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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평점 :
책읽기가 쉽지 않다. 더위 탓인가.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은 고종석의 신간 <독고준>(새움)과 이사벨 아옌데의 <에바 루나>(한길사). 아옌데의 소설은 10년도 전에 읽은 것이지만, 부실한 기억 탓에 다시 읽어도 새롭다. 이 책을 구해준 어떤 ‘외로운 사내’에게 남은 복이 있을 진저. 고종석의 책은 영풍에서 ‘신간 사재기’를 하다 덤으로 샀다.
<독고준>은 소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소설이 일정한 서사를 가진 양식이라고 정의했을 때 말이다. 이렇다할 줄거리 없이 최인훈 소설 속 주인공의 나머지 생을 고종석 식으로 연장, 재현한 것이다. 주인공 독고준은 고종석 자신의 자기투영으로 보인다. ‘회색인’이라는 이념적 위치도 그러하거니와 이 책에서 숱하게 보이는 ‘교양체험’의 빛깔과 내용도 영락없는 고종석이다. 그러니 이 책은 고종석의 뛰어난 소설(<엘리야의 제야>같은)보다는 저널에 연재했던 글모음들, 가령 <코드훔치기>나 <여자들>과 같은 책들과 가족유사성이 있다. 내러티브의 전개가 주는 흥미가 아니라 고종석의 교양을 따라가면서, 단속적인 일기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인물, 책에 대한 그의 사유를 엿보는 게 재미다.
고종석의 위치는 굳이 구분하자면 중도좌파 쯤 될 것 같다. 서구적 기준으로는 자유주의자일 것이나 한국적 기준에서는 좌파적 사유에 대한 공감과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전폭적 지지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좌파에 대한 애정과 경사가 두드러지고, 공산주의를 비롯한 집단적 이념에 대해서는 대단히 냉소적이다. 그러면서도 김현과 복거일에 대한 애정이 표나게 도드라지고 서구, 그것도 유럽 지식인의 동향과 사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수자에 대한 편애와 집단적 가치에 대한 냉소.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한 한편의 호감과 싸늘한 평가는 이 책에서도 산견된다. 곳곳에 산재된 그의 시 해석과 감상은 화사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충분한 공감을 얻고 있다. 시에 대한 그의 해석과 비평은 넘치고 부족함이 없어 질투가 날 정도다.
고종석은 최인훈의 소설 속 인물 독고준을 빌어, 그리고 독고준의 딸인 문학평론가 독고원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교양과 사유를 말하고 있다. 자기의, 자기에 대한 말하기(독고준의 일기). 그리고 그 자기에 대한 또 다른 자기의 말하기(아버지 독고준의 일기에 대한 독고원의 주석). 이 의도된 자기분열적 글쓰기는 두 겹의 자기성찰을 꾀한 것이겠지만, 고종석 식의 ‘구라’를 풀기 위한 방법적 장치이리라. 교양체험의 직접적 노출이 주는 적나라함을 감추기 위한 형식적 장치 같은 것. 그렇다고, 이 책이 나쁜 소설이거나 읽을만한 게 못되는 건 아니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지식세계에 대한 조망을 획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공감이 안가는 대목도 많다. 복거일에 대한 그의 존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복씨는 자유주의적 신념이 지나쳐 거의 맹목적 수준일 경우가 많다. 김현 보다 뛰어나지만 저평가된 김인환에 대한 높은 평가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 김인환이 특정 에콜에 속해 있지 않은데다 서울대가 지배하는 평론계에 드문 ‘고대’ 출신이어서 그럴 것이다. 독고준의 딸은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유종호 선생의 제자로 그려지는데, 그것도 좀 뜨악한 설정이다. 고종석은 문학평론가로서의 유종호 선생을 주목한 듯한데, 유선생의 최근 칼럼은 거의 조갑제와 동일한 수준이다. 문학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이 다른 사안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선생의 글은 보여준다. 하기야 고종석은 조중동을 보지 않는다니 동아에 가끔 실리는 유선생 칼럼의 극보수성을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고종석이 잡식성 독서를 통해 보여주는 통찰은 그 의외성으로 하여 반짝거린다. 민주화는 자유주의자가 좌파에 빚진 것이 아니라, 좌파가 자유주의자들에게 빚진 것이라는 인식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그렇다. 한국의 좌파는 민주화에 일정하게 기여한 바가 있으나 그것은 기껏해야 모험주의적 극단이거나 지적 마스터베이션을 실천한데 지나지 않았다. 민주화의 실질적 동력은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나온 게 맞다. 전대협이나 사노맹은 민주적 가치를 체현한 집단이기는커녕 자기도취적 행각을 되풀이한 19세기적 집단이었다. 이쯤 되면 고종석의 정치적 위상은 민주당 좌파거나 진보신당 우파 정도 될 것 같다.
덮고 나니 문예중앙에 실린 한민선(실존하는 시인인지, 허구의 인물인지 모르겠다)의 시를 평하면서 끄집어낸 ‘감정의 서민’이라는 말이 줄곧 머리에 맴돈다. 부자가 아닌 서민이니 참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서정을 가진 사람이란 얘긴데, 끊임없는 감정의 ‘복지혜택’을 받아야 겨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 것인가. 감정을 국가가 채워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친서민 정책이 난무하는 이 세월에도 나같은 감정의 서민은 계속 서민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옌데의 <에바 루나>. 마음이 가난한 한 때 아옌데의 풍성한 수다를 읽으며 허기를 달랬었는데, 올 여름에는 그조차도 쉽지 않다.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조로>, <파울라>로 이어지는 일련의 아옌데 소설은 언제나 매혹적이었다. 역사와 신화, 여성과 주술, 인종주의적 다양성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이 남미식 ‘벽화’는 쫀쫀하고 왜소한 요즘 한국소설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아옌데는 다시 읽은 이 소설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이 가진 매혹의 비밀은 무엇일까. 제임슨이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만들어내는 설화적 서사의 매력도 있을 것이고, 인물들의 개성이 펄펄 살아 있는 풍성한 상상도 한 몫 할 것이다.
아옌데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그렇지만 이 소설에도 분방하기 그지없는 섹스와 불온한 열정들이 등장한다. 근친 혹은 근친에 가까운 섹스, 모든 것을 파국으로 몰고가는 사랑과 축축한 욕망.(왜 아옌데 소설에서 섬세하고 애정어린 섹스의 제공자는 항상 아시아나 아랍과 같은 백인 사회의 소수자일까.) 마르케스의 소설 속에 나오는 '부엔디아' 가문도 그렇지만, 남미소설들에서 보여지는 금기를 슬쩍슬쩍 넘어서고 광기와 정상을 오가는 위반의 열정들이 흥미롭다. 대통령 선거에까지 출마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 같은 소설들. 여성의 엉덩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은 변태적 욕망으로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욕망이자 생의 환희다.
확실히 내 취향은 역사적 변동기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취향이다. 판타지와 같은 장르소설의 반리얼리즘은 확실히 아니다. 현실과 역사가 부재한 완미한 단편도 그리 탐탁치 않다. 어느 모로 보나 내 독서관습은 아주 보수적인 셈이다. 누군가는 그런 구식 취향을 욕하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쌓아온 훈련과 관습이 그러한 것을, 좋아하는 소설만을 읽어도 모자랄 정도로 세상엔 읽을 책도 많은 것을, 그냥 이런 소설들이나 읽으면서 늙어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