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 자유, 자연, 반권력의 정신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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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 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1984년’과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정보화 사회가 초래할 암울한 미래에 대해 그만큼 근본적인 비판을 가한 작가도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해는 오웰 탄생 1백주년이 되는 해로, 해외에서는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떠들썩하게 벌어지는 모양이다. 그는 영국 BBC가 조사한 ‘1천년간 최고의 작가’를 꼽는 설문조사에서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오웰과 한국의 인연은 사실 오래됐다. 그의 ‘1984년’은 이례적으로 출간된지 3년만인 1951년 한국에 번역, 소개됐다. 미 해외정보국이 반공투쟁의 일환으로 이 작품의 국내 출간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군사독재와 북한의 김일성 체제를 거쳐온 한국인들에게 오웰은 남북한 체제 모두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던져주었던 작가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논란으로 떠들썩한 지금 그는 ‘정보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가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펴낸 조지 오웰의 평전은 오웰을 ‘반공소설가’이거나 ‘정치소설가’라는 좁은 틀 속에 가두려는 태도를 배격한다. 이 책은 오웰을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던 아나키스트적 인물로 해석한다. 오웰은 영국 식민지인 미얀마에서 경찰로 근무하며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파리·런던의 밑바닥 인생을 거쳐 아나키스트가 됐다. 그는 문필가로 이름을 얻은 뒤에도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프랑코 독재에 저항해 총을 들고 의용군에 참가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의 체험을 기록한 ‘카탈루냐 찬가’는 걸작 르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저자 박홍규 교수는 오웰의 이같은 내력뿐 아니라 그의 소설과 에세이를 종횡하면서 ‘자유와 반권력의 정신’을 보여준 오웰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저자인 박교수 자신이 아나키스트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오웰상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의 투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에 의한, 아나키스트 평전인 셈이다. 물론 이 책이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표방하기 위한 ‘선동물’은 아니다. 권력의 대척점에 서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했던 지식인이자 자신의 삶을 통해 반권력을 실천했던 오웰의 삶은 그것 그대로 감동적이다.

오웰 못지 않게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책을 포함한 저자 박홍규 교수의 평전 시리즈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 법학자인 그는 최근 몇년 사이 윌리엄 모리스, 빈센트 반 고흐, 오노레 도미에, 루쉰(魯迅)의 평전을 펴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두달간 오웰 평전과 함께 ‘까뮈를 위한 변명’을 펴냈다. 그가 선택한 인물들은 모두 모든 형태의 권력에 반대해 자유인을 표방했던 ‘아나키스트’들이다. 그의 책들은 온전히 자신이 편애했던 인물과 사상의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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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8-05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홍규의 오웰 읽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요.
박홍규 뿐만이 아닐텐데, 오웰의 버마 식민지 경찰 체험을 너무 과하게 해석해 그가 평생을 반제국주의자로 산듯한 말을 하거든요. 근래 오웰의 <버마 시절>을 보면서도 생각한 거지만 식민지 현실에 대한 오웰의 생각은 상당히 피상적이거든요. 그건 에드워드 사이드가 제국주의와 관련해 오웰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이유기도 할테구요.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를 써내고, 사이드의 주저인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를 옮긴 박홍규가 이 부분에선 상당히 궁색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국주의를 놓고선 오웰과 사이드가 꽤 다르니까요.

모든사이 2010-08-3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홍규 교수가 워낙 다작을 하다 보니, 그것도 인물 중심의 평전을 하도 많이 펴내다 보니 그런지. 대개의 평전들이 인물은 안보이고, 박홍규의 아나키즘만 오롯하게 보이더군요. <버마시절>은 보질 못해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08 17:56   좋아요 0 | URL
박홍규는 얼마 전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라는 책도 냈더군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에 가져다 맞추다 보니 말씀하신대로 인물이 잘 보이질 않아요.
에드워드 사이드를 놓고 봐도 <음악은 사회적이다>를 공역했던데 사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음악을 알지 못하거든요. 매우 어린 시절 팔레스타인을 떠났고, 그의 부모는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서양 클래식을 들려주고 가르쳤으니까요. 역자 해설에서 마치 사이드가 팔레스타인 민중의 음악을 즐겨 듣고 사랑한 것처럼 말하는데 사이드는 음악과 관련한 어떤 글에서도 민중의 음악을 말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는 그걸 자신의 부족함이라 말해요. 박홍규는 그 부족함이 싫었는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