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김정일, 차 한 잔 하실까요?
김현경 지음 / 한얼미디어 / 2006년 6월
품절


1994년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위기가 그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명색이 방송사에 몸담고 있던 나는 불안감만 느꼈을 뿐 일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중략) 워싱턴으로 출장 간 남편이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여기는 한국에 전쟁 난다고 난린데 거기는 괜찮으냐"고 묻는 것뿐이었다. (중략) 워싱턴에서는 수십년 동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한반도 전쟁계획 '작전계획 5027'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그해 4월 중순 패트리엇 미사일이 실전배치되었고 공격용 아파치 헬기도 들어왔다. (중략) 그해 5월 셋째주 주한미군은 NEO (비전투원 소개작전)를 실시했다. 비상시 미국 민간인들을 안전한 다른 나라로 대피시키는 훈련이다. (중략) 우리 정부는 미군에 '소개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좋지만 조용히 해달라'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중략) 결국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위원장을 만나면서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양국의 대립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고 한반도의 위기는 남북정상회담 국면으로 급변할 수 있었다. (중략) 기자가 되기 직전의 일이었지만 당시 무지했던 나에 대한 스스로의 비판은 나로 하여금 한반도 주변 정세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생활필수품이나 금 사재기를 하던 일부 계층을 비난만 하던 언론. 대북제재는 북한을 대화로 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며 연일 대북 강경책을 내놓던 정부. 미국인들이 한반도를 떠나는 훈련을 받는지도 모르고 우리에게 지급될 방독면이 없는지도 모른 채 정부를 믿고 생업에 충실하던 선량한 국민들. 한반도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36-40p쪽

금강산 관광을 위해 통일전망대에서 철책에 이르는 군사도로는 버스가 다닐 수 있도록 정비되었다. 보수진영에서 남북 도로 연결이 남침 진격로를 열어준다고 펄펄 뛰는 게 근거없는 얘기는 아닐 듯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시기 임시 개통된 경의선 남북연결 도로는 더욱 심각하다. 1시간도 채 안되는 거리에 바로 서울이 있지 않은가. 1950년 6.25 당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유유히 진격해온 인민군의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나 군사 당국은 걱정이 될 법도 한 일이다.
그렇다면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자. 금강산 연결 육로와 개성으로 가는 경의선 육로는 북한의 보수 진영과 군부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천 상륙작전 뒤 압록강 인근까지 밀린 경험이 있는 북한군은 남북연결 육로를 '북침로'로 여겼다고 한다. (중략) 남북이 철도도로 연결에 합의했을 때 북한 군부의 위기감은 남쪽 보수 인사들의 걱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리 하늘 같은 '장군님' 명령이라 해도 개성에서 평양까지 고속도로로 달리면 불과 2시간. 북침 진격로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고 한다. 우회로도 없는 데다 공군력에서도 열세인 만큼 북한 군부의 고민은 더욱 컸다. 서부전선의 군사 작전 계획을 변경하고 포 진지를 이동한 뒤에야 어렵사리 도로를 개통할 수 있었다.-60p쪽

남북관계 개선이 우리의 정신을 해이하게 한다는 일부 보수 인사들의 발언과 북한에서 빚어진 소동이 어찌나 닮아 있는지. 그러나 남쪽은 도로만 개방했을 뿐 땅을 내놓지는 않았다. (중략) 개성공단 예정지는 배후단지를 포함해 총 2000만 평. 이곳에 우리 공장들이 들어가고 있으니 군사분계선을 그만큼 북으로 밀어낸 형국이다. 북한군은 공단 개발을 위해 지하의 군사시설과 무기를 모두 옮겨야 했다.
금강산도 마찬가지다. 해상 호텔과 해상 골프연습장. 해수욕장과 횟집 등이 들어서 있는 장전항은 북한의 최전방 천혜의 군사항이다. 한 퇴역 군인은 과거 정보부대가 가장 갖고 싶어했던 정보 중 하나가 장전항 사진이라고 했다. 그런 장전항에 남쪽의 배가 무시로 드나들었다. (중략) 최전방 군사항을 내준 북한 해군의 속은 얼마나 쓰렸겠는가? (중략) 앞으로는 내륙 쪽 내금강까지 개방하기로 했으니 북쪽 군부의 걱정은 늘어가고 있다. 남쪽에서 오는 저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62p쪽

우리가 북한에 퍼주는 돈은 눈에 보이지만 남북관계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중략) 핵문제나 남북관계로 인해 북한만 경제적 효과를 얻는다는 주장은 분명 착각이다. 북한의 한 해 예산은 삼성전자의 1/4분기 매출 정도이다. 이렇게 엄청난 경제규모의 차이로 볼 때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안정으로 우리가 가져오는 경제적 효과는 북한이 얻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 되로 주고 말로 퍼오는 격이다.-69p쪽

2000년 6월 13일 평양.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순안공항으로 직접 영접 나왔다. 그리고 김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를 직접 찾아와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언론은 김위원장의 파격적인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측근들이 "김대통령을 직접 찾아다니는 것을 반대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용순 비서가 자꾸 빨간 불을 켜는데 새총으로 빨간 신호등을 깨버리겠다고 하고 이리 찾아왔노라"고 했다. (중략) 그의 발언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도 수많은 빨간 신호등에 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8월 남한 언론사 사장단은 대남적화를 언급한 노동당 규약과 강령을 바꿀 의향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도 (노동당) 규약은 고쳤으나 1945년에 만들어진 강령은 안 바꿨습니다. 그런데 강령은 해방 직후 것이어서 과격적, 전투적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 간부들 가운데는 주석님과 함께 일하신 분들도 많고 연로한 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강령을 바꾸면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도 함께 물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강령을 바꾸면 내가 숙청한다고 그럴 것입니다."-90p쪽

당시 언론사 사장단은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김 위원장에게 이제 다른 나라를 거치지 않고 직항 비행기로 바로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김정일 위원장은 그 제안을 즉석해서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했다.
"직항로 문제는 정부 내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고 군부가 문제인데, 군대문제는 내가 말해야 직항로가 열리게 돼 있습니다. 직항로를 열면 비행기에서 특수 카메라로 다 사진을 찍는다고 군부에서 반대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인공위성이 다 우리 사진을 찍고 있는데 비행기 타고 찍는다는 게 문제될 게 있는가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말을 뜯어보면 북한 정부와 군부 간에는 노선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강경 군부의 우려와 반대는 김정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북한의 정책 결정 과정을 알게 된다. -93p쪽

2002년 9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북한을 방문해 북일정상회담을 하고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은 일본인 납치를 시인했다. 발뺌할 줄 알았던 외부 세계는 놀랍고 과감한 '고백'을 잠시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반북정서가 해일처럼 일기 시작했다. 그때 북한의 한 고위인사에게 "왜 일본인 납치를 시인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일꾼들은 모두 다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장군님이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혀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서 과거사를 모두 청산하도록 지시했습니다."-93-4p쪽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6월 3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비밀리에 북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의 의제와 절차문제 등을 협의했다. 바로 그 때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 일행이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호치민 베트남 주석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금수산궁전에 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국가원수가 외국을 방문할 때 상대국의 국립묘지를 방문하는 의전을 지켜달라면서 자신도 서울에 가면 반드시 국립묘지를 참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남쪽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측이 하지 못한 '참배 이벤트'를 북측이 먼저 보란 듯이 해냄으로써 자신의 통 큰 결단과 절대적 지위를 과시한 셈이다.
상대국의 국립묘지 방문은 아마도 '인정과 존중'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남북에게 참배란 과거에 대한 유감 표명이자 발전적인 미래로 나가자는 조심스럼 메세지일 것이다. 남쪽에게는 시기상조였지만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2000년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했다.-110p쪽

분단 61년, 남북대화 35년 동안 남북은 참 많이 싸웠고 대화도 많이 했다. 다툼의 방식도 많이 변했다. 대결의 시대 남북의 상호 비방은 치열했다.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를 '괴뢰'로 불렀고 그 지도자를 '살인마'로 칭했다. 적대적인 말은 적대적인 행동을 불러왔고 그 행동은 또다시 험한 말을 낳았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었고 상대방은 '박살'내거나 '각을 떠야 할' 원수였다. (중략) 이런 말싸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당당하게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며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태의 책임은 '귀측'에 있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대화는 수시로 중단됐고 그럴 때면 남북은 담을 쌓았다. 대화의 통로 자체가 붕괴되기도 했다. 그러다 할 말이 생기면 멀쩡한 직통전화나 남북연락관을 놓아둔 채 관영 라디오를 통해 자기의 입장을 전파로 날려 보냈다.-138p쪽

북한의 고민은 결국 갈지자 행보가 되어 나타난다. 휴대전화를 개통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금지한다. 정보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정보화시대에 컴퓨터를 알아야 한다고 그렇게 홍보하면서도 인터넷을 개방하지 못한다. 당국이 엄선해주는 정보만 받으라고 하니 전문가들은 답답해서 죽을 노릇이다. 경제는 바뀌어도 사상 교육은 더욱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위협에 맞서서 국방력도 계속 늘려야 한다. 변화가 체제 변화를 의미한다면 그건 세상이 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변해야 하지만 변하면 안되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그러나 갈지 자 행보 속에서도 북한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 돈맛을 알기 시작한 주민들은 이미 화폐경제와 시장에 익숙해졌다. 변화의 핵심은 북한 경제의 체질을 개선해 세계 경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당국은 '더 높이 더 빨리' 뛰라고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다-196p쪽

2000년 8월, 평양 2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다시 만난 그는 전금진이라는 본명으로 회담에 나왔다. 그는 베이징의 4성급 호텔 일반실이 아닌 북한 최고의 고려호텔 스위트룸에 묵으며 회담을 지휘했다. 대동강 유람선상에서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1998년 회담을 진솔하게 회고했다.
"내 그때 조국으로 돌아가며 피눈물을 흘렸소. 남북대화 30년에 회담 탁자를 치며 고함을 치긴 그때가 처음이었소."
무엇이 그를 그토록 슬프고 분하게 했을까? 판문점에서 국회의장들과도 자신만만하게 회담하던 그는 굶주린 주민들을 대표해 베이징에 나와 비료를 얻기 위해 10여일이나 회담에 매달렸다. 회유도 해보고 소리도 쳐봤지만 그도, 그의 조국도 힘은 없었다. 받고자 하는 것은 많았지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패장이 돼 빈손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서 그는 없는 자의 설움을 통감했으리라.
서글픈 회상도 잠시, 그는 웃는 낯으로 남쪽 인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S선생이 가장 악질이었소. 그때 다 될 뻔했는데 거기서 트는 바람에 안 된 거요. 그런데 이제 다시 마주앉아 이렇게 웃으며 얘기를 하고 있지 않소."-202p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메라로 만난 ‘한국의 신’들 기대하세요
한국온 매그넘 전 회장 아바스
한겨레
» 한국온 매그넘 전 회장 아바스
사진기자가 인터뷰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자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란 출신 사진가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가 집단 매그넘의 전 회장까지 지낸 아바스(62·사진)는 평생 남을 찍어왔음에도 정작 자기 얼굴 전체가 사진에 나오는 건 꺼리는 사진가다. 실제 각종 자료에 나온 그의 얼굴 사진을 보면 손으로 동그랗게 카메라 렌즈 모양을 만들어 눈에 대거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대부분이다. “제가 점잖은 사진가라서 그럽니다. 영화배우도 아니고, 공인도 아니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요. 사진작가는 카메라 뒤에 서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바스는 회원 가입이 까다로워 전세계 47명뿐인 매그넘 작가들 가운데서도 3명뿐인 아시아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내년 〈한겨레〉 창간 20돌을 기념해 매그넘 작가들이 한국을 20가지 주제로 나눠 찍는 대형 프로젝트를 위해 최근 방한했다. 이번 〈한겨레〉-매그넘 기획전을 위해 그는 한국의 ‘종교’ 부분을 맡아 찍고 있다. 앞서 1998년 그는 개인 사진집 작업을 위해 방한해 한국의 종교에 대해서 이미 한차례 촬영한 바 있다. 아바스는 “한국에는 많은 신들이 있고, 카톨릭 신자나 크리스찬이면서 무속신앙을 믿기도 한다”며 “이번에 찍은 사진을 편집할 생각을 하면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아바스는 자신은 무교이지만 호메이니 때문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돼 이를 오랫동안 사진의 주제로 삼아왔다고 말했다. 미국 9·11 테러사건 이후에는 유일신을 믿는 문제를 들여다보면서 중동에서 유일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사진으로 작업해왔다.

한겨레-매그넘 기획전에서 ‘종교’ 맡아 작업
인쇄매체 퇴조? “인터넷이 사진을 구원할 것”
사진가에 “사랑 빠져라…튼튼한 신발 사라”

사진의 오랜 무대인 신문과 잡지 등 인쇄매체가 점점 힘을 잃고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열리고 있지만 아바스는 오히려 “결국은 인터넷이 사진을 구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짜 사진에 헌신하는 사람은 보도사진을 찍어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요즘 사진가들은 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원숭이도 사진을 찍고 있어요. 사진기자나 사진가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바스는 최근 사진의 흐름이 연성화하거나 순수미술 쪽으로 흐르는 데 대해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라며 매그넘 내에서도 사진의 합성과 조작을 놓고 격렬한 논쟁과 조정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런 논쟁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매그넘도 이제 끝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가 아나요? 어떤 의견이 매그넘을 이끌어 갈지는 모르는 것이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소재들과 이를 사진적으로 어떻게 접목하느냐가 더욱 중요할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보여지는 빛을,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가 젊은 사진가들에게 던진 말 한 마디를 소개한다. “사랑에 빠져라,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튼튼하고 편안한 신발을 사라.”

글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아바스의 사진집 <이란다이어리 1971-2002> 중 승리를 기뻐하는 혁명군.ⓒAbbas/Magnum Photos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7-04-27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판님, 이 자료 담아갑니다. 얼마전 카파 전을 보고 사진이 주는 감명에 대한
생각을 좀 달리 하게 되었지요. 매그넘의 전 회장이었군요. 아바스! 그가 찍을
우리나라 종교, 기대됩니다.

dalpan 2007-04-28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bbas라는 이름 철자땜에 매그넘 사이트에 가면 항상 맨 먼저 사진작가 분류에 올라있는 사람이었는데, 저도 회장이었는 줄 몰랐어요. ㅎㅎ 올해가 87년 민주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이고, 한겨레 창립도 이와 무관하지않아, 아마 대대적인 Project이 진행중인 걸로 알아요. 저도 그게 기대됩니다.
 

그의 큰 머리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키는 작고 머리는 거의 산발이었는데 그 산발로 그의 머리는 정말로 커 보였다. 지금도 그럴지 모르나 산발은 꾸미지 않은 자유로움의 표상이기도 하였다. 그도 그랬고, 김지하도 그랬고, 장선우도 그랬고, 백기완 선생에 이르면 단연 산발의 최고봉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그저 그의 노래에 묻혀 별로 중요한 얘깃거리가 못 된다.

  

그는 갔으나 그의 노래는 남았으니, 나는 아직도 그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처음으로 그의 노래를 불러댄건 고등학교시절 문예부 선배들과 우리들의 아지트 '토끼분식' 가게 문걸어 잠그고 기타치며 흥겹게 합창했던 '흐린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였지만, 이제 그의 노래는 생활속에 아주 깊숙히 박혀버렸다. 거리에서 '거리에서'를 부르고 다니고, 흘러간 옛사람을 생각하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고, 군대가는 친구들에게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주고, 달빛 좋은 밤이면 '혼자남은 방'을 부르고, 심히 괴로울 때는 '일어나'를 불러댄다. 그가 세상에 없었다면 아마 나는 더 음침한 김민기의 노래들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나의 노래는 나의 힘'이라던 그의 말처럼, 덕분에 세상사는 걸 좀 더 밝게 만들어준 그에게 늘 감사하며 노래를 한다. 너무 불러 지겨워졌다가도 다시 힘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들. 그게 그의 노래다. 불현듯 점심시간에 떠오른, 32살 꽃 같은 나이에 져버린 그를 그리워 한다.




부치지 못한 편지 : 김광석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그대 잘가라
그대 잘가라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07-04-25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맥주한잔에 노가리를 뜯으며 김광석에 대해 얘기하던 분이 있었어요. 그분은 저보다 딱 다섯살 많았습니다. 님의 오늘 글을 읽으니, 저보다 딱 다섯살 많으실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훗.

평안한 밤 보내세요!!

dalpan 2007-04-27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23이니...다락님은 낭랑 18세?

다락방 2007-04-27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쿡쿡.


(제가 지금 님께 제 나이를 알려드린거예요. 알라딘 서재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제 나이를. 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학다니던 시절에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았던 조카놈이 이제는 어엿하게 커서, 머리 빡악빡 밀고 군대에 들어갔다. 이제 니 한몸이 너만의 몸뚱이가 아니라 부모님의 것이고 가족모두의 것이며, 가장 소중히 지켜야 할 사람도 바로 너라는 노파심 가득한 말로 통화를 할 때,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그놈 때문에, 아~ 다 컷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눈물이 울컥했다. 세상에 기어다니던 놈이 어느새 커서 맞담배질을 하더니 이젠 되레 나를 위로하다니! 그 놈이 군대에 갔다.

     

그 날 저녁, 집 창가에 두었던 '장수매'는 발그스레한 꽃을 활짝 틔웠다. 세 송이가 핀 줄 알았더니 하나가 뒷편에 살짝 숨어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봉오리가 더 벌어졌다. 이놈들...이놈들... 무심히 물주고 바람 쐬어주었을 뿐인데 세상은 나름대로 다 제 역할을 하고 산다.


  

야생초에 살짝 발을 들여논 요즘에는 가지나고 잎사귀나는 하나하나가 다 새롭다. 애기남천을 키우다 다 죽여놓고, 대가 조금 굵은 놈으로 바꿔 전부 개보수했다. 결국 환경과 조건이 되지않으면 원하는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다 내 욕심일뿐...
물을 줄 때 이끼냄새가 참 좋다. 왼쪽 것은 애기남천이고, 오른쪽 웃자란 것은 옻나무이다.


  

개량된 애기남천 말고 내 키보다 더 큰 (어른)남천을 들여놓았다. 좁은 차로 장거리 이동에 몸살을 했는지 한동안 잎을 떨군다. 어제 발육이 떨어졌던 마른가지들과 웃자란 것들을 정리해주었다. 말 못하는 식물이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사람과 다 똑같아, 추우면 잎 끝을 붉게 변색시켜버리고 물 마르면 잎의 촉감도 뻣뻣히 평소와 다르게 만들어버린다. 이리저리 쑥쑥 가지 뻗는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니 버릴 건 버려야 튼실하게 크는 것은 사람이나 나무나 다 똑같다.

간질거리는 햇살에 하늘거리는 연초록 나무그늘에 누으면, 눈을 감아도 하늘이 보인다. 봄이니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07-04-24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갔네요, 조카. dalpan님 쓸쓸하시겠어요. 그래서 저렇게 조카 키만한 남천을 들여놓으신건가요. 죽이고 아파하지 마시고, 이번엔 잘 키우세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

아, 근데 정말 눈을 감아도 하늘이 보여요? 풋.

레와 2007-04-2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간질거리는 햇살에 하늘거리는 연초록 나무그늘에 누으면, 눈을 감아도 하늘이 보인다. 봄이니까.]

아.. 정말 근사한 표현입니다.^^
눈을 감아도 하늘이 보인다니.. 아항....-

dalpan 2007-04-2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갈 때가 되면 가야지요. 그냥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것이 더 맘에 걸리는구만요. 이번엔 말씀대로 애지중지 잘 키워봅지요... 저는 천년묵은 능구랭이 뱀파이어라 눈감고도 천리를 봅니다. 으흐흐흐..

레와님) 한번씩 입에서 나오는대로 썼다가 저도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딱 그 꼴입니다. ㅎㅎㅎ 레와님 서재에 가보니 멋진 사진들이 가득하더군요. 자주자주 들릅지요. 감사해요.

2007-04-25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dalpan 2007-04-2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님) 맞습니다. 그 꼬마가 군대갔습니다. 근데 여길 어찌알고 찾아왔소? 내가 알려줬나? ㅎㅎ 창립제때 만나서 얘기한거처럼 늙으니 이제 까막까막해서...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