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벨벳 애무하기’(tipping the velvet)는 여성 성기를 쓰다듬는 레즈비언들의 은어. 사라 워터스의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한 여성 레즈비언의 人生流轉이다. 아니 빅토리아 시대라는 왕조적 배경보다는 차라리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쓰여진 시대(1867, 1885, 1894)라 하는 것이 더 합당할 듯 하다. 19세기 말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빈곤과 계급갈등을 배경으로,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사회주의에 이르는가를 한 여성의 곡절 많은 인생에 담아낸다.   


줄거리 : 굴 원산지로 유명한 윗스터블 출신 낸시 애쉴리는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남장 여성 키티 버틀러를 사랑한다. 여기까지는 10대 후반 사춘기 소녀들이 흔히 보여주는 레즈비언 취향과 유사. 그녀는 키티와 함께 런던에서 지내면서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며 ‘커밍아웃’ 하게 되고 그녀와 더불어 진한 성적 탐닉에 빠져들게 된다. 키티가 양성애자라는 것을 알고 파국에 이른 뒤, 거리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성을 연기하며 남창 생활을 하다가 레즈비언 귀족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다. 이후 사회주의자여성과 사랑을 하게 되고, 당대 영국사회에 대한 계급적 각성에 이르게 된다. 이 각성과정은 이와 유사한 계급적 자각의 과정이 전형적으로 그렇듯이 ‘확신에 찬 대중연설’로 절정에 이르고, 헐리웃 엔딩처럼 연인과의 결합과 화해의 키스로 마감한다.

이 소설의 레즈비어니즘은 페미니즘, 그리고 더 두드러지게는 사회주의와 행복하게 결합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 : “그리고 이게 (레즈비언 섹스가) 정말 사회주의 혁명에 기여를 할까요?” 엉덩이를 움직이며 내가 말했다. “오 그럼요!”, 나는 꿈틀거리며 좀더 아랫부분으로 내려갔다. “그럼 이런 것도요?” “오 분명해요” 나는 시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오” “맙소사” 내가 말했다. “몇 년째 사회주의자들의 음모에 가담하고 있으면서 전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벨벳 애무하기”는 레즈비언 섹스에 대한 노골적 비유이면서 혁명의 과정이자 여성적 연대의 구체적 현현(epiphany)이다. 가히 ‘섹스는 혁명이다’라는 68혁명적 사고의 재현.

내 기억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존재론적 전이과정은 매우 전투적이고 엄숙주의적이었다. 세계를 구원하는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주체적 각성 과정에 어찌 섹스 따위가 끼어들 수 있었으랴. (가령, 김정환의 ‘기차’라는 비유가 보여주는 엄숙주의!) 이 소설은 섹스의 은밀한 쾌락과 사회주의 혁명의 열정적 의지를 뒤섞어 부드러운 쾌락의 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소설을 읽는 과정이 ‘불편’하지 않았던 까닭도 이런 '마사지'에 있었을 것. 레즈비언을 소재로 했다는 점도 마찬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전형적인 남성서사이기 때문이다. 상류층 레즈비언들의 ‘할렘’에서 보이는 ‘폭력적 레즈비언 섹스’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섹스와 사뭇 대조적인데, 이는 그 섹스가 ‘남성적 섹스’의 변형(딜도)인 까닭이다.

Eleanor Marx, the youngest daughter of Marx
19세기 말의 런던은 확실히 새로운 욕망과 정치가 들끓던 혁명과 열망의 공간. 여주인공과 그녀의 여성 애인을 런던에 데려간 매니저는 런던을 ‘다양성’이 충만한 곳이라 자랑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이 레즈비언 소설이자 성적 정체성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셈인데, 과연 소설속의 런던은 귀족과 노동자, 레즈비언과 게이, 도시빈민과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이 공존한다. 주인공은 런던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수직으로 오가며 ‘몸으로’ 런던의 삶을 살아낸다. 당대 영국의 비판적 지식인들도 역사적 삽화로서 등장한다. 엘레노어 마르크스를 비롯해 시드니 웹과 같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월터 휘트먼과 같은 시인 등 익숙한 이름도 여럿이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읽으면 열광할 만한 대목들. 여성적 정체성, 성의 정치학 : 지배와 복종, 젠더와 계급, sisterhood, 여성적 주체의 ‘말하기’ 등. 특히, 주인공 낸시가 성적 정체성을 경유하여 계급적 각성에 이르면서 “자신의 언어”을 찾게 되는 대목은 여성-레즈비언이라는 ‘하위주체’의 자각과 주체화(말하기)의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변화의 과정은 다소 감상적인 문체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시퀀스의 이음매가 꽤나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요컨대, 공학적으로 잘만들어진 소설인 셈.

해설에 따르면, 저자 사라 워터스는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 소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소설을 처녀작으로 <끌림affinity>, <핑거스미스fingersmith>등의 작품을 썼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세기를 사랑했으며, 레즈비언까지는 아니더라도 페미니스트임에는 분명하다. 인생유전에 집착하는 걸 보니 19세기 소설에도 탐닉했으리라.

떠오르는 잡상들 : 나는 왜 게이보다 레즈비언이 좋을까 : 내가 생물학적으로나 성적으로나 ‘남자’이기 때문? 영국의 사회민주연맹(SDF)에 대한 궁금증 : 윌리엄 모리스와 엘레노어 마르크스의 동시참여?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 : 공연예술과 동성애의 친화성, 몸에 대한 숭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꾸역꾸역 고종석의 책을 읽어왔다. 그가 처음 낸 <기자들>부터 이 <여자들>까지. 그중에는 실망스러운 글도 있었고(가령, 코드훔치기, 이건 지나치게 신문연재용이라는 티를 낸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도 있다. 그의 가장 좋은 글들은 ‘언어’를 제나름으로 해석하는 데 있다. 그의 호사취미와 인문적 배경,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관심 탓이리라.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 바로 그것. 나는 그것을 후다닥 탐독하고는 술자리 어디선가, 잃어버렸다. 그때 잃어버린 고종석의 ‘사랑의 말’들은 술집 어느 구석에서 알콜을 뒤집어 쓰다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가버렸을 터.  

 

고종석이 편애해 마지않는 여자들의 목록은 예상을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여자들은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자가 포용하는 범위 내에 있다.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한국적 의미가 아닌 보편적 의미의 그것이고, 동시에 진보적 사유의 ‘안쪽’에 있다. 오른쪽으로는 복거일과 김현으로부터 왼쪽으로는 심상정과 로자 룩셈부르크에 이르지만, 오른편에 위치한 사람보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나는 그의 자유주의가 맘에 들고 마음 편하지만, 노무현과 김대중을 향할 때 표나게 보이는 냉소적 비판은 불편하다. 그럴 때 그의 자유주의는 돌연 진보적이 되는데, 그가 신자유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억압과 착취를 혐오하는 ‘호모사피엔스’여서이기도 하다. 

 

그는 마더 테레사에 대해 쓰면서 스탕달의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사는 일은 내게 영원한 고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그의 사유가 가진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기도 하다. 그는 인문적 사유를 사랑하는 지식인의 자리에 서 있다. 그 ‘거리감각’이 그의 글을 편안하게 만든다. 김철이 말했듯이 그는 우파보다 더 우파같고, 좌파보다 더 좌파같은 유연함과 활달함을 보여준다.   

 

 

스탕달에 공감하는 그에게 편애하는 여자의 상당수가 ‘좌파’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첫머리의 로자부터, 라 파시오나리아, 아룬다티 로이, 콜론타이, 마리 블롱도, 로자 파크스, 죠피 숄, 클라라 체트킨, 시몬느 베이유까지. 물론 이중 로이나 베이유처럼 좌우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한 인물도 있다. 동시에, 열정과 격정, 성적 욕망과 팜프파탈적 기질을 가진 여자에 대한 매혹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화, 프랑수아즈 지루, 갈라, 사포, 니콜 게랭, 오리아나 팔라치 등. 하지만 고종석은 레니 리펜슈탈이나 마거릿 대처같은 우파적 열정은 사랑하지 않는다.  새된 목소리의 좌파 선동가부터 격정적인 욕망과 섹스의 화신까지,  남자의 욕망은 여자의 열정앞에 언제나 맥없이 무릎을 꿇지 않던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성 2010-0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디어 쓰기 시작했구랴. 근데 너무 한꺼번에 확 올린 거 아니우?
글 올리는 텀이 일정해야 손님들이 많이 찾습디다
그만큼 부지런히 쓰겠다는 각오로 봐도 되는 거죠?
어쨌든 축하하며 새해에는 더욱 건필하시길!

참, http://sheshe.tistory.com 이라고 들어가 보세요
글 좋습니다

트레바리 2011-07-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게 고종석 선생은 <국어의 풍경들> <감염된 언어> <언문세설>의 고종석 선생입니다. 어떤 국어학자나 언어학자도 닮게 쓰기 어려운 명쾌하고 재밌는 언어사랑의 글들이라고 생각해서요..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에서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를 아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두 연인의 서한집 원문이 어떤 언어로 돼있는지 몰라도 선생이 새로 번역해주신다면 더 좋겠다 싶기도 하더군요.. 이번에 읽어본 <여자들>에서는 '최진실' 편을 가장 인상깊게 읽고 공감했습니다. 딴 여자들은 대개 잘 모르는 님들이라서 더 그랬지만(^^;), 한 편의 절실한 '제망매가'를 읽은 기분이더군요. <제망매>에서 망매 '지원'의 이미지도 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암튼 본인의 누이 콤플렉스를 직접 고백한 양반이기도 하니, 책 제목을 차라리 <누이들>로 하지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모든사이 2011-07-25 09:54   좋아요 0 | URL
누이컴플렉스는 아마, 김현이 고은의 초기 시를 비평하면서 나온 말인 것으로 기억나는 데요. 님 지적대로, 고종석의 경우에는 그것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고종석에게 '여자'는 성적 대상이라기 보다, 친밀함의 대상에 가깝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성적 매력으로도 열려 있지만,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않는, 말하자면 프렌치 키스로 가기 직전의 키스 같다고나 할까요..

트레바리 2011-07-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게 표현하시니 <제망매>의 키스씬이 바로 그랬던 것 같네요..^^ 여사촌이 '아이스크림맛'이 난다고 그러던.. 다시 생각해 보니 '누이컴플렉스'는 고선생 본인이 직접 말한건 아니고, 말씀하신 김현 선생을 인유해서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던 듯 하네요..(선생이 여러 누이들 사이에서 자랐고, '제망매가'를 좋아하면서 '누이'가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고, 또 누이같다는 연예인 허영란씨 팬인 것 등을 종합해서요..) 암튼 '누이'에게서 일종의 '久遠의 女像'을 보는건 미당이나 고은이나 고선생이나 비슷하군요..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조 임금인 광해군이 초시와 복시를 거쳐 올라온 서른세명의 과거 합격자에게 "지금 당장 시급하게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왕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국왕이 몸소 출제한 '책문'이다. 서른 여섯살의 임숙영은 답안지격인 '대책'에서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 일갈하며 왕에게 자만을 경계하고 겸양의 도리를 배우라고 증언한다. 그의 대책문을 읽고 진노한 광해군은 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영의정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이 부당하다며 간언하자 결국 명을 철회하고 만다.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라는 부제가 붙은 '책문'은 조선시대 왕과 신하의 문답을 담은 흥미로운 책이다. 왕이 과거에 합격한 신진 기예들에게 국가 경영의 방도를 묻고 초야에서 학문을 연마한 응시자들은 유교 경전과 역사적 사례를 들어 나름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 책은 왕이 출제했던 13개의 대표적인 책문과 함께 그 책문에 응답한 가장 뛰어난 대책을 함께 싣고 있다. 엮은이는 "책문은 젊고 싱싱한 넋을 가진 지식인이 시대의 부름에 대답하는 주체적 결단의 절규"라고 말한다. 국개 정치에서 실정을 거듭했던 광해군에게 임숙영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주장을 편 것이다.

책에 수록된 책문과 대책은 당대에 대한 절절한 시대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정벌이냐 화친이냐"는 책문을 내놓고, 박광전은 이에 "정벌은 힘, 화친은 형세에 달려 있다"고 대답한다.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세종의 물음에 성삼문과 신숙주, 이석형은 각기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술의 폐해를 논하라"는 중종의 책문 역시 당대의 술문화에 지극히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모든 책문이 심각한 것은 아니다. 광해군이 내놓은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다소 감상적인 책문에 대해 이명한은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역사의 기록도 믿을 수 없고, 인생은 부싯돌처럼 짧습니다"라는 '서정적인' 대책을 내놓는다.

엮은이는 과거 합격자들이 내놓은 대책을 일컬어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려는 시대의식의 투영"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이런 평가가 과장된 것은 아니다. 죽기를 무릅쓰고 써 내려간 젊은 지식인들의 글은 기개가 퍼렇게 살아 있다.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유교 경전에 통달한 선비들의 문장에서는 현대의 현란한 문장이 따라잡을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미덕 중 하나는 책문과 대책에 뒤이어 나오는 엮은이의 주석이다. 한학자인 엮은이 김태완은 왕과 신하가 머리를 맞대고 고뇌하는 장면의 전후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 숨쉬는 미국역사 - 박보균 기자의 미국사 현장 리포트
박보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미국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은 62만 명이다. 1, 2차대전을 비롯해 한국전과 베트남전 등 미국이 참전했던 전쟁에서 사망한 미군 전체보다 많다. 전쟁이 끝난 지 1백40여 년이 지났지만 이 전쟁은 아직도 미국에 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수도였던 리치먼드에는 전쟁 종료 1백38년 후에야 링컨 동상이 세워졌다.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링컨은 남부에서는 아직도 푸대접이다.

리치먼드 시민들은 “링컨이 우리 선조들에게 했던 그 파괴적 행동을 용서할 수 없다”며 동상 건립 반대시위를 벌였다. 링컨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의 국민적 통합을 이끌었다는 세계사의 ‘상식’과는 다소 어긋난 반응이다. 중앙일보 박보균 기자가 쓴 ‘살아 숨쉬는 미국 역사’는 거시적인 시야로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 미국사의 현장을 보여준다.

남북전쟁을 북군의 승리로 이끈 게티즈버그 전투 1백40주년 재연 행사에 참가해 역사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실감한다. 인종 차별의 역사를 찾아 KKK단의 근거지인 인구 8천 명의 시골도시 테네시주 풀라스키를 방문하기도 했다. 백인에 대항해 싸운 인디언 영웅 크레이지 호스의 흔적을 찾아 미 중서부의 사우스다코타주도 돌아보았다. 생생한 현재의 역사를 통해 과거를 설명한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만들어내는 현대 미국의 복합적 실상을 포착해내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미 버지니아주 애포머톡스 재판소는 1865년 남군이 북군에 항복 조인식을 가졌던 곳이다. 이곳을 방문한 저자는 의외의 풍경에 놀라고 만다. 이 역사적인 장소에는 “이곳 애포머톡스 재판소의 한때 조용했던 길거리 위에서 리(남군 사령관)와 그랜트(북군 사령관), 그리고 그들의 피곤한 군대는 미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를 연출했다”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전쟁 승리의 위대함이나 승자의 환호는 없었다. 팸플릿에는 ‘나라가 다시 합쳐진 곳’이라 쓰여 있을 뿐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남부연합의 대통령이나 최고사령관 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저자는 이 장면에서 미국이 가진 ‘관용의 미덕’을 본다.

이 책의 또 다른 진가는 한국 근대사와 미국사의 접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3부는 ‘미국 속에 살아 숨쉬는 대한제국’을 담고 있다. 저자는 조선의 망국을 결정한 포츠머스 조약의 현장에서 대한제국의 흔적을 좇는다. 저자는 그곳을 방문한 ‘첫 번째 한국 기자’였다. 워싱턴에는 대한제국의 유일한 해외 공사관 건물인 ‘대조선 주미 화성돈 공사관’이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버티고 있었다. 이 책은 곳곳에서 발로 뛰어 쓴 역사 탐방기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저자의 다리품 팔기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2003년 초부터 1년간 미 전역을 누볐던 저자의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 - 인간 본성의 근원을 찾아서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김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야생동물 중 뱀만큼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다 주는 동물도 드물다. 누구나 뱀을 보면 두려움에 떨게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연구소에서 사육된 침팬지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인다. 침팬지는 5백만 년 전 원시인류와 공통 조상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동물이다. 저명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뱀에 관한 인간의 공포는 ‘학습된’ 것이 아니라 유전자 안에 내재돼 있다고 말한다. 먼 옛날 자연상태에서 살았던 인간은 야생의 동식물들과 접촉하며 그들에 관한 기억을 유전자에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윌슨은 ‘유전자 결정론’으로 세계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생물학자다. 그의 에세이를 번역한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는 사회생물학의 세계를 좀더 쉽고 친근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여기서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인간 본성’(human nature)과 ‘자연’(nature)이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나 윤리·종교와 같은 정신적 영역들도 동물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결과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이 조금 더 다른 존재라고 치켜올리는 대신 ‘인간은 곧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류는 약 1백60만 년 전 두 다리로 걸어 다니고 양 손을 자유롭게 쓰게 됐다. 도구와 문자를 만들어내면서 오늘날의 첨단 문명까지 만들어냈다. 이처럼 인간의 문명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해왔지만 유전자는 거의 변함이 없다. 그래서 윌슨은 인간의 본성은 구석기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유전자는 문화만큼은 아니지만 비교적 빠른 속도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많은 유전자의 조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저자는 인간의 본성이 바뀌려면 대략 1백 세대 아니 1천 세대 이상 걸린다고 본다. 그가 현대인의 본성이 구석기 수렵채집 시대의 산물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록 인간의 행동이 복잡하고 지능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문화를 적응시켜온 생활방식은 원시적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인간과 인척관계에 있는 침팬지나 긴팔원숭이의 행동을 분석해보는 게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 유전자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보는 것은 사회생물학에 대한 오해다. “유전자가 명령하는 것은 특정 행동이 아니라 어떤 행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간은 자연상태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미 지구상의 생물종 20%를 멸종시켰다. 이것은 자연의 일부이자 동물인 인간 자신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수렵채집 시대의 기억을 유전자에 품고 있는 인간에게 주고 싶은 저자의 경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