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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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벨벳 애무하기’(tipping the velvet)는 여성 성기를 쓰다듬는 레즈비언들의 은어. 사라 워터스의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한 여성 레즈비언의 人生流轉이다. 아니 빅토리아 시대라는 왕조적 배경보다는 차라리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쓰여진 시대(1867, 1885, 1894)라 하는 것이 더 합당할 듯 하다. 19세기 말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빈곤과 계급갈등을 배경으로,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사회주의에 이르는가를 한 여성의 곡절 많은 인생에 담아낸다.   


줄거리 : 굴 원산지로 유명한 윗스터블 출신 낸시 애쉴리는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남장 여성 키티 버틀러를 사랑한다. 여기까지는 10대 후반 사춘기 소녀들이 흔히 보여주는 레즈비언 취향과 유사. 그녀는 키티와 함께 런던에서 지내면서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며 ‘커밍아웃’ 하게 되고 그녀와 더불어 진한 성적 탐닉에 빠져들게 된다. 키티가 양성애자라는 것을 알고 파국에 이른 뒤, 거리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성을 연기하며 남창 생활을 하다가 레즈비언 귀족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다. 이후 사회주의자여성과 사랑을 하게 되고, 당대 영국사회에 대한 계급적 각성에 이르게 된다. 이 각성과정은 이와 유사한 계급적 자각의 과정이 전형적으로 그렇듯이 ‘확신에 찬 대중연설’로 절정에 이르고, 헐리웃 엔딩처럼 연인과의 결합과 화해의 키스로 마감한다.

이 소설의 레즈비어니즘은 페미니즘, 그리고 더 두드러지게는 사회주의와 행복하게 결합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 : “그리고 이게 (레즈비언 섹스가) 정말 사회주의 혁명에 기여를 할까요?” 엉덩이를 움직이며 내가 말했다. “오 그럼요!”, 나는 꿈틀거리며 좀더 아랫부분으로 내려갔다. “그럼 이런 것도요?” “오 분명해요” 나는 시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오” “맙소사” 내가 말했다. “몇 년째 사회주의자들의 음모에 가담하고 있으면서 전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벨벳 애무하기”는 레즈비언 섹스에 대한 노골적 비유이면서 혁명의 과정이자 여성적 연대의 구체적 현현(epiphany)이다. 가히 ‘섹스는 혁명이다’라는 68혁명적 사고의 재현.

내 기억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존재론적 전이과정은 매우 전투적이고 엄숙주의적이었다. 세계를 구원하는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주체적 각성 과정에 어찌 섹스 따위가 끼어들 수 있었으랴. (가령, 김정환의 ‘기차’라는 비유가 보여주는 엄숙주의!) 이 소설은 섹스의 은밀한 쾌락과 사회주의 혁명의 열정적 의지를 뒤섞어 부드러운 쾌락의 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소설을 읽는 과정이 ‘불편’하지 않았던 까닭도 이런 '마사지'에 있었을 것. 레즈비언을 소재로 했다는 점도 마찬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전형적인 남성서사이기 때문이다. 상류층 레즈비언들의 ‘할렘’에서 보이는 ‘폭력적 레즈비언 섹스’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섹스와 사뭇 대조적인데, 이는 그 섹스가 ‘남성적 섹스’의 변형(딜도)인 까닭이다.

Eleanor Marx, the youngest daughter of Marx
19세기 말의 런던은 확실히 새로운 욕망과 정치가 들끓던 혁명과 열망의 공간. 여주인공과 그녀의 여성 애인을 런던에 데려간 매니저는 런던을 ‘다양성’이 충만한 곳이라 자랑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이 레즈비언 소설이자 성적 정체성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셈인데, 과연 소설속의 런던은 귀족과 노동자, 레즈비언과 게이, 도시빈민과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이 공존한다. 주인공은 런던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수직으로 오가며 ‘몸으로’ 런던의 삶을 살아낸다. 당대 영국의 비판적 지식인들도 역사적 삽화로서 등장한다. 엘레노어 마르크스를 비롯해 시드니 웹과 같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월터 휘트먼과 같은 시인 등 익숙한 이름도 여럿이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읽으면 열광할 만한 대목들. 여성적 정체성, 성의 정치학 : 지배와 복종, 젠더와 계급, sisterhood, 여성적 주체의 ‘말하기’ 등. 특히, 주인공 낸시가 성적 정체성을 경유하여 계급적 각성에 이르면서 “자신의 언어”을 찾게 되는 대목은 여성-레즈비언이라는 ‘하위주체’의 자각과 주체화(말하기)의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변화의 과정은 다소 감상적인 문체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시퀀스의 이음매가 꽤나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요컨대, 공학적으로 잘만들어진 소설인 셈.

해설에 따르면, 저자 사라 워터스는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 소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소설을 처녀작으로 <끌림affinity>, <핑거스미스fingersmith>등의 작품을 썼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세기를 사랑했으며, 레즈비언까지는 아니더라도 페미니스트임에는 분명하다. 인생유전에 집착하는 걸 보니 19세기 소설에도 탐닉했으리라.

떠오르는 잡상들 : 나는 왜 게이보다 레즈비언이 좋을까 : 내가 생물학적으로나 성적으로나 ‘남자’이기 때문? 영국의 사회민주연맹(SDF)에 대한 궁금증 : 윌리엄 모리스와 엘레노어 마르크스의 동시참여?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 : 공연예술과 동성애의 친화성, 몸에 대한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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