던 서울이 파리도 뉴욕도 베를린도 될 수 없었는지를 ‘한국적 맥락’에서 보여준다. 전근대의 역사와 문화를 한순간에 휩쓸어 버린 전쟁과 전후의 난개발, 그리고 투기와 권력의 공생이 만들어낸 괴물이 바로 서울, 그것도 강남이다.  

 

황석영의 이 소설은 거기에 조폭문화와 도시빈민의 삶을 슬쩍 끼워 넣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뒷골목의 언어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는 문장들은 왕년의 황석영답다. 특히 호남 조폭 세계의 상스럽고 되바라진 언어들을 복원해내는 솜씨는 거장답다. 친일 밀정이던 김진의 만주시절을 다루는 솜씨도 그렇다. 하지만, 친일독재와 강남형성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지나친 역사교양으로 나아갔고, 조폭이야기 또한 너무 일화적 구성에 치우쳐 있다. 이야기의 얼개는 앞서 말했듯이 이미 알려진 실제 사건들이고. 거장이면 좀더 나아갔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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