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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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꾸역꾸역 고종석의 책을 읽어왔다. 그가 처음 낸 <기자들>부터 이 <여자들>까지. 그중에는 실망스러운 글도 있었고(가령, 코드훔치기, 이건 지나치게 신문연재용이라는 티를 낸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도 있다. 그의 가장 좋은 글들은 ‘언어’를 제나름으로 해석하는 데 있다. 그의 호사취미와 인문적 배경,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관심 탓이리라.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 바로 그것. 나는 그것을 후다닥 탐독하고는 술자리 어디선가, 잃어버렸다. 그때 잃어버린 고종석의 ‘사랑의 말’들은 술집 어느 구석에서 알콜을 뒤집어 쓰다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가버렸을 터.  

 

고종석이 편애해 마지않는 여자들의 목록은 예상을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여자들은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자가 포용하는 범위 내에 있다.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한국적 의미가 아닌 보편적 의미의 그것이고, 동시에 진보적 사유의 ‘안쪽’에 있다. 오른쪽으로는 복거일과 김현으로부터 왼쪽으로는 심상정과 로자 룩셈부르크에 이르지만, 오른편에 위치한 사람보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나는 그의 자유주의가 맘에 들고 마음 편하지만, 노무현과 김대중을 향할 때 표나게 보이는 냉소적 비판은 불편하다. 그럴 때 그의 자유주의는 돌연 진보적이 되는데, 그가 신자유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억압과 착취를 혐오하는 ‘호모사피엔스’여서이기도 하다. 

 

그는 마더 테레사에 대해 쓰면서 스탕달의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사는 일은 내게 영원한 고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그의 사유가 가진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기도 하다. 그는 인문적 사유를 사랑하는 지식인의 자리에 서 있다. 그 ‘거리감각’이 그의 글을 편안하게 만든다. 김철이 말했듯이 그는 우파보다 더 우파같고, 좌파보다 더 좌파같은 유연함과 활달함을 보여준다.   

 

 

스탕달에 공감하는 그에게 편애하는 여자의 상당수가 ‘좌파’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첫머리의 로자부터, 라 파시오나리아, 아룬다티 로이, 콜론타이, 마리 블롱도, 로자 파크스, 죠피 숄, 클라라 체트킨, 시몬느 베이유까지. 물론 이중 로이나 베이유처럼 좌우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한 인물도 있다. 동시에, 열정과 격정, 성적 욕망과 팜프파탈적 기질을 가진 여자에 대한 매혹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화, 프랑수아즈 지루, 갈라, 사포, 니콜 게랭, 오리아나 팔라치 등. 하지만 고종석은 레니 리펜슈탈이나 마거릿 대처같은 우파적 열정은 사랑하지 않는다.  새된 목소리의 좌파 선동가부터 격정적인 욕망과 섹스의 화신까지,  남자의 욕망은 여자의 열정앞에 언제나 맥없이 무릎을 꿇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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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디어 쓰기 시작했구랴. 근데 너무 한꺼번에 확 올린 거 아니우?
글 올리는 텀이 일정해야 손님들이 많이 찾습디다
그만큼 부지런히 쓰겠다는 각오로 봐도 되는 거죠?
어쨌든 축하하며 새해에는 더욱 건필하시길!

참, http://sheshe.tistory.com 이라고 들어가 보세요
글 좋습니다

트레바리 2011-07-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게 고종석 선생은 <국어의 풍경들> <감염된 언어> <언문세설>의 고종석 선생입니다. 어떤 국어학자나 언어학자도 닮게 쓰기 어려운 명쾌하고 재밌는 언어사랑의 글들이라고 생각해서요..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에서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를 아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두 연인의 서한집 원문이 어떤 언어로 돼있는지 몰라도 선생이 새로 번역해주신다면 더 좋겠다 싶기도 하더군요.. 이번에 읽어본 <여자들>에서는 '최진실' 편을 가장 인상깊게 읽고 공감했습니다. 딴 여자들은 대개 잘 모르는 님들이라서 더 그랬지만(^^;), 한 편의 절실한 '제망매가'를 읽은 기분이더군요. <제망매>에서 망매 '지원'의 이미지도 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암튼 본인의 누이 콤플렉스를 직접 고백한 양반이기도 하니, 책 제목을 차라리 <누이들>로 하지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모든사이 2011-07-25 09:54   좋아요 0 | URL
누이컴플렉스는 아마, 김현이 고은의 초기 시를 비평하면서 나온 말인 것으로 기억나는 데요. 님 지적대로, 고종석의 경우에는 그것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고종석에게 '여자'는 성적 대상이라기 보다, 친밀함의 대상에 가깝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성적 매력으로도 열려 있지만,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않는, 말하자면 프렌치 키스로 가기 직전의 키스 같다고나 할까요..

트레바리 2011-07-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게 표현하시니 <제망매>의 키스씬이 바로 그랬던 것 같네요..^^ 여사촌이 '아이스크림맛'이 난다고 그러던.. 다시 생각해 보니 '누이컴플렉스'는 고선생 본인이 직접 말한건 아니고, 말씀하신 김현 선생을 인유해서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던 듯 하네요..(선생이 여러 누이들 사이에서 자랐고, '제망매가'를 좋아하면서 '누이'가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고, 또 누이같다는 연예인 허영란씨 팬인 것 등을 종합해서요..) 암튼 '누이'에게서 일종의 '久遠의 女像'을 보는건 미당이나 고은이나 고선생이나 비슷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