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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처음 읽었다.
우연히, 다른 것 때문에 서점 안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구석진 곳에서 만난 그녀의 책,
[살인자의 건강법]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목에 끌렸고(오랜만에 추리물이나 읽어볼까 하는 내심으로)
책 뒷표지에 있는 그녀의 미모에서 나오는 묘한 매력에 끌렸다.
(노려보는 듯 그러나 감미로운 눈빛이 <제 3제국>에서 나오는 '안토니오' 닮기도 했었고)
그리고, 더 솔직해지자면, '프랑스 문단에 아멜리 노통브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고
천재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라는 그 문구가 궁금증을 일으켰다.
도대체 내용이 어떻길래? 어떻게 썼길래?
소설 속에서, 대문호인 프레텍슈타 파슈(젠장, 이 어려운 발음의 이름은 책을 덮을 때까지도
외워지지 않아서 컨닝을 해야만 하다니!) 노작가가 엘젠바이베르플라츠라는 병에 걸려서
(왜! 그냥 '연골암'이라고 하면 안돼?! 혀가 꼬일 지경이라고! ㅡ.,ㅡ) 시한부 인생 두 달 밖에
안 남아서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형식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정말이지, '내가 지금 드라마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소설은 온통
노작가와 기자와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다. 물론, 그 때문에 지루하지 않아서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지만. 엄청난 비계 덩어리에 추한 얼굴, 괴팍한 성격으로 기자들에게 마구 퍼붓는 파슈의
거칠고 예의 없고 때로는 선정적이면서 지극히 괴짜스러운, 그러나 무지하지는 않은 폭언들이
재밌었기에 다행이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멜리!
당신, 정말 너무하잖아! 아멜리, 당신이 글을 쓴 작가 본인이면서 스스로 스포일러를 하다니!!!!!
세상에, 제목을 보고 '누가 살인자일까?' '살인자의 건강법이란 무엇을 은유적으로 혹은 무엇을
꼬아서 말한 것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독자에게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그것도 초반부에 누가
살인자인지 미리 짐작하게 해주는 것은 너무 친절한 거 아닌가!
내가 너무 눈치가 빠른 거야? 아니야, 당신, 아멜리...정말이지. ㅜ_ㅡ
그런 식으로 쓰면 눈치챈단 말이야. 누구라도. 그게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왜 살인자가 살인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름대로 재밌었어. 또.. 파슈 노작가의 입을 통해서 나온 꽤 괜찮은
표현들을 건질 수도 있었으니까.
(p.13)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작가가 되지는 않았을 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글을 쓴다는 말씀이십니까?"
(p.95)
"귀는 입술의 울림 상자요. 내면을 향한 입이라고. (......)
단어들은 스스로 소리를 질러대거든. 자기 안에서 울려 나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지."
(p.97)
"글을 쓴다는 건 소통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오. 왜 글을 쓰냐고 물었으니,
매우 엄정하면서도 매우 배타적인 대답을 들려드리리다.
그건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요. 달리 말해 쾌감을 느낄 수 없다면 절필해야만
한다는 얘기지."
(p.195)
"글은 말이 멎는 순간 시작된다오. 정말 신비스러운 순간이지.
표현 불가능한 상태에서 표현 가능한 상태로 넘어가는 순간 말이오.
말과 글은 교대로 이어지지 절대 겹쳐지는 법이 없다오."
물론, 파슈가 이렇게 점잖고 나름대로 지적인 대화를 한 것은 %로 따지자면, 전체 책
분량의 극히 몇 % 뿐이다. 나머지는? 온통, 괴팍하고 상대의 말에 조롱하고 호통을
치는 차마 입에 담기 뭐한 단어들까지도 서슴지 않고 자신의 교양없음을 과시하는
말들 일색 뿐이다. 그럼에도 파슈의 대화 때문에 중독되듯이, 한 번 빨기 시작한
빨대를 놓지 못하고 계속 쪽쪽 거려서 그 차가움 때문에 뇌가 마비될 것 같은 통증을
불러 일으키는 밀크 쉐이크처럼. 파슈의 익살스럽고 괘변적이며 신랄한데다 굉장히
거만스런 그의 대화가 어찌나 시원하게 공중을 향해 내질르는지.
'촌철살인적인 대화'? 글쎄, 난 가려운 부분을 박박 긁어서 시원한 감마저 들던데.
결국, 아멜리 노통브가 책 속에 스포일러를 던지는 어이 없는 짓을 했어도,
나는 그녀의 다른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한 권만 더 보자, 그것을 보고나서도
'도대체 왜 그녀의 소설이 천재라는 찬사를 받기에 마땅한가?' 라는 의문이 들면,
내 타입이 아닌 거야. 그 찬사를 받았던 때가 92년도 였다는 것을 참작하더라도
나는 도무지 그 정도의 왕관이 왜 주어졌는지 이해가 안되니까...
솔직히 나는 고프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천재가 만들어 놓은 걸작을 맛보고 싶다는 배고픔.
이젠 웬만한 - 독특하고 괴짜스럽고 깜짝 놀라서 즐겁기까지 한 - 소재들을
다 접하다 보니... 더욱 더 자극적이며 더욱 더 신선한 것이 먹고 싶어서 이 책에
기대를 많이 했나 보다.
그래도,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제법 괜찮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