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드>(신정옥 옮김, 전예원)를 읽다. 세익스피어 작품 치고는 출퇴근 시간에 하루면 뚝딱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희곡. 세익스피어의 한문장을 찾기 위해 펼쳐든 것이지만, 그 문장은 맥베드에 없었다. 대신 권력에 취해 운명을 기꺼이 수락하는 사내의 장중한 독백들이 눈에 띄었다 : “어제라는 날들은 모두 우매한 인간에게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횃불처럼 밝혀 준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무대위에서 흥이 나서 덩실거리지만 얼마 안가서 잊혀지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 바람아 불어라, 파멸아 오너라.”(5막)

세익스피어를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찰스 램이 쓴 <세익스피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동용으로 윤색돼 희곡 아닌 소설로 뒤바뀐 것. 성경 역시 찰스 램이 풀어 쓴 것으로 읽었을 것이다. 초등학생때의 일이니 <햄릿>의 작가를 찰스 램으로 오랫동안 착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대로 읽은 것은 빨간색 천으로 싸인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오화섭 선생 번역의 세익스피어였을 것. 깨알같은 글씨의 위 아래 두단 세로조판의 이 전집은 스탕달도 플로베르도 가르쳐준 고마운 전집이다. 세익스피어 작품 중에 가장 좋아했던 것은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로나의 바람둥이 페트루키오의 장광설이 재밌어 몇 번이나 읽었을 것이다.

국내에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그의 연극을 제대로 소개한 것은 오화섭 선생이 아니었을까. 이대 교수이자 남로당 비밀 조직책이었던 아내를 우파의 총에 의해 잃은 뒤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세익스피어 번역이었던 것. 전후 극우반동의 시대에 자신의 정치적 이력과 성향을 숨긴 채, 고전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그의 아들인 오세철 교수가 경영학 교수에서 점차 완강한 좌파로 변신해가는 과정은 어찌할 수 없는 핏줄의 내력을 짐작케 한다. 오세철이 <다시혁명을 말한다>(빛나는전망, 2009)에서 고백하는 이 집안의 내력을 나는 아프게 읽었다.

<맥베드>는 마녀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한다. 맥베드가 왕위에 오르지만 그의 아들은 왕위를 잇지 못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 운명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본성의 인격화인 것처럼, 맥베드의 마녀는 그의 본성에 내재한 권력 욕망의 현현(epiphany)이었을 것. 비극은 우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맥베드는 운명과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이 운명을 수락하고 스스로 패배한다. 그리스 비극과 이 작품이 갈라지는 지점. 운명이란 불가해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내재한 ‘기질’의 다른 표현일 것. 백석이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남신의주유동박씨봉방) 중얼댄 것은 그의 착하고 여린 심성이 만든 환영에 불과하다.

맥베드는 고뇌의 표정을 보여주지만 그의 아내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 “자, 어서 오너라. 눈을 가리는 밤의 어둠이여. 연민의 정이 고인 낮의 부드러운 눈을 가려다오. 그리하여 너의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나에게 겁주고 있는 저자의 목숨의 증서를 갈기갈기 찢어다오. 어둠발이 내리는 구나, 까마귀는 서둘러 숲속 보금자리로 가고 있다. 낮의 세계의 선량한 것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졸기 시작하고, 밤의 사악한 앞잡이들은 먹이를 찾아 눈을 붉힌다.” (3막, 맥베드의 독백) 그러나, 확실히 여자는 욕망 앞에 더 강하다 : “무서운 음모에 끼어든 악령들이여. 어서 와서 날 나약한 여자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날 채워다오. 나의 피를 응결시켜 연민의 정으로 통하는 길목을 끊어, 그래서 동정이라는 자연의 정이 동하여 나의 흉악한 계획을 좀먹지 않게 해다오. ... 어두운 밤아, 깃을 펼쳐 지옥의 시커먼 연기로 널 뒤덮어라. 나의 날카로운 단도가 찌르는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늘이 암흑의 장막을 헤치고 얼굴을 내밀면서 ‘안된다, 안된다’하고 외치지 않도록(맥베드의 아내, 1막)” 
 

신정옥의 번역은 운문 번역이 아니다. 최종철의 번역이 세익스피어 문장의 리듬을 살린 운문번역이라는데, 그냥 읽기에는 신정옥의 번역이 더 낫다. 게다가 싸고 얇다. 그런데, 전예원의 이 세익스피어 시리즈가 절판인지 검색이 되지 않는다.  이 시리즈의 나머지도 헌책방에서나 찾아야할 모양이다.  

  

* P.S. 마녀의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들(4막), 요컨대 절대적인 악을 구성하는 혐오와 금기, 더러움의 목록들인 셈. 메리 더글러스의 ‘오염과 순수’의 분류체계를 원용해 세익스피어 시대 영국의 문화적 금기의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 흥미로운 것은 독사의 살점와 늑대이빨과 나란히 유태인과 터키인, 타르타르인(중앙아시아)이 들어가 있다는 것. 이를 두고 세익스피어를 반유대주의자이자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오버일까?  


“늪에서 자란 독사의 살점아, 끓어라 익어라 가마솥 속에서. 도롱뇽의 눈알과 개구리 발가락, 박쥐의 깃털과 개 혓바닥, 독사의 갈라진 혀와 맹사의 독침, 도마뱀의 다리와 올빼미의 날개, 이 주문으로 무서운 재앙을 일으켜 지옥의 국물처럼 펄펄 끓어라. (...) 용의 비늘과 늑대의 이빨, 마녀의 미이라 탐욕스런 상어의 위와 창자, 신을 모독하는 유태인의 간장, 산양의 쓸개와 월식의 밤에 꺾은 주목의 가지들, 터키인의 코, 타르타르인의 입술, 창녀가 낳아서 목을 졸라 죽여 시궁창에 버린 갓난애의 손가락, 죄다 집어넣어 진국으로 끓여라. 호랑이 내장을 더 넣어서 가마솥 국을 끓여라”(3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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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5-2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화섭 선생 그러면 따님인 오혜령 씨가 먼저 생각납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그이의 암 투병 에세이 '일어나 비추어라'를 본 기억이 있네요
그렇게 유명한 집안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나중 대학 들어가고 나서 오화섭 박노경 오세철 오혜령...이런 이름을
다시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충정로 문화일보 앞을 지날 때마다 옛 동양극장 사진이 떠오르는데
오화섭 선생의 집은 아마 그 동양극장 자리 길 건너편에 있었을 겁니다.
북아현동 어디 였다는 기록 본 적 있는데 가물가물...

모든사이 2010-05-2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네 쓸모없는지식에 대한 탐닉도 어지간하다. 이 잡식성 호사가야. 집 자리가 뭘 그리 중요하냐. ㅎㅎ

이진성 2010-05-25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함다.

'서울의 오래된 극장은 서대문 네거리 못 미처의 동양극장이다(...)
바로 건너편에 돌로 지은 우람한 집 2층에 '여인소극장'이 있었는데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박노경의 자연장(紫煙莊)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효선(아동문학가)의 '헐려버린 극장' 중에서

모든사이 2010-05-25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네가 이 서재에 거의 유일하게 댓글을 주르르 다는 열혈독자이니 딴 건 둘째치고 그거 때문에라도 눈물나게 고맙다. 대체 어효선이라니, 언제적 이름이더냐. 초딩때 보고 수십년만에 듣는 이름이로구나. ㅋㅋ
 
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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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영화를 공부하는 후배 한 녀석이 물었다. “형, 심수봉 노래의 비밀이 뭔지 아세요?” 그와 나는 주책 맞게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심수봉의 열렬한 팬이다. “심수봉은 그대, 당신이라고 하지 않고 항상 ‘여자’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나는 여자이니까’ 등등의 노래를 떠올려 보니, 그래, 맞다. 심수봉은 대상이 모호한 그대, 그녀, 그 라고 하지 않고 남자/여자를 말한다. 심수봉 노래속의 ‘여자’는 사랑에 달뜨고 몸살이 나며, 질투하고 욕망하는,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여자’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내보이는 ‘여자’. 이게 남근적 시선이라고? 그래도 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수컷’이거나 ‘암컷’이다. 중간이거나 초월은 없다.

최영미의 시는 바로 그런 ‘여자’의 시다. 오랜 만에 그녀의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을 사서 군밤 까먹듯 읽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도 그녀는 사랑하는/사랑했던/사랑하고픈 여자임을 표나게 보여줬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그렇다. “무릇 여자로 태어나 노래하는 것들/홀로 달콤하며 홀로 아프고/홀로 뜨거운 것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2007년의 사포’)라니, 이건 그녀에게 불가피하게 수락해야할 ‘운명’인 모양이다. 이 운명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러나, 심각하지 않다. 관음증의 그것처럼 음습하지도 않고 차라리 유쾌하다. 그녀의 시는 자주 스무살 무렵의 시간대로 회귀하는데, 그런 시를 읽을 때면 나 역시 그맘 때로 돌아가 그녀의 문장 속에 내 삶을  뒤섞곤 한다. 이것도 바르트적인 의미의 “쓰여지는 텍스트”인 것인가. 그녀의 시는 내게 ‘마들렌 과자’인가. 

최영미의 사랑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가 휘젓고 다닌 구석구석이/흉터와 무늬가 되어/그가 일으킨 물결 밑에/꼼짝않고 얼어붙어/비가 와도 나는 흐르지 못한다.”(‘ love of my life?’) 몸에 각인된 흉터와 무늬. 불쑥불쑥 현재의 삶으로 틈입하여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드는 몸의 기억들. 그런데, 이상도 하여라. 그녀는 흉터와 무늬를 남겼던 사랑의 역사를 다시 반복하기를 꿈꾸고 있으니, “이대로 세차게 흔들리다/누군가의 가슴바닥에/훅, 떨어졌으면...”(‘11월의 낙엽’). 그녀에게 사랑은, 몸으로 욕망하는 사랑은, 존재의 법칙이자 이유(raison d'etre)인 모양이다. 그녀는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독약이라도 마다 않는”(‘그여자’) 여자였을 것이며, “날마다 찾아오는 쾌락을/잘게 부수어/구멍으로 밀어 넣는다/싱싱한 고기의 피묻은 입술(‘가장 쉬운 길’)로 살과 피를 먹고 살아야만 비로소 살아가는 힘을 얻는 여자.

이 정직하고 싱싱한 욕정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몸이 벌써 그걸 먼저 알아챈다.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가까이 코를 갖다댄다//그렇게 학대했는데도/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중년의 기쁨’) 이런 몸적 인식은 역사의 진보에도 적용이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몸의 변화이자 그 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가령, 이런 ‘아줌마스러운’ 인식(?)은 즐겁다. “유모차 부대를 호위하는 청년들이 어찌나 멋있던지!/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역사는 이렇게 진보하는 거야”(‘2008년 6월 서울’) 남자 몸의 품종개량의 역사가 곧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다. 이건 ‘여자’로서의 자각이 아니라면 쉽게 보이지 않을 터. 꽃미남에 열광하는 이 중년 여자의 욕망은 별로 추해보이지 않는데, 그건 생기로 발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잘 알려진 축구광이자 호나우디뉴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몸의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여자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자 다시 사랑할 순간이다. “너를 보기 전에 나는/내가 얼마나 아름다움에 굶주렸는지를 몰랐다/너의 풍부한 표정, 입가의 사소한 움직임을/놓치지 않으려 눈을 반짝이다.../누워 쓰러지기 전에 나는/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지 못한다”(‘일상의 법칙’) 굶주렸으니 채워져야 하고,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이다. 욕망하는 존재, 욕망하는 여자. 욕망이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중년의 나이를 쓸쓸하게 확인하는데, 그것은 죽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빨 빠진 늙은이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겠지/욕망이 지나간 구멍으로 바람이 들락거리겠지, ‘온종일 집에서’) 김지하의 말을 비틀어 말하자면, 사랑이 아니면 자살이다. “겉은 멀쩡하고 속은 화산이 타고 남은/재에 묻힌, 그녀는 날마다 자살을 꿈꾼다”(‘어떤 동문회’)

유예된 욕망, 채워지지 않는 사랑이므로 그녀는 반생은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이다. 떠돌이의 삶이므로 연애와 사랑으로 충만했던 과거를 회고할 도리 밖에 없다.(“이 남자에서 저 여자로 옮기며/나도 모르게 빠져간 젊음/후회할 시간도 모자라네,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립스틱 짙게 바르고, 탐욕스럽게 몸을 갈구하는 육식동물로서 살아가던지, 


그것을 하지 않고
팔 년만에 돌아온 봄이었다.  


금욕에 길들여진 정갈한 방.
화분에 물을 주고 밖을 내다 보니
벌레처럼 들끓는 봄볕
범람하는 꽃가루 때문인가  


쉽게 행복해지기를 거부하던 육체가
바위처럼 뻣뻣해진 가슴 열고,
뜨거웠던 용암의 분화구를 추억한다.  


사교계의 꽃이 되고 싶지 않아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가
길게 누워 봄을 앓는다  


소문만 무성했지 자신을 불사르지 못한 

 생애의 마지막 연기를 준비하며
옷을 갈아입고 립스틱을 칠한다.
(취미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겠지?)  

 

질겨진 가죽에 향수를 바르면
육식동물이 될까?
- 4월은 잔인한 달  


이 시집의 발문은 그녀의 첫 시집을 두고 “욕정을 사랑으로 은폐함이 없이 성에 직핍한 그녀의 대담성에 독자들, 특히 남성들은 혼비백산하였다”는 최원식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혼비백산은 너스레일 것이다. 현실원칙의 제어를 받지 않은 쾌락원칙의 솔직한 토로는 혼비백산하게 만들지 않고, 은밀한 공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은밀한 이유는 추상과 논리를 경유하지 않고 남자-여자를 잇는 사적인 회로를 거치기 때문이다. 시를 쓰느라 낑낑대며 언어를 메치고 되치며 은유와 상징의 좁고 복잡한 우회로를 통과하는 건 때로 시에 대한 매혹을 반감시킨다.  

 

반성(reflexive)이 지나치면 요상한 시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시를 읽으며 이제 막 중년으로 접어든 여자의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을 마주하는 건, 내 안의 그것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로 인하여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고 “마지막 연애의 상상”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최영미 시를 보며 그런 몽상에 잠시 젖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눈을 들어보니 시커먼 사내들이 튀어나온 배를 흔들며 지나가고, 숙취로 얼굴이 벌건 아저씨들이 이빨을 쑤시고 앉아 있다니. 허망하여라, 내 우울한 몽상이여, 5월 한낮의 백일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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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5-14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말이우, 형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에 충실하신지?

어디(?)에 쏠려야할 욕망이 모조리 상반신 끝으로 전이돼 버린 건 아닌가...

책으로만 발산되는 건 아닌지...

모든사이 2010-05-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어? ㅎㅎㅎ
 

이번주에 읽은 두권의 책. 김기협 선생의 <페리스코프>(서해문집)와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돌베개). 두권 모두 아주 빠르게, 그리고 아프게 읽었다. 김기협-유시민-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고리’가 애석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김기협과 유시민의 기이한 인연도 그러하거니와 김기협의 책이 거의 노무현에 대한 나름의 추념을 담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세속의 시각으로 경기고-서울대의 주류 엘리트의 길을 걷다 스스로 마이너리티가 된 김기협은 자연스럽게 노무현과 조우한다. 이게 역사적 필연인지, 혹은 정치적 사회적 마이너리티였던 노무현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정치공학으로 안되는 어떤 진정성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은 눈 밝은 자들의 눈에는 아주 명확한 눈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정치공학을 거부했고(아니, 생래적으로 그에 맞지 않았고) 김기협의 눈은 그걸 꿰뚫어 보고 기꺼이 ‘노빠’를 자임했다.  

사유의 깊이가 어떤 지극한 경지에 달할 때 언어는 지시대상을 넘어 보이되 보이지 않는 진리에 육박한다. 나는 노무현의 ‘유서’가 그같은 경지에 이르렀던 偈頌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어느 해 인가, 조계사 앞 불가 서점들을 돌아다니다가 샀던 ‘선시’ 앤솔로지에서 얼핏 읽었던 김달진 선생이 모은 禪詩集 의 풍경은 그러했다. 그가 죽었던 지난해 어느 시사지에서 그의 비문을 응모했을 때, 나는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도 후보로 인정받지 못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전직 대통령이 되어서도 전직 대통령이 되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내용의 비문을 보낸 적이 있다. 간결 완미해야할 비문으로는 적당하지 않았으나 그 잡지에 오롯이 실려 내심 반갑기도 했다. 이 완강한 기득권 동맹의 철저한 배제의 논리 앞에서 그의 죽음은 역사적이다. 그의 자서전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불편했다. 출근버스 안에서 가끔씩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느라 힘겨웠다. 그만큼 그의 삶이 내게 ‘객관화’되지 않은 탓이다.

유시민은 노무현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성찰적 지식인’이었다고 부르고 싶다. 성찰의 과잉은 때로 과도한 부끄러움과 명분론을 낳기도 한다. 위선과 위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성찰’하며 사는 것은 스스로의 쪽팔림을 인식하는 삶이기도 하다. 나는 생전의 그를 다섯 번 만났다. 민주당 경선후보 시절 금강빌딩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실에서, 그리고 정몽준과의 단일화 직전에, 그리고 그 후에 두 번.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점점 역사의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다. 마흔이 넘은 사람이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02년 대선이 점차 무르익으면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눈빛은 더 형형해졌고, 자신감과 에너지는 점점 더 흘러 넘쳤다. 저렇게 한 개인은 역사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정몽준의 사진을 두 번에 걸쳐 두시간 동안 찍었던 한 선배는 “아무리 눈에 초점을 맞춰도 도대체 눈빛이 맑게 찍히질 않아”하고 투덜거렸다. 그는 작가의 반열에 드는 뛰어난 사진작가였다. 눈에서 광채가 나지 않는 정치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노무현-정몽준의 후보단일화는 노무현이 이길 것이라 직감했다. 결단을 앞둔 사람의 눈이 그렇게 정직하다는 것을 나는 사진기자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기협과 노무현의 책이 아프고 쓰린 것은 그런 눈을 가진 정치인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공과와는 별개로 그나마 당대와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을 잃어버렸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이성적 토론과 합리적 접근, 요컨대 그는 토론이 가능한 대통령이었다. 천안함 사태를 맞은 청와대에서 전직이랍시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이 전두환과 김영삼 둘 뿐이라는 것은 정말 희극적이다. 노무현의 책이 아주아주 많이 팔려 조중동에 가려워졌던 그의 진심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노무현과 그의 정책에 대해서 제대로된 회고와 평가를 할 수 있기를.  

노무현의 신화를 넘어서는 작업은 조만간 어디에서든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고한 보수기득권 동맹에 에워싸였던, 그래서 개혁의 폭이 대단히 제한되었던 어떤 정치세력의 운명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불가피한 '제한성'을 애써 외면하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에게서 정치적 리얼리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노무현 시대의 좌절>(창비)과 같은 전시대에 대한 평가서가 가진 한계도 그것이다. 지난해 출간된 이 책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하나의 규범적 비판논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진보적 이성과 지향이 한국사회라는 현실을 경유하여 만들어내는 복합성과 중층성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레디앙같은 진보인터넷 신문이나 과거 진보누리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논쟁에서 받게 되는 인상은 이들의 인식과 논리가 참으로 앙상하고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그람시는 알아도 헤게모니적 실천과는 영 동떨어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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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파주출판단지는 아이들로 북적댔다. 여기가 출판단지이고, 입주한 출판사의 상당수가 어린이책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까먹었던 탓이다. 겨우겨우 헤르만하우스 근처에 차를 대고 헌책방 ‘보물섬’을 찾았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발했지만 자유로 인근에서 결국 포기했다. 휴일의 도로를 달리는 차는 너무 빨랐고, 자전거 도로는 곳곳에서 끊겨 있었다. 확실히 지자체의 생태도시, 자전거 도시 운운은 전시용이다. 파리의 밸리브를 흉내 낸 ‘fifteen' 자전거들은 아무도 그걸 타지 않아 거치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신도시는 날림으로 순식간에 지은 조립주택 같은 공간이다. 이창동의 <초록물고기>가 잘 그려냈듯이 신도시의 욕망은 허망하고 부질없다. 하기야 어디 신도시만 그러하겠는가. 역사가 거세된 모든 공간은 모두 허공위에 지은 집과 같지 않을까.

휴일에 헌책방이라니. 엊그제 휴일에 서점에 가는 사람의 내면은 황폐한 것이라는 농담아닌 농담을 했었는데, 나 또한 이 무슨 구태인가. 보물섬은 그리 크지도 않고, 갖춰놓은 책들도 변변한 구색은 아니었다. 이 곳이 출판단지라서 파본이나 낙장으로 빠져나온 신간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여느 헌책방과 다를 바 없었다. 헌책방에 가면 흔히 만나는 80년대 사회과학 책들과 철지난 에세이들. 한때의 베스트셀러와 예의 그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책들.

처음 집어든 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판사회과학>(김성기, 문학과 지성사).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9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1990년 무렵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후기산업사회에 대한 비판논리로 시작되었던 서구의 맥락과는 달리 그 당시 한국사회의 문화예술을 풍미하던 리얼리즘에 대한 반동적 대응의 성격이 강했다. 권택영이니 김욱동이니 하는 소장 영문학자들이 창비류의 리얼리즘과 민족문학을 넘어서기 위해 시작했던 것. 김성기의 이 책은 문화예술 중심이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사회과학으로 이끌어간 선구적인 책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때 이 책을 처음 건네준 한 여인은 밑줄을 꼼꼼히 긋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의 밑줄을 따라 동글동글한 글씨의 메모를 따라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읽었던 이 책이 어디로 간 것일까. 옛일이 생각나 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두 번째는 두레에서 나온 문고본 레닌 저작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모택동의 <실천론/모순론>과 로자의 <러시아 혁명> 등과 함께 시리즈로 묶였던 책. 레닌의 비난만 믿고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을 역사에 다시 없는 반동적 인물이자 ‘배신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선배가 생각나 혼자 키득거렸다. 극우보수 일간지의 사회부 기자를 하다 대기업 부장으로 ‘영전’해 있는 그 선배는 그때 과연 ‘인터내셔널’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크크, 웃기는 일이다.

함께 집어든 <1985년>(최광렬 옮김, 신평론)도 비슷한 류의 책이다. 내 기억으로는 집안이 부유했던 한 미국 유학생이 유학갔다가 ‘트로츠키주의’에 빠져 귀국 후 국제사회주의를 널리 전파(?) 하려고 이 출판사를 차렸다.(10년도 더 된 술자리의 한 전언에 따르면 말이다) 그 뒤 책갈피라는 출판사로 개명하면서 참으로 집요하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책을 펴냈다.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은 이론가들의 책들. 이 출판사와 관계가 깊었던 몇몇 트로주의자들이 생각난다. 하나같이 문약스럽고 비리비리한 인물들이었는데, ‘구라’와 ‘인간성’만큼은 감동적이었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책, 서점, 출판사 언저리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1985년>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빗대어 그 후의 세계를 그린 소설이라는데, 낯익은 오웰의 ‘언어학 사전’ 용어들과 빅브라더의 이름이 보인다.

김용학 선생의 <사회구조와 행위>(나남)도 챙겼다. 시카고대 출신의 이 명민한 사회학자는 어울리지 않게(?) 좌파인 캘리니코스의 <역사와 행위>(교보문고)를 번역 소개했었는데, 그 뒤에 써낸 책이 이 책이었을 것이다. 그 즈음 김교수가 <사회비평>이라는 잡지에 분석 맑시즘에 대한 글을 썼는데, 하마터면 나는 그 사람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할 뻔 했다. 대학시절 사회학과 대학원을 준비하던 한 여인이 이 책을 탐독하던 기억이 난다. 그녀를 따라 1-2장 쯤이나 읽었을까? ‘강 00 씨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드립니다’ 라는 저자의 헌사가 선명하다. 이 강모씨는 왜 이 책을 내다 팔았을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내가 봤던 것은 이 책의 초판(1985년)인데, 오늘 산 건 2001년에 나온 재판이다. 시인 최승자의 번역으로 유명했는데,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내 손으로 표지를 쌌던 책만해도 족히 30여권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손이 가질 않았다. 왜 있잖은가. 아무리 읽어도 선명은 커녕 점점 몽롱해지는 듯한 ‘정신주의’를 부추기는 책들. 이를테면, 카잔차키스의 <영혼으로 서리라>(청하), 류시화 류의 책들. 나는 아마 이 책을 사놓고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잃어버린 책을 다시 산 경우. 대학 1학년 즈음에 읽었다가 1년 뒤쯤 대학에 들어온, 지금은 게이가 된 후배 놈에게 <중국의 붉은별>, <전태일 평전>과 함께 선물로 줬을 것이다. 아마도 그 넘은 그 책들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녀석에게 이 따위 책들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선배라는 넘도 정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전사> 시리즈는 아마도 1-4권까지는 가지고 있었을 텐데,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은 2권 밖에 없다. 다시 펼쳐보니 송건호, 임종국, 유인호와 같은 돌아가신 분도 있고, 이 ‘빨갱이 책’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도 보인다. 그때 선배들이 분단과정을 다룬 김학준의 논문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현대사상사). 책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읽지는 않았었다. <WAY OF SEEING>으로 잘 알려진 존버거의 <영상커뮤니케이션과 사회>(나남)도 샀다. 내가 예전에 이 책을 갖고 있었던가, 아닌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런가. 대학시절에 존 버거를 아주 좋아하던 한 철학도가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는 책이다. 존 버거가 쓴 소설 <결혼을 향하여>도 벌써 몇 년 째 중간에서 읽다 만 채로 있다.  

 

박완서 선생의 <또 하나의 별을 노래하자>(문학사상사)는 세계사판 전집에서는 <도시의 흉년> 두권으로 묶였던 책. 학원강사 알바를 하던 시절, 유난히 책읽기를 좋아하던 여중생에게 빌려 줬는데, 그녀는 박완서 선생의 세계사판 <미망> 3권과 함께 이 책을 내게 돌려주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아마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도 했을 터인데, 말수가 적고 국어만 유난히 잘하던 그 여학생이 생각났다.

또하나의 구입목록은 우리로 치자면 대중소설과 본격소설 중간 어디쯤 되는 소설을 쓰는 명민한 작가 줄리안 반즈의 <10과 1/2로 쓴 세계사>. 반즈 소설은 집에 여럿 있었으나 ‘서재 이혼시키기’와 더불어 딴 곳으로 가고 말았다. 앤서니 기든스가 쓴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의 첫장은 반즈의 소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으로 시작한다. 성찰없는 욕망이 부르는 비극을 소재로 한 그 소설은 개인의 판단를 좌우했던 외적 준거가 사라진 시대의 윤리를 묻고 있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최인훈의 문학과 지성사판 전집 일부인 <크리스마스캐럴/가면고>. 그가 <화두>를 써냈을 무렵 갈현동 집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아주 신경질적이고 까탈스런 모습이었다. <광장>의 작가, <화두>의 소설가라는 신화는 그날 이후로 내게서 와장창 무너졌다.

소나무에서 나온 <제주민중항쟁>까지 포함하여 이 책들 전부의 가격은 1만9천원. 싸다, 싼 것이 이 책방의 미덕이다. 자유로를 달리면서 헌책방을 가는 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퇴행성 질병임을 새삼 절감했다. 더불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딜레탕트이자 스노비스트라는 것까지. 그런데, 가만, 스노비즘이라도 없다면 9 to 5의 삶에서 어찌 책 한권이라도 꺼낼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 스노비즘을 은밀히 나누고, 키들거리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사적 공동체라도 없으면, 얼마나 황막한 세계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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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5-06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갈피가 그런 곳이었군요 파주에는 헌책방들이 거기 말고도 또 있나요? 저는 신림동에 있는 걸 가 본 것이 고작이라.. 굉장히 저렴한 편인 거 같네요.

모든사이 2010-05-07 13:35   좋아요 0 | URL
파주출판단지의 헌책방은 어린이 책을 파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지나다 흘낏 본 것 말고는 들어가보질 않았으니 어떤 지는 잘 모르겠고요. 1994년 이 출판사의 대표가 구속되는 조직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죠. 기사를 찾아보니 23명이 구속되었었네요.

nashe 2010-05-0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촌의 "숨어있는책" 분점이 파주 단지에 있습니다. 파주단지내 중앙로(?)를 기준으로 했을 때 보물섬 있는 쪽이 아니라 그 건너편쪽에 있습니다. 자세한 위치는 포털 지도서비스에서 확인가능합니다. 숨어있는게 특기인 책(방)이라 근처에서 가서도 잘(!) 찾아야 합니다. 안쪽 길가에 있음에도 잘 안보입니다.

모든사이 2010-05-07 00:0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숨어있는 책이 헌책방 가운데에서 질과 양 모두에서 가장 훌륭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파주에도 있을 줄은 몰랐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거기도 들렀을 텐데..
 

2001년 7월에 쓴 글. 게시판에 흘러넘치는 감성의 물줄기를 식히기 위함.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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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되풀이되는 무더운 여름이지만, 이번 여름 독서가들의 서재는 시원해질 것 같다. 바로 장쾌하고 속시원한 혁명영웅들의 일대기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마르크스 평전’)과 정치(‘호치민 평전’,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 문화(‘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방면에서 실패한 혁명가의 장엄한 죽음(‘트로츠키 자서전 나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한국 출판계에서 흥행에 성공한 ‘체 게바라 동지’의 뒤를 이으려는 인물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출판사들은 먹구름이 덮인 장마철의 하늘과 역시 먹구름이 덮인 한국 독서시장을 헤치고 나갈 ‘영웅’들을 필요로 하는 듯하다.

이 ‘영웅’들의 위대한 삶은 한 권의 책에 담기는 순간 ‘영웅소설’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위인전과 전기류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겠지만, 더이상 이 ‘영웅’들의 삶과 같은 투쟁방식과 해법이 통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기묘한 ‘안정성’ 때문이기도 하다. 분명히 구조적․총체적으로 불안정하고 뒤틀려 있는 한국사회지만 이제는 아무도 “에라, 다 망해버려라”하고 외치지는 못한다. 불꽃같은 혁명의 꿈은 ‘경쟁력을 키워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 논리 앞에 무력해진 가운데, 다른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은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을 산다. 한때 세상을 바꾸었던 이들의 삶을 사서 소비한다. 이제 이들이 읽는 것은 ‘혁명의 지침서’가 아니라 ‘영웅소설’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비록 혁명의 껍데기이고 한 권의 영웅소설이라 할지라도, 꿈은 꾸지 않는 것보다 꾸는 것이 낫고 책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좋은 법. 기왕 혁명가들의 삶을 소비할 바에는 재미있게 읽어주는 것이 책에 대한 예의이리라. 그러면, ‘영웅소설’화된 영웅들의 삶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가장 정통적인 방법은 역시 영웅들의 삶에 몰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서자의 아들로 태어나 공산주의자가 되고, 활동 중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사람들을 슬픔에 빠뜨렸다가 불사조처럼 살아나 다시 활약한,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미국을 이겨낸 ‘호 아저씨’(호치민)의 삶을 함께 호흡할 수 있다. 아니면 “자본을 써 봤자 그것을 쓰느라고 피운 시가 값도 안 나올” 가난과 몰이해 속에 시달리면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상적 도약을 감행한 마르크스의 삶을 가슴을 조이며 읽을 수 있다. 문화대혁명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고, ‘주자파’라는 비난을 들어가면서 마침내 중국에 개혁개방 정책을 펼친 등소평의 일대기는 ‘삼국지’나 ‘수호지’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둘째, 한 걸음 물러나 이들의 삶을 인간적 시각에서 살피는 것이다. 큐비즘과 멕시코 민중의 생활을 결합시킨 혁명적 벽화를 그려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작품보다,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댔던 디에고 리베라 때문에 나이차가 훨씬 나는 세 번째 부인 프리다 칼로가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느껴보는 것이다. 술을 마시고 난장판을 피우는 젊은 마르크스의 모습, “귀족과 결혼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하녀를 임신시키고, 공산주의 하에서는 누가 구두를 닦느냐는 물음에 “당신이 닦으쇼!”하고 쏘아붙이는 열혈 혁명가의 모순된 삶에는 나름의 ‘인간적’인 재미가 있다. 등소평이 하방되었을 때의 독서목록을 들여다보거나, 감방 안에서 독서를 하며 “정말 기분이 좋아. 나는 여기에 앉아 일하고 있고, 그래서 아무도 나를 체포할 수 없다는 확신이 완벽하게 들기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트로츠키의 여유를 바라보는 것은, 감옥에 들어가면서 “공부하러 간다”고 말하던 7,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세째, ‘관계의 맥락적 재구성’을 통해 책을 읽는 재미. ‘호치민 평전’을 쓴 찰스 펜은 미 정보국(CIA)의 전신인 OSS에 근무하면서 호치민 주석과 직접 접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베트남의 지도자가 미국인 정보부원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는지 바라보는 것, 또한 등소평의 세째딸 등용이 철저히 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은 어떠한지, 제국주의 국가였던 프랑스의 문호 르 클레지오가 식민지의 예술가였던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에 대해 느끼고 쓰는 방식은 무엇일지를 관찰하는 것은 또다른 방식의 재미이다. 폭풍같은 변화와 혁명의 시대에 저명인물들은 어떻게 얽혀있었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호치민과 프랑스․소련의 공산주의자들, 트로츠키와 리베라-칼로 부부의 아슬아슬한 삼각관계 같은 것들은 그들을 둘러싼 신비로운 아우라를 벗겨내기도 하고 더 강화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나라 ‘운동권 정서’를 짚어보는 씁쓸한 재미가 있을 수 있다. 이제 무턱대고 ‘타도하라’고 외칠 수 없는 시기, 운동은 세계혁명의 위대한 꿈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자본은 생활 구석구석 침투해 있고 전복의 꿈은 대안이 없고 파괴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지금, 갈 데 없는 희망은 과거의 위대한 성공들의 순간에 돌아가 침잠한다. “고독하고, 도전적이며, 공격적이고, 철저히 개인주의적”이었던 디에고의 혁명과 같은 예술이 지금도 가능하다는 꿈을 꾸어볼 수 있다. 사실, ‘영웅소설’로서의 평전들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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