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이산의 책 42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허호 옮김 / 이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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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맞추어야 할 급한 약속이 아닐때는 주로 버스를 이용하지만, 한때 서울시내에서 지하철이 나의 주된 이동수단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다름아니라 1호선과 2호선 이후의 노선방향이 거꾸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호선은 지하철이 왼쪽방향으로 출발하는 반면에 2호선부터는 차량이 오른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더 놀라운 사실은 멀쩡이 오른쪽으로 달리던 지하철도 시경계를 넘어서는 지역부터는 갑자기 방향이 또 뒤집어진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하철이 아닌 우리나라 기차선로가 모두 우리의 일상에 부자연스러운 좌측통행이다. 이유는 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철도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지하철 1호선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나면 초등학교 시절 복도를 걸을 때 좌측통행을 강요받던 것만큼 마음이 불편해진다. 더구나 완전히 변혁된 것도 아니고 현재와 과거의 우리가 뒤섞여 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불편함을 넘어 혼동스럽고 귀찮아진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런 혼동스러움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살았다.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막부의 막바지에 태어나 왕정유신(메이지유신)을 겪었고, 쇄국이냐 개방이냐를 놓고 일본전역이 들끓던 시대를 넘어, 유신시대가 안정화 되고 일본제국주의가 움터 탐욕의 눈을 희번득거릴 때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의 신념대로, 그리고 그의 예견대로 일본이 과거 봉건주의의 탈을 벗어던지고 서양 문명국가와 어깨를 견줄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그는 느긋하게 과거를 회상했을 것이다. 부럽다는 생각보다 그저 불편했다.

일본에 있어 데지마(出島)는 서양문명의 흡입구와 같은 곳이라 알고있다. 과거 300년 동안이나 일본과 우호통상관계를 유지해 온 네덜란드는 자국인을 데지마라는 한정된 공간의 섬에 거주시켰고, 여기서 흘러들어온 문물은 일본에서 난학(蘭學)을 번창하게 했지만, 전통적으로 중국과 조선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유학과 유교는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시류였다. 그러하기에 후쿠자와가 태어나고 성장하던 시기에 유학과 난학 등 서양학문과의 대립은 쇄국과 개방의 정치이념으로 대변된다. 후쿠자와 역시 하급무사의 자제로 굴레처럼 덫씌워진 봉건적 문벌제도와 관습, 위계질서에 대한 거부감으로 난학을 배우게 되지만 개항된 요코하마에서 받은 충격으로 난학을 넘어 영학(英學)에 몰두하는데 이 때가 1850년대 후반이니 그 당시 조선의 상황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외부에 의한 근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후쿠자와 본인의 서술대로 그는 정치적 인물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치에 대해서는 제3자의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어떤 정치세력도 그의 서양학문에 대한 경외와 열정을 뒷받침해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책을 읽는 서생이라 여겼으며 오히려 혼돈의 세기에 그의 미국, 유럽에 대한 외유경험을 다양한 저술과 번역 그리고 교육에 헌신했을 뿐이었다. 무(無)의 상태에서 고학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뼈에 사무쳤기에 미국에서 최초로 Webster 사전을 가져왔을 것이며, 여비를 다 털어 런던에서는 원서만을 가득 사왔을 것이다. 현재의 게이오대학인 게이오주쿠를 설립하고, 수 많은 번역과 저작활동을 했으며, 신문을 만들어내고, 많은 서생들을 길러내어 일본 전역에서 활동할 기틀을 만들었으니 그는 계몽사상가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일본은 미개한 봉건국가라 생각했고 이를 깨쳐야 진정한 자주독립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후쿠자와에 대한 나의 유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서양문명에 필적하는 부국강병의 대일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왜, 무엇을 위한 개화인가에 대한 논의는 지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흔히들 20세기초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설정하듯 후쿠자와 역시 이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왜?'에 대한 대답없는 개화는 결국 제국주의 포함외교로 흐른 역사적 사실을 낳았을 뿐이다.

"나라 전체의 대세는 오로지 개진과 진보로 기울어 차츰 그 결실을 맺게 되고, 수년 후에는 그 성과가 청일전쟁에서 관민일치의 승리로 나타났으니, 유쾌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살아있다보니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는구나. 먼저 죽은 친구들은 불행하다. 아, 보여주고 싶구나'하며 나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청일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일본외교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게 기뻐할 것도 못 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일본의 문명부강은 모두 선인유전의 공덕에서 유래하며, 우리는 마침 좋은 시절에 태어나 조상님 덕분에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나에게는 두 번째 큰 소원성취라 할 수 있겠다."(364p)

애국적 민족주의 때로는 서양우월주의가 바탕이 된 그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로 흐르는 기틀이 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이 자서전은 무려 100여년 전인 1898년에 탈고된 내용인 점을 고려하면, 그의 탁견과 서양문물에 대한 적극적 의지, 학문과 교육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20세기를 이끌어 낸 계몽사상가로서의 일생이 잘 표현되었고 - 오히려 그의 자화자찬식의 업적보다는 신념과 생활에 대한 논의가 더 많다 - 대담식이라 읽기도 수월하며, 오래된 문헌임에도 번역이 매끄럽다. 근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문헌이다.

왜 일본 최고액 화폐인 1만엔 지폐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얼굴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한반도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1만원 지폐의 세종대왕만큼 일본인에게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일본인은 철저히 봉건 과거와 단절하고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책장을 덮으며 가만가만 생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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