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떠나 첫 직장에서 4월을 맞았을 때 학교에선 한창 전투준비를 해야 할 시기에 회사단지의 불빛들은 그저 흐리멍텅했다. 내일이 4.3인데 왜 걸게그림 하나 없고, 애도의 목소리 하나 없나싶었다. 그 적막함이 너무나 외로워 그날 사무실서 기숙사로 퇴근하는 흐린 불빛 어두운 길에서 홀로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불렀다.

이제 드디어 6월이 왔다.
 
87년 6월의 함성과 깃발은 천지에 거대한 물결로 흘러 넘실거리는 여울로 흘렀지만, 이제는 20년 전의 그 모습이 마치 미치광이의 환청과 환영같이 오간데 없다. 보라색 스카프의 민가협 어머니들보다, 함부로 허용하지 않는 색이라는 Purple을 주제로 한 신용카드사의 광고가 생각나는 요즘. 그래... 세월이 변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 끝자락에서 대롱대롱 매달렸던 청춘이지 않았는가?

군바리 천지인 남쪽 조그만 내 고향 길거리에 붙은 한 포스터에 포함된 이 사진을 보고선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면서 양철냄비 속 뜨건 물처럼 피는 부글거렸고 머리는 뜨거워졌다. 위에서 찍었으니 숨어서 찍은 것이고, 봉에 실린 힘은 때려 피흘리는 것보다 더 긴장되었으며, 불끈쥔 두 주먹은 불의에 견디지 못하는 양심이라 내게 얘기하고 있었다. 대학에 와서 5.18 보도사진들을 보고서야 이 사진이 화려한 휴가에 포위된 빛고을에서의 사진임을 알았다. 내 인생을 뜨겁게 한 첫번째 사진이다. (저는 요즘 이미지로 나를 돌아보는 중이다.)

회사일로 기업과 함께 전국을 누비던 대학방문행사도 거의 마무리 되었다. 작년에 기획을 해 올해 처음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잡일이 너무 많아 노곤한 일정이었다 싶다. 그러나 뜨거운 4월/5월/6월에 대학가를 얼쩡대면서도 일보다 더 무겁고 생소한 것은 학내 분위기였다.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분위기야 익힌 알고있는 터이나, 20년을 지나 맞는 그 뜨거움이 느껴지는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아, 아...요즘 친구들 공부열심히하는구나!!라고 좋게 생각하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 87년 6월 거리의 아이 ]                     [ 20년이 지난 그시절의 청년들 : 출) 전자신문 ]

신촌 Y대에서 이 사진쯤은 걸려야하지 않겠나 했던 것은 나의 보기좋은 환영이었고, 신촌 S대에서 고시에, 공기업시험에 매달린 친구들이 안타깝다는 근심가득한 친구의 목소리는 춤동아리의 현란한 몸짓 앞에서 허한 환청처럼 들린다. 그저 그 젊은 친구의 고운 말들이 되레 위안이 되고 고마울 뿐이었다.

[ 87년 6월 연세대 정문, 이한열 직격최루탄에 피격 ]

돌릴 수 없는 세월이고 돌려서도 안되는 시간이지만, 치열한 과거가 없는 미래는 썰물 앞의 모래성이다. 몸은 과거를 살고 눈은 미래를 보자고 홀로 걸을때마다 요즘은 되뇌인다. 그럼에도 지금은 6월이고, 나는 종로로 시청으로 쏘다니며 그 환청과 환영을 듣고만 싶다. 오늘을 살고있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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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05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해야 합니다. 이날을.

dalpan 2007-07-12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월이 훌쩍 지난 한참 늦은 답글이네요.죄송합니다.이날을 기억해야 할 사람이 한분 더 있으신것같아 한결 힘이 납니다.

2007-08-02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02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간결하고도 매서운 그 특유의 문장은 읽는동안 글 속으로 완전하게 몰입시키는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 병자년 청군을 맞아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파천한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둘러싼 항전과 화친의 수많은 말(言)들 속에서 보잘 것 없는 지리한 진지전을 그린 '남한산성'은, 말과 말이 다투고 말이 말을 넘어 정의와 명분을 논할 새도 없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지는 짧은 겨울의 긴 이야기이다. 시덥잖은 산성에서의 항전이 그의 휘몰아치는 글로 인해 긴박해진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명분의 결사항전과 실리의 화친이라는 것에 대한 대답도 없고, 새로이 일어선 변방의 강자와 스러져가는 대륙의 약자에 대한 편견도 없으며, 갓 쓴 사람에 대한 무지렁이 백성들의 원성도 그저 비웃음이 스민 담담함이다. 먹고사는 것에 지친 천한 인생들이 그에게는 약자이고, 힘 없어 오랑케에게 강탈당한 조국 역시 그에게는 고통 받는 자들의 하나이다. 그것을 지켜보고 품어내고 견디어 내어 오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산성만이 진리이고 정의이다. 

싸움과 화친이 모두 살고자 함이요, 그 둘은 다르되 다르지않다.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으로 대비되는 말들은 그러하기에 다투되 서로 통한다. 다만 전략이 없고 방법이 없는 힘없는 조국이기에 말들이 서로 도와 상승하지 못한다. 얼어붙은 한강을 건내주던 이름없는 사공과 대장장이 서날쇠 같은 천한 인생들도 그에게는 귀한 인생이다. 픽션이 넌픽션 같은 사적 리얼리즘은 괴로워하는 인생들을 관조하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그의 시선이 있었기에 더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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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1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2007-06-05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dalpan 2007-06-0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시간에 속삭인님) 괜한 과찬입니다. 미천한 저의 서재에 님들의 발길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외다. 항상 감사하오.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절판


-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로...
-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해서...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인가...아침에 대청마루에서 남쪽 선영을 향해 울던 울음보다도 더 깊은 울음이 김상헌의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김상헌은 뜨거운 미숫가루를 넘겨서 울음을 눌렀다.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김상헌은 허리에 찬 환도 쪽으로 가려는 팔을 달래고 말렸다. 김상헌은 울음 대신 물었다.

- 너는 어제 어가를 얼음 위로 인도하지 않았느냐?
- 어가는 강을 건너갔고 소인은 다시 빈 마을로 돌아왔는데, 좁쌀 한 줌 받지 못했소이다.

(중략)

김상헌은 돌어서는 사공을 불러 세웠다. 김상헌이 다시 물었다.
- 나를 따르지 않겠느냐? 궁색해도 너를 거두어주마.
나는 예조판서다... 새어 나오려는 말을 겨우 감추었다. 사공은 다시 대답했다.
- 아니오. 소인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소.
- 가야 하겠구나. 그럼 가거라.
- 서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쪽이 빠릅니다. 그럼...

사공은 돌아서서 얼음 위로 나아갔다. 김상헌은 환도를 뽑아들고 선착장으로 뛰어내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은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43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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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0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헌이 사공을 단칼에 내리치던 장면이군요. 가장 서슬 퍼른 묘사였어요.
님, 새로 단장한 서재가 아기자기한 레이스 식탁보처럼 예뻐요.^^

dalpan 2007-06-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런가요? 전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게 싫어 아직도 구닥다리 서재를 쓰고있어서 말씀하고나서야 식탁보를 봤답니다. 하하하.. 날잡아서 새 서재에 적응해야겠네요. 배혜경님의 노란 봄꽃무더기(빅 피쉬)는 항상 눈에 밟혀 아름답단 말씀을 드리려 했었습니다. 저 장면도 참 무참한 장면이었지요? 퍽퍽! 그래도 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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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짓거리 중 가장 예술적인 것은 사진이며...(제 생각에)
원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기에 자연히 건축, 도시계획 등에 관심 있습니다.
예술의 사회화된 모습이라 느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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