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정확히 말해 인간의 어린 탈을 쓴지 얼마 안 되어 이 놈의 신체가 아직
적응이 안 되었을 때...-_-
귀가 간지러워 손가락으로 마구 휘저으며
"우어어어어어~~"
하고 울부짖으면 어김없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S가 손에 길다란 은색을 들고서는,
"이리 누워봐. 파줄게"
말하면서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리곤 하였다.
그럼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벌렁 바닥에 누워 그 허벅지에 머리통을 갖다 바쳤다.
곤충들 스푼으로 쓸 것 같은 그 꼬딱지 만한 스푼형 은색 귀파개가 귀 속을 사각사각 탐색하는
노곤한 간지러움이 좋았었다. 벌린 내 손바닥 위로 노랗고 하얀 귀똥들이 놓일 때마다 어찌나
시원하던지.
나 귀 파고 있을 때 장난치자고 강아지가 와서 건드릴 때는 스푼이 내 고막을 건드릴까봐
무서운 것 보다는 '저리 가!' 하고 소리치는 S의 목소리와 함께 스푼이 귀 속에서 달각달각
사정없이 요동치는게 더 무서웠다..ㅡ.,ㅡ
그것은, 어린 나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누워서 귀를 간지럽히고 있다보면 스르륵 잠이 밀려오곤 했는데,
아직 '쾌락'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시절, 그것은 지금 생각하건데 바로 쾌락이었으리라.
잠이 올 정도로 노곤하고 느린, 기분 좋은 쾌락.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S가 귀를 파주지 않았다.
'이제 다 컸으니까, 혼자서도 알아서'라는게 무언중에 있던 거 같다.
왜 어릴 때는 내 '소유'였던 것들이 나중에는 하나 둘씩 사라져 갈까.
길을 가다가 아무 이유없이 소리를 지르는 것도, 길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들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걸 덥썩 집어서 집에 가져가도 '아무 소리' 듣지 않는 그 특권이라든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칠칠맞고 덜렁댄다.
육포에 찍어 먹는다고 이쁜 그릇에 마요네즈 듬뿍 담아 거실로 뛰다가 자빠져서 마요네즈만
바닥에 철푸덕 떨어져 전사했을 때는 여전히 어른들이 뭐라뭐라 잔소리 하며 챙겨주지만,
무거운 짐을 두고 '난 힘이 없어!' 하고 어리광을 부리면, 옆에서 보던 제 3자가 나보고 하라고
잔소리한다. 혼자 있을 때는 잘한다구. 혼자 TV도 들고, 책상도 옮기고, 복사기나 프린터도
혼자 고친다구.ㅡ.,ㅡ
하지만 어릴 때 부터 봐왔던 어른들 앞에서는 어리광 부리고 싶은게 잘못된 거야?
이젠 뭐든지 혼자 해야하는 나이므로, 내 대신 무언가를 남이 해주기를 원하면
집사나 비서를 고용해야...;;;
그냥 웃음 하나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것이 다 받아들여지던 때는 안녕~인가.
20대 초반에, 형제같이 자란 남동생 J를 오랜만에 만났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나보다 3살 어려 아직 10대였을 때?
그의 귀에 귀똥이 가득 있는 걸 보고 나는 반가워서 은색 스푼 들고 달려가,
"내가 파줄게!"
그러나 동생은 혼자 어디가서 다 파고 왔더라.. ㅡ.,ㅡ
나는 단지.... 어릴 때의 그 추억을 재생하고 싶었던 것인데...
서로의 허벅지에 누워 귀를 파준다는 것은 가족같이 허물없고 가식없는 사이여야
가능하겠지. 물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후반의 남동생에게 주책없이 '귀 파줄게'
라고 외친 내가 또라이로 보였는지도 모른다.(긁적)
나는 그가 내 '형제'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니었나 보다.
10대 초반엔 여자들이 나를 좋아했고,
10대 후반엔 남자들이 나를 좋아했다.
20대에는 그것이 번갈아가면서 왔다.
내게 성적인 추행을 처음 한 건 남자였고,
내게 첫키스를 준 건 여자였다.
내게 육체적인 결합을 숱하게 요구했던 것도 남자들이였고, 여자들도 꽤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남자였던 적도, 여자였던 적도 없었건만 그들은 달랐다.
그들은 진정한 나를 본 적이 없었고, 진정한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나를 좋아했다.
나는 인간 전체를 사랑할 수는 있어도, 한 개인을 사랑할 수는 없는 존재다.
나는 인간을 관찰할 수는 있어도, 내가 인간일 수는 없다.
그런 내가, 누가 되었든지간에 그들의 소중한 감정을 감히 깔아뭉갤 수는 없어
이리저리 피하다 보니 너무 많은 이들에게 상처 줬다는 것은 내 가슴에 쓰라린 멍으로
남아 있다. 어쩔 때는 그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펑펑 울었던 적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거쳐갔지만, 난 한 번도 그들에게 내 귀를 내보인 적이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내게 귀를 내보인 적은 없다.
그럴 날이 올리는 없겠지만, 서로의 귀를 파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오면
눈 딱 감고 한 번 미쳐볼게!!! 라고 크게 결심을 해보긴 하지만, 도대체 언제?
그래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이렇게 헛소리라도 지껄이는 중이다.
"내 귀를 파준다면 결혼해주겠어요. 당신이 더 이상 귀를 파주고 싶지 않아 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