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LG 비상 걸렸다.

휴대폰으로 LCD로 돈 못 벌어서 비상걸린게 아니고, 전 직원이 계열사인 파워콤의 Xpeed 못 팔아서 안달이 났다. 일로 만나는 사람마다 LG와 끈만 있는 사람이면 Xpeed를 권한다. 맛있는 차나 한잔 권할 것이지....

"나….절라 비굴해졌다..
이딴 거 하느니 때려 친다는 말 두 못 하구..
암튼…. 눈 딱감구 해주라..

내 돌아가서 술 사마.. 이런 기회로 한번 더 얼굴 본다구 좋게 생각해야 하나.. 뜨*랄…
가입하고 6개월쓰면.. 13만원 준단다..
채워서 보내줌 고맙지.. 그럼.. 수고해라.."

San Diego에 출장 가 있는 친구가 연락이 왔다. 본인이 토로한대로 비굴모드다. 꼬박꼬박 하루에 한번씩 전화온다. 마감 다 됐다....라며. 꼴에 회사생활 10년차가 이런 일로 비굴해지니 친구인 나도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오른다. 0505 전화번호 팔다가, 019 팔다가, 이젠 Xpeed냐? 회사 때려치워라 임마.... 니가 밥 멕여줄래?....

내가 집 옮긴 이후로, 선이 달린 것들은 다 끊고 면벽수련 중인데, 결국 San Diego에서 보내 준 전화 한통에 허물어져 버렸다. 구태를 벗지못한 재벌 LG로 인해 온 국민이 피곤할터이다. LG야 인자 고마해라. 만이 뭇다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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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03-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집에서도 알라딘을 하시겠네요. 후훗 :)

dalpan 2007-03-2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선 없는 방구석이 좋았는데, 무선을 놓으려니 돈이 또 더 들길래...그냥 냅뒀습니다. 이제부턴 광속으로 날아다닙니다. 허허..

페르소나 2007-03-2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일전화오는 파워콤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mphone99 2007-05-2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굴한 친구 왔다 간다. 덕분에 할당 다 채웠다.. 복 받을거야.. 앞으로 다섯달 더 써주는거 잊지 마라.. 매달 술 사마..^^

dalpan 2007-05-2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비굴친구. 오랜만일세! 어제밤에 인터넷 안되더라. 광랜이 이래도 되는거야? 그래도 매달 술산다는 소리 들으니 기쁘구마! 근데 여기 잘 찾아왔네? 허허..
 
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8
니토베 이나조 지음, 양경미.권만규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벌써 10년이 흘러버렸다. 처음 일본땅에 여행을 가고 나름대로 소중한 경험들을 들고 왔지만, 더 자세히 일본을 들여다 보려해도 마땅한 서적들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기껏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던 책이라야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영화감독 이규형의 일본문화 소개책자 정도랄까. 이제는 일본문화의 개방으로 영화에서부터 음악, 서적까지 넘쳐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는 상당히 피상적이었다 싶다. 가깝고도 멀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 책은 출간한지 100년이 넘은 책이다. 작가인 니토베 이나조는 그 옛날에 존스 홉킨스에서 공부했고, 귀국해서는 교육자로서 그리고 국제연맹 사무차장까지 역임했으니 꽤 유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연찮게도 얼마전에 읽은 책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의 저자는 1만엔 일본지폐, 이 책은 5천엔 일본지폐의 주인공이니 일본은 이미 과거 봉건시대를 접고 근대화 이후 시대에서 그들의 미래를 보고 싶은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국사책에서 보아오던 일본(왜)은 설사 36년간 한반도를 침탈했던 과거를 애써 부인하지 않아도, 백제에게 문화를 전수받고, 조선시대 통신사절을 받아들이던 왠지 왜소해 보이던 국가가 아니었던가 싶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런 관념적 과거형 속에 묻혀있을 때, 그들도 놀라듯 그들의 근대화는 말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우리에게 일본의 근대화는 무서운 일이었고, 불행한 역사로의 귀결이었다.

이 책은 100여년 전 니토베 이나조가 미국에서 출간한 책으로 물론 영어로 먼저 발간된 책이다. 일본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에, 일본의 근원이라고 작가가 판단한 '무사도'의 연원, 덕목, 정신, 의무를 비롯해 무사도의 현재, 미래를 서양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책이다.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왜 일본에는 종교교육을 시키지 않느냐?'는 외국인 교수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고심한 끝에 그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일본정신의 근원이라 할 만한 '무사도'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기본적인 정신은 동양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낯선 것들이 아닌 유교적 가치의 발견이다. 다만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인 인(仁), 예(禮), 용(勇), 충(忠)등의 덕목에 일본 봉건주의의 특수한 계급, 바로 사무라이에게 요구되던 사회적, 역사적 책무와 그들의 의식에 관한 접목들을 시도한다. 어쩌면 오랜 세월 가마쿠라, 무로마치,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막부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으로 유지되어온 일본의 봉건역사에서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은 특수계급의 정신적 지향점을 넘어 일본전역에 뿌리내려 온, 작가의 생각대로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이 책을 텍스트로만 접한다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책일 수도 있는데, 거의 책의 1/3을 사무라이와 전쟁에 관한 옛 그림 및 도판으로 가득 채우고 있어 내용의 이해도를 높이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그러나 누차 일본인들이 직접 쓴 책들, 특히 근대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인류보편의 가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글은 실종되고, 대부분이 일본적 가치의 절대화, 이를 통한 편협한 일본주의의 실상을 드러내는 듯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책의 전반부, 무사도의 기본 정신을 설명하면서 동양사상에서 아주 익숙한 유교적 가치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유사한 내용을 끌어들여 이를 전부 일본화하는데,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마치 일본고유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이를 찬미한다. 심지어는 서양의 유사 내용도 일본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일본 속담에 "길 잃은 새가 품속으로 날아들면 사냥꾼이라도 새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독교적인 적십자운동의 정신이 이미 일본에 그 뿌리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일본 국민들은 제네바의 만국적십자조약보다 몇 십 년 앞서, 일본 최고의 소설가 타키자와 바킨의 작품을 통하여 적군의 부상병을 치료해 주는 이야기에 친숙해져 있다." (72p)

이는 어찌보면 편협한 일본주의의 서양인의 전통적 동양무시-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항변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를 무시하고 제국주의 침탈로 달려간 역사적 사실을 볼 때 결국 이러한 무사도 정신은 일본의 가치이지 인류보편의 가치는 아님이 명징하다.

작가는 칼로 대변되는 무사도 정신에 전통적 유교적 가치로 덧칠을 하고, 절대 등 뒤에서 칼을 꽂지않는, 온화하고 평정심을 가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할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무사들을 그려내나, 칼에 그 마음을 덧씌운다고 칼이 붓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칼의 가치는 힘(무력)의 가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오히려 강하게 든다. 세계 어디에서도 칼을 쓰던 무인이 지닌 덕목에 충성과 명예를 빼고, 인명살상만 강조하는 민족은 없다. 무사도정신이 일본의 종교적 가치를 능가하는 일본정신의 뿌리라 함은, 결국 힘의 가치를 절대화한다는 편협한 일본을 일본인 스스로 시인한 것에 다름아니다.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다시 우경화되는 일본의 상황에 곱지않은 시선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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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8
니토베 이나조 지음, 양경미.권만규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절판


(무사도에 영향을 준 사상이 불교, 유교 등임을 설명하며)
지금까지 서술한 것처럼 그 연원이 어디에 있든지 무사도가 스스로 흡수하고 동화된 본질적인 원리는 단순하면서도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전란으로 날을 지새우던 불안정한 시대에 사람들의 삶에 확고한 불굴의 교훈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본인의 선조인 무사들의 건전하면서도 순박한 성격은 고대 사상의 큰 길, 혹은 좁은 길에서 평범하지만 단편적인 교훈의 이삭들을 주워 모아 풍요로운 정신의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그 교훈으로부터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인간의 길을 형성하였다.-44p쪽

일본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개항 후 일본이 단 몇 년 만에 봉건제를 폐지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무사들은 가산을 몰수당한 대가로 받은 공채를 상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고결하고 정직한 무사였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상공업 분야에서 이해타산이 빠른 상인들과 경쟁하기는 했지만 부족한 장사 수완으로 인해 회복하기 힘든 큰 실패를 겪었다. (중략)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이미 부의 길과 명예의 길은 같지 않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90p쪽

그리피스(Griffis : 미국의 목사)는 "중국의 유교가 부모에 대한 복종을 인간의 첫 번째 의무로 삼고 있는데 반해, 일본의 유교는 주군에 대한 충성을 그 첫 번째 의무로 삼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108p쪽

용(勇)의 단련은 어떤 일에도 불평하지 않는 인내의 정신을 기르는 것이며, 예(禮)의 교훈은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어 타인의 쾌락이나 안정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울려 금욕적인 심성을 낳았으며, 마침내 외형적 금욕주의라고 해도 좋을 일본의 국민성을 형성시켰다.-127p쪽

무사들은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쁨과 분노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을 강한 성격을 보장해주는 원칙으로 여기며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시켰다.-128p쪽

일본인이 할복을 전혀 불합리하게 느끼지 않은 것은 단지 연상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할복을 할 때 신체의 특정 부위를 골라 칼을 댄 것은 그곳에 영혼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해부학적 신념에서 기인했다. (중략) 이런 신경생리학의 학설이 받아들여진다면 할복의 논리는 간단히 설명될 수 있다. "저는 제 영혼이 들어있는 곳을 열어 당신에게 그 상태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 영혼이 더러운지 깨끗한지 당신의 눈으로 확인해 주기를 바랍니다."-136-7p쪽

극동 연구가인 헨리 노먼(Henry Norman)은 일본이 동양의 다른 국가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으로 "인류가 지금까지 고안해 낸 명예에 관한 규칙들 중, 가장 엄격하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정확한 것이 국민들 사이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노먼은 현재의 일본을 건설하고 장래의 일본의 운명을 추진하는 원동력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일본의 변모는 오늘날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중대한 사업에 다양한 동기가 작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만약 그중에서 가장 주된 힘을 들라고 한다면 누구든 주저없이 무사도의 손을 들 것이다.-187p쪽

동양의 제도와 그 민족을 자세히 관찰한 M. Townsend는 "우리는 늘 유럽이 일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만 들어왔을 뿐, 이 섬나라의 변화가 순전히 자발적이었음을 잊고 있다. 유럽이 일본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 유럽의 문무에 걸친 제도들을 배워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몇 년 전 터키가 유럽에서 대포를 수입한 것처럼 일본은 유럽의 기계과학을 수입했다. 그러나 그것을 정확히 말한다면 일본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영국이 중국에서 차(茶)를 수입했다고 해서 영국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89p쪽

유럽과 일본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유럽의 기사도가 봉건제도의 품에서 떨어져나와 기독교에 의해 양육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은 데 반해, 일본의 무사도는 자신을 양육해 줄 위대한 종교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모인 봉건제도가 붕괴하자 무사도는 고아로 남아 자립적으로 살아가야 했다.-197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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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봄이 되었으니 파릇파릇한 풀향기 맡으러 나가야하나....밖을 보니 눈이 온다. 내일이면 개구리 나오는 경칩인데... 아~ 저 호쾌한 스윙. 역쉬 타이롱 우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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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이산의 책 42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허호 옮김 / 이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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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맞추어야 할 급한 약속이 아닐때는 주로 버스를 이용하지만, 한때 서울시내에서 지하철이 나의 주된 이동수단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다름아니라 1호선과 2호선 이후의 노선방향이 거꾸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호선은 지하철이 왼쪽방향으로 출발하는 반면에 2호선부터는 차량이 오른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더 놀라운 사실은 멀쩡이 오른쪽으로 달리던 지하철도 시경계를 넘어서는 지역부터는 갑자기 방향이 또 뒤집어진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하철이 아닌 우리나라 기차선로가 모두 우리의 일상에 부자연스러운 좌측통행이다. 이유는 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철도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지하철 1호선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나면 초등학교 시절 복도를 걸을 때 좌측통행을 강요받던 것만큼 마음이 불편해진다. 더구나 완전히 변혁된 것도 아니고 현재와 과거의 우리가 뒤섞여 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불편함을 넘어 혼동스럽고 귀찮아진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런 혼동스러움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살았다.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막부의 막바지에 태어나 왕정유신(메이지유신)을 겪었고, 쇄국이냐 개방이냐를 놓고 일본전역이 들끓던 시대를 넘어, 유신시대가 안정화 되고 일본제국주의가 움터 탐욕의 눈을 희번득거릴 때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의 신념대로, 그리고 그의 예견대로 일본이 과거 봉건주의의 탈을 벗어던지고 서양 문명국가와 어깨를 견줄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그는 느긋하게 과거를 회상했을 것이다. 부럽다는 생각보다 그저 불편했다.

일본에 있어 데지마(出島)는 서양문명의 흡입구와 같은 곳이라 알고있다. 과거 300년 동안이나 일본과 우호통상관계를 유지해 온 네덜란드는 자국인을 데지마라는 한정된 공간의 섬에 거주시켰고, 여기서 흘러들어온 문물은 일본에서 난학(蘭學)을 번창하게 했지만, 전통적으로 중국과 조선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유학과 유교는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시류였다. 그러하기에 후쿠자와가 태어나고 성장하던 시기에 유학과 난학 등 서양학문과의 대립은 쇄국과 개방의 정치이념으로 대변된다. 후쿠자와 역시 하급무사의 자제로 굴레처럼 덫씌워진 봉건적 문벌제도와 관습, 위계질서에 대한 거부감으로 난학을 배우게 되지만 개항된 요코하마에서 받은 충격으로 난학을 넘어 영학(英學)에 몰두하는데 이 때가 1850년대 후반이니 그 당시 조선의 상황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외부에 의한 근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후쿠자와 본인의 서술대로 그는 정치적 인물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치에 대해서는 제3자의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어떤 정치세력도 그의 서양학문에 대한 경외와 열정을 뒷받침해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책을 읽는 서생이라 여겼으며 오히려 혼돈의 세기에 그의 미국, 유럽에 대한 외유경험을 다양한 저술과 번역 그리고 교육에 헌신했을 뿐이었다. 무(無)의 상태에서 고학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뼈에 사무쳤기에 미국에서 최초로 Webster 사전을 가져왔을 것이며, 여비를 다 털어 런던에서는 원서만을 가득 사왔을 것이다. 현재의 게이오대학인 게이오주쿠를 설립하고, 수 많은 번역과 저작활동을 했으며, 신문을 만들어내고, 많은 서생들을 길러내어 일본 전역에서 활동할 기틀을 만들었으니 그는 계몽사상가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일본은 미개한 봉건국가라 생각했고 이를 깨쳐야 진정한 자주독립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후쿠자와에 대한 나의 유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서양문명에 필적하는 부국강병의 대일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왜, 무엇을 위한 개화인가에 대한 논의는 지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흔히들 20세기초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설정하듯 후쿠자와 역시 이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왜?'에 대한 대답없는 개화는 결국 제국주의 포함외교로 흐른 역사적 사실을 낳았을 뿐이다.

"나라 전체의 대세는 오로지 개진과 진보로 기울어 차츰 그 결실을 맺게 되고, 수년 후에는 그 성과가 청일전쟁에서 관민일치의 승리로 나타났으니, 유쾌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살아있다보니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는구나. 먼저 죽은 친구들은 불행하다. 아, 보여주고 싶구나'하며 나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청일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일본외교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게 기뻐할 것도 못 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일본의 문명부강은 모두 선인유전의 공덕에서 유래하며, 우리는 마침 좋은 시절에 태어나 조상님 덕분에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나에게는 두 번째 큰 소원성취라 할 수 있겠다."(364p)

애국적 민족주의 때로는 서양우월주의가 바탕이 된 그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로 흐르는 기틀이 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이 자서전은 무려 100여년 전인 1898년에 탈고된 내용인 점을 고려하면, 그의 탁견과 서양문물에 대한 적극적 의지, 학문과 교육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20세기를 이끌어 낸 계몽사상가로서의 일생이 잘 표현되었고 - 오히려 그의 자화자찬식의 업적보다는 신념과 생활에 대한 논의가 더 많다 - 대담식이라 읽기도 수월하며, 오래된 문헌임에도 번역이 매끄럽다. 근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문헌이다.

왜 일본 최고액 화폐인 1만엔 지폐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얼굴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한반도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1만원 지폐의 세종대왕만큼 일본인에게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일본인은 철저히 봉건 과거와 단절하고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책장을 덮으며 가만가만 생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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