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생물학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8
피터 벤틀리 지음, 김한영 옮김 / 김영사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시인 황동규의 어법을 흉내내자면, ‘도처(到處) 컴퓨터요 개유(皆有) 디지털’이다. ‘컴퓨터, 혹은 네트워크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구호도 이젠 진부해졌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존 환경이 자연이라면 컴퓨터는 이미 또 하나의 인공자연이다. 그러니 ‘디지털 생태계’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닐 뿐더러 오히려 현대의 실상에 더 잘 부합하는 용어일 것이다. 런던대 특별연구원인 피터 벤틀리는 거기에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해석틀을 들이댄다. 그는 생물학과 컴퓨터를 결합시켜 디지털 진화론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컴퓨터를 생물로 치환하는 저자의 주장은 과잉해석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컴퓨터는 그저 플라스틱과 금속·반도체 등으로 이뤄진 ‘물체’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디지털 유전자, 디지털 뇌, 디지털 곤충, 디지털 식물, 디지털 면역계 등 저자가 구사하는 낯선 용어의 숲을 거닐다 보면 그의 시각이 터무니없는 가설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디지털 과학을 예술이나 생물학 등 다른 분야와 연관시켜 사고하지 못하는 통합적 상상력의 빈곤을 질타한다. 저자는 면역계와 발생학의 방법을 컴퓨터에 적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저자가 구상하는 디지털 생태계는 세계·진화·뇌·곤충·식물·면역계·성장이라는 일곱개 장으로 나뉘어 설명된다. 자연세계에서 유전과 변이, 선택의 과정을 통해 ‘진화’가 이뤄지듯이 이진수 문자열로 구성된 진화 알고리즘도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 하드웨어 체제의 진화나 바이오 로봇공학, DNA컴퓨팅,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공진화(컴퓨터의 끊임없는 업그레이드나 음악파일이 만들어지면서 MP3 플레이어도 생겨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등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디지털의 항구적인 진화과정에 다름 아니다. 면역계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유기체들이 생존을 위해 스스로 면역체계를 갖추듯이 컴퓨터 또한 바이러스의 침투와 교란에 적응하고 대응해가면서 면역능력을 배가시킨다.

저자의 관점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전세계에서 가장 극성맞은 네티즌을 가진 우리는 인터넷상에서 벌어진 네트워크의 진화를 이미 실감하고 있는 바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것이 “피드백과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많은 것들이 외부의 교란을 받으면 복잡성을 창조한다는 규칙”이라고 말한다.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는 교란과 변이 속에서 디지털은 진화하고, 우리의 삶 또한 항구적인 변화에 놓이게 된다. 자연세계와 디지털 생태계라는 두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인 셈이다. 저자는 그 숙명의 출현과 그것이 가져올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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