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담배 - 담배에 빠진 혹은 삐진 당신을 위한 정신분석 이야기
필립 그랭베르 지음, 김용기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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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충고에 대해 골초들이 흔히 드는 사례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다. 독한 시가를 피워대며 90세 넘어까지 살았으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애연가들은 1950년 이후 처칠이 물고 있는 시가에 불이 붙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기침이 너무 심해 담배를 끊었고, 늘 시가를 물고 있던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느라 처칠은 사진기자만 나타나면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애연가들이 또 하나 들 수 있는 사례는 정신분석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1865∼1945)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그 자신이 “입술 사이의 뜨거운 느낌”이라고 부른 시가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지냈다. 하루 20개비 이상의 시가를 피워댔고, 그 때문에 구강암 수술을 수차례 받았지만 입에서 시가가 떨어진 날은 많지 않았다. 24세때 담배를 처음 배워 억지로 빨래집게로 입을 벌리고 그 사이에 시가를 끼워 넣었던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지독한 골초였다.

‘프로이트와 담배’는 이 예민한 정신분석학자와 흡연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프로이트와 담배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는 전기 따위는 저자의 관심이 아니다. 그 자신이 흡연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저자 필립 그랭베르는 ‘담배’가 사실은 프로이트 이론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프로이트에 대한 정신분석을 행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시가는 시가일 뿐”이라며 흡연에 대한 과도한 해석을 경계하려 했지만 저자는 그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흡연자의 ‘무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는, ‘골초들에 대한 정신분석’인 셈이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유쾌한 입문서이자 새 해 첫달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금연 결심을 깨고 다시 담배를 꺼내든 이 땅의 수많은 흡연자들의 심리분석서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담배의 기원에 대한 시리아의 한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한 선지자가 독사에 물린 뒤 그 상처에 스민 독을 입으로 빨아내 땅에 뱉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풀이 자라 나중에 담배가 됐다는 얘기다.

담배는 “독처럼 쓰라리면서도 동시에 선지자의 침처럼 달콤한 것”, 쾌락과 위험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는 전언이다. 사형 직전의 사형수에게 최후의 위안물로 건네는 것도 바로 담배다. 그것은 죽음 직전의 쾌락이자 죽음을 향한 쾌락이다. 담배는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다. 흡연자들이 이것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자신의 폐를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담배를 꺼내들고 불을 붙이는 그들의 ‘무의식’에는 쾌락과 불안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을 터.

도대체 흡연자들은 왜 담배를 피우는 걸까. 프로이트 이론을 경유한 저자의 설명은 전형적인 프로이트적 해석이다. 정신발달의 초기인 구순기적 해석에 따르면 담배를 빠는 행위는 “예전에 엄마의 젖가슴을 탐하던, 내 입술로 포착했던 이 세계를 다 다시 소유할 것 같은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때 담배는 어머니 젖과 등가물이다. 그러므로 흡연자들은 아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지나는 ‘남근기’에도 이르지 못한 퇴행기의 유아다. 본능적 욕구가 그저 ‘싸는데’에 집중되는 항문기적 해석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는 행위로 설명된다. 이는 똥과 연결되는 흡연의 쾌락을 의미한다.

무수히 많은 영화에서 묘사되는 소설가의 신경질적인 담배 끄기를 상상해 보라. 그들의 정신적 발달은 아직 항문기에 고착돼 있다. 프로이트는 또 말한다. “자위는 인간의 본질적인 주요한 습관이자 원초적 욕구이고, 술·담배·모르핀은 그 대체물, 대용물”이라고. 그러면 담배는 남근이고, 흡연 행위는 마스터베이션? 담배를 꺼내 물고, 피우며 비벼끄는 단계는 흡연자에게 구강기에서 항문기·남근기까지를 순식간에 재경험하게 한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이 책을 금연협회쯤에서 펴내는 계몽도서로 착각하면 안된다. 저자는 소설적 묘사와 심리극 대본,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뒤쫓는 전기물의 형식을 엇갈리게 배치하면서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놓고 있다. 이 책은 술과 담배, 마약과 인터넷 등 모든 중독증 환자들에게 자기분석의 경험을 제공한다. 중독증 치유의 첫걸음은 자신이 왜 빠져 있는지를 아는데 있지 않는가. 담배는 ‘푸른 천사’이자 “욕망의, 잡힐 듯 끝내 잡히지 않는 대상”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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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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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문명’은 미국 외교와 정치문화에 깃들여 있는 ‘미국 정치의 정신사’를 탐색하는 저작이다. 그동안 미국 정치와 관련된 국내 저작들은 대부분 ‘선진적인 제도’라는 이유로 앞다투어 미국 선거제도와 정치행태를 소개해 왔다. 미국 외교사를 전공한 저자 권용립 교수는 이같은 행태가 “미국 정부를 선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한다. 그는 미국의 정치적 담론과 거기 스민 세계관·역사관을 해부하는 포괄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유럽 문화로부터 문명적 자양분을 공급받은 미국은 독립 이후 유럽이나 아시아와는 다른 길을 걸어 왔다. 프랑스 사상가 토크빌이 1830년대 잭슨 민주주의 시대에 미국을 여행한 뒤 펴낸 ‘미국의 민주주의’ 이후, 미국 연구가들이 취한 관점은 미국의 ‘예외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미국적 가치’도 그래서 생겨났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이 정의 내리고 있는 ‘자유’다. 저자는 “근대 영국이나 프랑스의 ‘자유’가 시간적 타자, 즉 과거에 저항하는 것이었다면 봉건제 같은 과거 유산이 없는 미국에서의 ‘자유’는 공간적 타자, 즉 미국의 외부나 미국의 적을 부정하고 또 징벌하는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미국이 왜 그토록 ‘불량국가’의 단죄에 집착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미국의 자유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의 타자’로서 존재한다.

저자가 취하고 있는 ‘정치문명’이라는 관점은 미국 정치의 이데올로기 분석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문명이란 “집단으로서의 미국을 미국이게끔 만드는 정신”으로 건국이래 현재까지도 관류하고 있는 미국의 집단정신을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 정치문명의 뿌리로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는 고대 공화주의, 개인의 자유에 집착하는 근대 자유주의,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칼뱅주의, 세가지를 지적한다.

이 세 담론이 뒤섞여 미국의 독특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만들어졌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서유럽 국가들이 그리스-로마 문명과 기독교 전통 속에서 서서히 근대국가의 기틀을 다져갔다면, 미국은 반대로 정치이념과 국가를 먼저 설계해 놓고 그 이후에 여러 인종을 받아들여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광신적 애국주의같은 미국인들의 독특한 정치적 응집력과 ‘미국은 특별한 나라’라는 신화, 외교상의 절대적 선악관념과 십자군적 사명감도 거기서 비롯한다.

미국의 대 이라크전이 임박해 있고,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이 책의 의미는 각별하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독선과 좌충우돌은 역사상의 돌출이 아니라 미국사 2백년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미국과 미국 정치의 뿌리를 만져보는 경험, 그게 이 책의 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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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충고 - 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김영희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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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가 자신의 역할모델로 삼고 있는 인물은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다. 리프먼은 민주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여론’이 기실 대중들의 주관적인 이미지이거나 정형화된 견해(stereo type)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진실과 뉴스는 동일하지 않다”고 믿는 그는 자신의 칼럼 ‘오늘과 내일’을 통해 사실 ‘너머’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김영희 대기자는 리프먼을 “복잡한 현상을 지성화하는 지적 능력의 소유자”로 평가한다. 얽히고설킨 사실들의 세계를 배회하며 ‘밀과 쭉정이’를 구분해내는 것, 그것이 리프먼의 에피고넨(아류)을 자처하는 김영희 대기자 스스로가 규정한 역할이다.

‘마키아벨리의 충고’는 현역 기자로 40여년의 세월을 보낸 국내 언론사의 1호 대기자 김영희 대기자의 칼럼집이다. 1998년 5월부터 매주 수요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됐던 ‘투데이’ 칼럼을 모은 것이다. 한국 근대사 1백년이 늘 그랬듯이 그의 칼럼이 연재됐던 5년여 세월도 유난히 험난했다. 그 세월동안 그는 권력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정치권력의 도덕성 부재를 질타하고, 국제현실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해 왔다. 그의 칼럼은 “정치적 냉소주의를 자극하는 좁쌀정치”에 보내는 일침이다. 그는 스스로 마키아벨리가 되어 정치인에게 “여우의 간지와 사자의 용맹”을 촉구한다.  


김영희 대기자의 칼럼은 국제정치적 시야에서 국내문제를 다룰 때 가장 빛이 난다. 그의 리얼리즘이 가장 뛰어난 예지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그에게 성급한 이상론과 낙관론은 회의와 경계의 대상이다. 그는 미·일·중·러의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여전히 분단의 장벽이 드높은 한반도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현실감각이라고 본다. 가령, 그는 햇볕정책에 대해 “남북문제는 남북끼리 푸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냉전 이후 슈퍼 파워로 홀로 남은 미국과의 협조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지적한다. 설사 민족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을지언정,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눈으로 한반도의 현실을 가리킨다.  

 

그의 리얼리즘은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한다.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숲을 보면서 나무를 다투라”는 그의 훈수는 국제적 현실감각을 키우라는 주문이다. 그의 시각은 국제정치를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정의된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정의한 현실주의 정치학자 한스 모겐소의 그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역사는 해결가능한 문제만을 인간에게 던져준다면, 김영희 대기자의 글은 바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현실적 조건’을 꼼꼼히 따지는 일에 다름아닐 것이다. 그게 바로 이 노회한 리얼리스트의 시각이 갖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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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참 우리 고전 5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 / 돌베개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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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다리의 학과 검은 깃의 까마귀가 제각기 자기 천분을 지키며 사는 격이며, 우물 안 개구리와 작은 나뭇가지 위 뱁새가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양 으스대며 사는 꼴이다.” 18세기의 지식인 박지원은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주자학에 대한 숭배에 빠져 스스로 정체(停滯)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선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그와 동시대의 지식인 박제가는 이같은 비판을 넘어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방법을 제시한다.조선후기 실학사상의 명저로 널리 알려진 박제가의 ‘북학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도모할 세목들이 무엇인가를 꼼꼼하게 따지고 있는 ‘조선사회 개혁론’이다. 박제가는 서문에서 “이용과 후생 가운데 한가지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위로 정덕을 해치는 폐단을 낳게 된다”고 말한다. 이용과 후생보다 ‘정덕’(正德)을 근본으로 보았던 조선사회 주류 전통을 부정하고, 이용과 후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이단적 주장이다. 이같은 박제가의 ‘개혁론’은 ‘북학의’를 구성하는 ‘내편’과 ‘외편’, ‘진소본 북학의’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내편’은 중국문명의 이기(利器)들을 조선인의 시각으로 관찰한 기록이다. 수레와 배, 벽돌과 기와, 자기와 주택, 창호, 교량, 목축, 소, 목재, 철, 화폐 등 중국문명의 기저를 이루는 생활 필수품의 목록과 이들의 쓰임새, 생산과정에 대해 거의 르포작가에 버금갈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외편’은 일종의 개혁의 구체적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밭을 개량하고 거름을 만드는 ‘농업이론’에서부터 농업과 잠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책략, 과거제도 개혁론, 중국과의 통상외교, 군사론 등을 펼치고 있다.

개혁사상가로서 박제가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마지막 편인 ‘진소본 북학의’ 역시 임금께 올리는 상소문과 함께 개혁의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조선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던 양반의 도태까지 서슴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세계화의 진전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18세기 사상가의 급진개혁·개방론을 읽는 맛은 각별하다. 박제가가 제시한 근대개혁론이 조선사회에 수용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 더 실감나는 것은 그의 주장이 갖는 현재성이다.

그는 경이의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봤지만, 그것을 당대 조선사회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개혁의 정신으로 바꿀 줄 알았다. “만나기 어려운 것은 성스런 군주이고, 아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눈앞에 닥친 절호의 기회입니다.(…중략)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힘을 다하여 국력을 키우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라도 발생할 때 우리도 더불어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직책을 맡은 신하가 태평성대를 아름답게 꾸밀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그것을 염려합니다.” 그의 염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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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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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 전인권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전기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자다. 그는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한국문화의 구조적 특징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던 중 “한국은 무슨 한국이냐, 먼저 너 자신의 꼬라지나 정확히 알아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자란 그 자신이 벌써 한국적이요, 권위적인 인간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한국문화의 구조적 특징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접고 자신의 내면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탄생’은 이렇게 해서 쓰인 한 정치학자의 치열한 자기탐구서다. 5세부터 12세까지의 유년기를 통해 한국 남자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핀 독특한 저작이다. 사회과학이 주관적 경험을 배제하고 객관세계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분야라면, 이 책은 그런 사회과학의 전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정 개인의 주관적 경험 분석을 통해 한국문화 전체를 조명하려는 시도로는 아마 이 책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남자의 탄생’은 개념과 이론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도표와 수치로 포장하지 않아도 뛰어난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아버지는 가장의 의무와 책임감을 가진 존재이자 가정내 질서의 근원이었다. 아버지와 자식간에는 엄격한 상하의 질서가 지배했다.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서 제 얼굴을 잊어버린 채 살아야 했다. 전교수 가족의 사례는 한국의 평균적인 가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국가가 확대된 가족[國家]으로 받아들여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 전교수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국가와 세계질서의 대변자였다.  

 

어머니는 그 질서에 복속된 존재로 남편과 자식들에게 제 정체성을 의탁한 존재에 불과했다. 저자는 196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의 경험은 바로 한국인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같은 가족질서는 학교·회사·군대 등 한국 사회를 이루는 여러 집단 속에서 발현되고 있다. 한 가족의 이야기는 결국 한 국가와 사회의 구조와 문화로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저자는 스스로를 ‘동굴속 황제’라고 부른다. 입으로는 민주주의와 진보·자유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봉건적 권위와 신분질서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동굴속 황제의 습성을 버릴 때 비로소 자신의 가족이 행복해지며, 나아가 한 사회에 민주적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네 아버지를 살해하라”는 말로 정리한다. 물론 이는 아버지에 대한 ‘상징적 살해’다. 전교수의 저작은 한국 사회가 경험해왔던 ‘문화코드’의 저류를 추적함으로써 앞으로 지향해야 할 새로운 민주적 질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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