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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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진중권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이며, 조선일보 독자 마당의 ‘밤의 주필’을 자처하고 누구든 정치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피아를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독설을 퍼붓는 인터넷 논객의 얼굴이다. 다른 하나는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로 미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이 미학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길을 연 미학 연구자의 얼굴이다. 정치에 관심 있는 네티즌들은 어딜 가나 논쟁을 몰고다니는 논객 진중권을 더 낯익게 여기지만, 실제 그의 최고 베스트 셀러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가 아닌 ‘미학 오디세이’다.

새 책 ‘앙겔루스 노부스’에서 진중권은 오랜만에 미학 연구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혹은 미학 에세이스트라고 해야 할까. ‘월간 우리교육’에 연재됐던 에세이를 다듬어 낸 이 책은 미학사를 다시 읽겠다는 원대한 구상과 그가 글을 쓰던 당시의 기분·정서·감정들을 같이 담고 있다. 또 톡톡 튀다 못해 가끔 독자를 황당하게 하는 ‘진중권표’ 문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의 미의식을 이야기하면서 고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성인이 되면 몸과 영혼이 예쁜 미소년을 만나 영혼의 씨앗을 심어 영혼의 번식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호모 섹슈얼이 된다는 얘기다. “이때만 해도 철학과 섹스는 하나였다. 좋은 시절이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미학 연구자는 흔치 않다.

그러나 그가 쉽고 잘 읽히는 문체로 펼쳐 보이는 문제 의식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예술을 인식의 대상으로 파악하던 기존의 미학에서 벗어나 “철학과 섹스가 하나가 돼 미를 향해 상승하는 영적·육체적 생식의 시대”, “삶이 예술이 되고, 모든 인간이 예술가가 되는 시대를 꿈꾸는 ‘존재미학’”이 그의 꿈이다. 그가 내보이는 존재미학의 영웅은 “창조적 개새끼”이자 “위대한 영혼”인 디오게네스다. 노예 시장에 팔려 나가서도 태연하게 한 사람을 가리키며 “나를 이 자에게 파시오. 이 자에게는 주인이 필요한 것 같소”라고 말할 수 있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

진중권은 늘 자기 자신의 주인이었던 그에게 “최초의 자유사상가, 최초의 세계시민, 최초의 변증법적 유물론자, 알렉산더 대왕이 부러워한 개새끼, 위대한 영혼”이라는 찬사를 바친다. 이 책의 끝을 장식하는 것은 파울 클레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新天使]다. 일찍이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역사철학 테제’에서 ‘역사의 천사’라 부른 바 있었던 이 새로운 천사는 거짓 선지자가 던지는 헛된 미래의 약속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천사가 찢어진 눈으로 응시해야 하는 것은 과거다. 과거에 묻혀버린 반역의 기억들, 객체 아닌 주체적 경험의 기억들을 현재의 것으로 되살려낼 때 비로소 역사나, 미학도 온전히 살아 변화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구원은 그 기억속’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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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생물학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8
피터 벤틀리 지음, 김한영 옮김 / 김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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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동규의 어법을 흉내내자면, ‘도처(到處) 컴퓨터요 개유(皆有) 디지털’이다. ‘컴퓨터, 혹은 네트워크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구호도 이젠 진부해졌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존 환경이 자연이라면 컴퓨터는 이미 또 하나의 인공자연이다. 그러니 ‘디지털 생태계’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닐 뿐더러 오히려 현대의 실상에 더 잘 부합하는 용어일 것이다. 런던대 특별연구원인 피터 벤틀리는 거기에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해석틀을 들이댄다. 그는 생물학과 컴퓨터를 결합시켜 디지털 진화론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컴퓨터를 생물로 치환하는 저자의 주장은 과잉해석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컴퓨터는 그저 플라스틱과 금속·반도체 등으로 이뤄진 ‘물체’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디지털 유전자, 디지털 뇌, 디지털 곤충, 디지털 식물, 디지털 면역계 등 저자가 구사하는 낯선 용어의 숲을 거닐다 보면 그의 시각이 터무니없는 가설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디지털 과학을 예술이나 생물학 등 다른 분야와 연관시켜 사고하지 못하는 통합적 상상력의 빈곤을 질타한다. 저자는 면역계와 발생학의 방법을 컴퓨터에 적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저자가 구상하는 디지털 생태계는 세계·진화·뇌·곤충·식물·면역계·성장이라는 일곱개 장으로 나뉘어 설명된다. 자연세계에서 유전과 변이, 선택의 과정을 통해 ‘진화’가 이뤄지듯이 이진수 문자열로 구성된 진화 알고리즘도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 하드웨어 체제의 진화나 바이오 로봇공학, DNA컴퓨팅,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공진화(컴퓨터의 끊임없는 업그레이드나 음악파일이 만들어지면서 MP3 플레이어도 생겨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등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디지털의 항구적인 진화과정에 다름 아니다. 면역계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유기체들이 생존을 위해 스스로 면역체계를 갖추듯이 컴퓨터 또한 바이러스의 침투와 교란에 적응하고 대응해가면서 면역능력을 배가시킨다.

저자의 관점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전세계에서 가장 극성맞은 네티즌을 가진 우리는 인터넷상에서 벌어진 네트워크의 진화를 이미 실감하고 있는 바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것이 “피드백과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많은 것들이 외부의 교란을 받으면 복잡성을 창조한다는 규칙”이라고 말한다.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는 교란과 변이 속에서 디지털은 진화하고, 우리의 삶 또한 항구적인 변화에 놓이게 된다. 자연세계와 디지털 생태계라는 두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인 셈이다. 저자는 그 숙명의 출현과 그것이 가져올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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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한국 헌정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9
김욱 지음 / 책세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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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즘은 흔히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라는 ‘혐의’를 받아왔다. 법학자인 김욱 교수는 마키아벨리즘의 본질은 좋은 목적이 나쁜 수단마저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펴낸 ‘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한국 헌정사’는 바로 이같은 시각을 빌려 이승만 이후 한국 정치사를 조망하는 독특한 저작이다.  

그때의 좋은 목적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익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사이비 마키아벨리즘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즘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닮았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항시 악을 원하지만, 그러나 늘 선을 이룩하는 그런 힘의 일부분”이다. 필요악이되 궁극적 선을 이루는 악이다.

 

이승만은 분단 반공국가 이념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국가라는 ‘목적’을 이루려 했지만 반쪽짜리 국가를 세움으로써 목적에 의한 수단의 정당화에 이르지 못했다. 쿠데타라는 ‘나쁜 수단’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경제개발’이라는 ‘좋은 목적’을 성공시켰던 박정희는 성공한 마키아벨리스트인가. 그는 쿠데타를 통한 집권이라는 정당성 시비에 내내 시달렸고, 결국 독재로 귀결되면서 실패한 마키아벨리스트가 됐다. 3당 합당을 통해 집권한 김영삼 역시 권력에 집착하면서 무너졌고, 도덕성 문제로 침몰한 김대중 정권도 마키아벨리스트로서는 결격 사유를 지녔다.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은 반(反)마키아벨리즘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정치적 역정은 3당 합당 거부,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 등 ‘좋은 수단’에 의해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좋은 목적’을 성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쁜 결과가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로 전환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좋은 수단을 고집하는’ 반마키아벨리즘은 실현되기 어렵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좋은 수단에 의한, 좋은 목적의 성취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노무현의 ‘친미외교’는 무죄다. 국가간의 이해가 상충하는 외교의 장은 때론 나쁜 수단의 사용도 불사하는 ‘마키아벨리적 사고’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선 이후의 노대통령은 마키아벨리즘 경향이 짙다.

마키아벨리즘은 부정적인 것도, 반마키아벨리즘과 대립적인 것만도 아니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즘을 실현하면서 반마키아벨리즘을 이뤄낼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즘의 변증법’을 제시한다. 마키아벨리즘은 현실적 성공을 위한 방법이지만 결국 내부에 있는 ‘나쁜 수단’마저도 극복해내 공동체의 이익과 정의의 실현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 마키아벨리즘을 옹호하면서, 반마키아벨리즘의 실현을 꿈꾸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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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자유, 자연, 반권력의 정신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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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 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1984년’과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정보화 사회가 초래할 암울한 미래에 대해 그만큼 근본적인 비판을 가한 작가도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해는 오웰 탄생 1백주년이 되는 해로, 해외에서는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떠들썩하게 벌어지는 모양이다. 그는 영국 BBC가 조사한 ‘1천년간 최고의 작가’를 꼽는 설문조사에서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오웰과 한국의 인연은 사실 오래됐다. 그의 ‘1984년’은 이례적으로 출간된지 3년만인 1951년 한국에 번역, 소개됐다. 미 해외정보국이 반공투쟁의 일환으로 이 작품의 국내 출간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군사독재와 북한의 김일성 체제를 거쳐온 한국인들에게 오웰은 남북한 체제 모두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던져주었던 작가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논란으로 떠들썩한 지금 그는 ‘정보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가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펴낸 조지 오웰의 평전은 오웰을 ‘반공소설가’이거나 ‘정치소설가’라는 좁은 틀 속에 가두려는 태도를 배격한다. 이 책은 오웰을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던 아나키스트적 인물로 해석한다. 오웰은 영국 식민지인 미얀마에서 경찰로 근무하며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파리·런던의 밑바닥 인생을 거쳐 아나키스트가 됐다. 그는 문필가로 이름을 얻은 뒤에도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프랑코 독재에 저항해 총을 들고 의용군에 참가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의 체험을 기록한 ‘카탈루냐 찬가’는 걸작 르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저자 박홍규 교수는 오웰의 이같은 내력뿐 아니라 그의 소설과 에세이를 종횡하면서 ‘자유와 반권력의 정신’을 보여준 오웰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저자인 박교수 자신이 아나키스트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오웰상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의 투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에 의한, 아나키스트 평전인 셈이다. 물론 이 책이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표방하기 위한 ‘선동물’은 아니다. 권력의 대척점에 서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했던 지식인이자 자신의 삶을 통해 반권력을 실천했던 오웰의 삶은 그것 그대로 감동적이다.

오웰 못지 않게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책을 포함한 저자 박홍규 교수의 평전 시리즈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 법학자인 그는 최근 몇년 사이 윌리엄 모리스, 빈센트 반 고흐, 오노레 도미에, 루쉰(魯迅)의 평전을 펴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두달간 오웰 평전과 함께 ‘까뮈를 위한 변명’을 펴냈다. 그가 선택한 인물들은 모두 모든 형태의 권력에 반대해 자유인을 표방했던 ‘아나키스트’들이다. 그의 책들은 온전히 자신이 편애했던 인물과 사상의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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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8-05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홍규의 오웰 읽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요.
박홍규 뿐만이 아닐텐데, 오웰의 버마 식민지 경찰 체험을 너무 과하게 해석해 그가 평생을 반제국주의자로 산듯한 말을 하거든요. 근래 오웰의 <버마 시절>을 보면서도 생각한 거지만 식민지 현실에 대한 오웰의 생각은 상당히 피상적이거든요. 그건 에드워드 사이드가 제국주의와 관련해 오웰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이유기도 할테구요.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를 써내고, 사이드의 주저인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를 옮긴 박홍규가 이 부분에선 상당히 궁색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국주의를 놓고선 오웰과 사이드가 꽤 다르니까요.

모든사이 2010-08-3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홍규 교수가 워낙 다작을 하다 보니, 그것도 인물 중심의 평전을 하도 많이 펴내다 보니 그런지. 대개의 평전들이 인물은 안보이고, 박홍규의 아나키즘만 오롯하게 보이더군요. <버마시절>은 보질 못해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08 17:56   좋아요 0 | URL
박홍규는 얼마 전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라는 책도 냈더군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에 가져다 맞추다 보니 말씀하신대로 인물이 잘 보이질 않아요.
에드워드 사이드를 놓고 봐도 <음악은 사회적이다>를 공역했던데 사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음악을 알지 못하거든요. 매우 어린 시절 팔레스타인을 떠났고, 그의 부모는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서양 클래식을 들려주고 가르쳤으니까요. 역자 해설에서 마치 사이드가 팔레스타인 민중의 음악을 즐겨 듣고 사랑한 것처럼 말하는데 사이드는 음악과 관련한 어떤 글에서도 민중의 음악을 말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는 그걸 자신의 부족함이라 말해요. 박홍규는 그 부족함이 싫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교양 교양인 시리즈 1
강재언 지음, 하우봉 옮김 / 한길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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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당대의 유학을 이렇게 질타한다. “참된 선비의 학문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나라의 경제를 넉넉하게 하고, 문(文)과 무(武)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에 해당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어찌 옛 사람의 문구를 따서 글이나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에 주석이나 하면서 소매 넓은 옷을 입고 예모만을 익히는 것이 학문이겠는가.” 다산에게 당대의 유학은 관념과 명분에 사로잡혀 경세학의 본분을 망각한 사이비 학문에 불과했다. 다산을 사숙하다 한국 근대사상과 근대사 연구로 나아간 재일 사학자 강재언 역시 정약용의 시각을 빌려 한국 유학사를 조망한다.

이 책은 기자조선에서 시작해 개화기의 개신 유학자에 이르기까지 한국 유학 2천년을 정리하고 있는 ‘한국 유학 통사’다. 저자가 한 잡지에 ‘조선 유교의 에토스’라는 제목으로 3년 동안 연재한 시리즈를 묶은 것으로 중국 유학의 전래과정,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 활짝 피었던 한국 유학을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조선 유학의 최대 논쟁점인 ‘이기론’ 등 유학의 교리와 이론적 계보보다는 당대의 유학이 거처한 사회사적 토대와 배경에 더 주목하고 있다.

정약용이 현실과 유리된 유학의 도학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듯이, 저자는 조선조 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도학정치의 우상인 조광조 등을 매섭게 비판한다. ‘부국강병’보다 ‘인의지도’(仁義之道)를 강조한 조광조의 시각은 허망한 교리논쟁으로 잘못 나아갔다는 것이다. ‘예송논쟁’을 일으켰던 송시열은 유학을 ‘교조화’시킨 인물로 비판받고, 그의 북벌론은 당시 중국의 군사력에 비추어볼 때, ‘인종적 편견’에 가까운 폭론이라고 지적한다. 대신 그는 유학의 실용과 경세적 측면을 부각시켜 정도전·광해군·신숙주 등의 복권을 시도한다. 저자가 고려의 무인정권 시대를 문화의 암흑기가 아닌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국권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런 시각 때문이다.

이 책의 장점은 유학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는 데 있다. 유학은 관념적인 학문이 아니라, 당대 사회와 긴밀히 연관된 사회사상적 체계라는 점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 저술의 출발점이 “각 시대의 역사적 과제들에 유자(儒者)들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맞섰는가”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배계급과 전통, 사림파 중심의 유학을 거부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치세의 학문으로 유학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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