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우리 동아리에서는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시전을 열었다. 회장이 시전 준비합시다, 라고 공표하면 캐비닛 위의 묵은 나무판들을 내려 색지를 뜯어내고 물감을 닦아냈다. 총무가 회비를 걷어 새 재료를 준비하면 일주일 쯤 전부터 시전 준비에 들어간다. 선배들은 주섬주섬 꼬불쳐 둔 습작시를 내밀며 속삭인다. 깐따삐야, 네가 한번 잘 써봐. 당시 나는 그것을 무슨 영광쯤으로 생각하고 없는 재주 발휘해가며 정성을 기울였다. 평소 따르던 선배가 손수 내 시를 시판에 옮겨주고 어울리는 그림까지 그려주면 그것만큼 황송한 일도 없었다.

  시판을 꾸미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요철이 두드러지지 않도록 나무판을 깨끗이 청소해야 하는데 귀차니즘의 극을 달리던 남자 동기들은 대개 종이를 덧씌우는 방법을 택했다. 쓰다가 틀리면 덧씌우고, 틀리면 또 한 장 덧씌우고 하느라 종이만 낭비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도 두꺼워서 나중에는 총도 못 뚫을 지경이 된다. 그처럼 한지나 색지를 덧씌우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나뭇잎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고전적이면서도 손쉬운 방법이다.

  나는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 나무판에 포스트칼라로 연하게 색을 칠하고 그 위에 글씨를 쓰곤 했다. 자칫하면 지저분해질 수도 있어 조마조마 했는데 선배들은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멋이 있다고 했다. 다만 가급적이면 글씨는 직접 붓으로 쓰고 프린트를 해서 붙이거나 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때는 컬러프린트로 출력하자거나 주문 제작된 판넬로 하자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비하느라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도 들었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자발적 고통이자 즐거운 노동이었던 까닭이다.

  시전 준비의 또 하나의 재미는 뭐니뭐니해도 출출한 저녁, 야식을 사다먹는 일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기숙사 근처 가게를 이용하곤 했다. 비좁은 골목 옆에 자리 잡은 몇 평 안 되는 작은 슈퍼였는데 주로 자취생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순대와 떡볶이, 어묵 같은 것을 팔기도 했다. 특히 주인아주머니가 상당한 미인이었다. 친절하고 고상한 분이었는데 뭐랄까. 나 같은 여자가 왜 여기서 순대나 썰고 있나, 가 아니라 순대 하나를 썰어도 또박또박 참하게 썰어 주시는, 그런 분이었다. 구멍가게이긴 해도 항상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언젠가부터 우리 얼굴을 기억하고 덤을 얹어주시기도 했다. 나는 여자인데도 그런 아내와 사시는 주인아저씨가 부러웠다.

  그렇듯 복작복작 준비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날. 몇 점은 이젤에 얹고 이젤이 부족하면 나무나 돌에 기대놓거나 끈을 끼워 나뭇가지에 매달아놓기도 한다. 대략 2주에 걸쳐 아침 일찍 널었다가 오후 늦게 걷어오느라 귀찮을 법도 했으련만 그땐 뭐가 그리 마냥 즐겁고 신이 났었는지. 전시된 작품들 한켠에는 책상 위에 방명록 노트와 펜, 음료수도 놓아둔다. 공강 시간 틈틈이 친구들이 구경 오면 부끄부끄하며 소개해주기도 하고 모르는 이들이 적어놓고 간 방명록을 읽어보며 아무개 시가 좋다, 아무개 시를 보면서 공감했다, 내내 번창하시라는 흔적들 속에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선배들에게 악평을 받았던 시가 인기를 끌기도 하고 비교적 호평을 받았던 시가 외면당하는 의외의 경험도 하면서 한껏 들뜬 봄과 가을을 보냈다.

  그리고 숨은 연정의 대상, D선배. 수업을 마치고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편에서 어슬렁어슬렁 한 남자가 걸어온다. 눈과 입가에 장난기가 그득한데 나는 그를 못 본 체 한다. 그는 나무에 숨어서는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는 끝내 눈길을 주지 않고 다른 동기들과 계속 수다를 떤다. 결국 다른 동기가 어머, 선배님! 언제 오셨어요? 하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앉는다. 방명록을 쭉 읽고 나서는 나랑 볼펜 바꾸자, 나랑 끝말잇기 하자는 둥 유치한 대화를 걸어온다. 나는 그럼 정말로 볼펜도 바꾸고 끝말잇기도 하면서 선배와 놀았다. 선배의 매력은 상대방이 질릴 때까지 뭉개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한참 재밌게 놀다가도 어느 순간 반짝 엉덩이를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와는 전혀 대조적인 선배도 있었다. 좋은 것도 오래 하면 질리기 마련이고 나쁜 것도 짧기만 하면 아주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지금도 동아리 후배들은 꽃이 피고 낙엽이 질 때면 시전을 연다. 해마다 가을에는 졸업한 선배들을 초대해 추억을 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도 마련하고 있다. 동아리를 떠올리면 나로서는 항상 빚진 느낌이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잘못했던 것만 후회로 남는다. 선배들한테는 뭣도 모르고 까불기만 했고, 동기들한테는 솔직하게 대한답시고 간혹 상처를 주었고, 후배들은 별로 잘 챙겨주지 못했다. 내가 그곳에서 수강료 한번 지불하지 않고 배운 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데 말이다. 특히 수험 준비 제대로 해보겠다고 한 마디 얘기도 없이 칩거했던 일은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다. 다시 만난 선후배들은 하나같이 이해한다고, 나였어도 그랬을 거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지 내가 정말 잘했기 때문은 아니다. 내 그릇의 크기가 딱 그 정도뿐이었던 것이다. 그저 사람은 있을 때 잘해야 한다. 나의 지금이 앞으로 내가 힘들 때, 허전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면 오늘 하루, 내 곁의 사람들이 더 소중한 느낌이다.  

  아직도 어둑어둑하던 동아리방, 코끝에 은은히 스미던 물감 냄새, 나무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물감과 종이를 바르고 그 위에 손수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쉽게 찍어낼 수 없는 기억. 바늘이 가리키는 아날로그 시계의 4시 30분은 디지털 시계의 4:30과는 분명 다르다. 30분에서 31분으로 움직이는 그 공간을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시간의 흐름을 탈 줄 아는 아날로그의 세계.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분절적인 생활의 편의, 그 이상이리라. 그때 내가 직접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햇살 아래서 낙엽을 밟으며 벗들의 작품들을 하나씩 세워놓는 노동을 마다했다면, 나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외롭고 못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의 기억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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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2-0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야 원....공대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이런 낯설은 분위기...

L.SHIN 2009-02-07 06:01   좋아요 0 | URL
공대에서는 저런 것을 안하나요?

Mephistopheles 2009-02-07 13:38   좋아요 0 | URL
막걸리 더럽게 마시기는 했어도 시전같은 건 안했답니다.
(근데 왜 꼭 결슴에선 건축과와 토목과가 만나는지 그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L.SHIN 2009-02-08 06:57   좋아요 0 | URL
결슴은 무엇인가요?
(분명,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내가 물어볼 줄 알고 쓰신게야..-_-)

깐따삐야 2009-02-08 14:36   좋아요 0 | URL
참고로 D선배도 공대생이었습니다. 메피님. 모든 공대생이 다 그렇게 막걸리만 열라 잡수시는 건 아니라구욧! 하긴... 과에서는 그랬는지도? 흠흠.


Mephistopheles 2009-02-08 14:49   좋아요 0 | URL
결슴은 결승의 오타입니다..^^

L.SHIN 2009-02-09 05:09   좋아요 0 | URL
메피님도 오타를 낸다. 오타를 낸다. 오타를 낸다. 흐흐흐흐...

Mephistopheles 2009-02-09 09:37   좋아요 0 | URL
그래도 엘신님처럼 ㄱ ㅕ ㄹ ㅆㅆ스 ㅇㅇㅇ 우히히~! 같은 오타는 아니네요.=3=3=3=3

L.SHIN 2009-02-07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잠깐, 그 따뜻한 햇살 아래에 함께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할 뻔 했습니다.(웃음)
덕분에 저도 기억이 났어요. 저도 14~15살 즈음에 저런 것을 한 기억이 납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자작시를 써서 판넬에 끼우고 멋을 내었던.^^
어떤 시를 썼는지도 기억이 안납니다. 하지만 즐거웠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나 역시 아날로그 시계를 좋아합니다. 가끔, 심심할 때면 혼자 바닥에 누워서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초 사이마다 시간을 얼마나 더 쪼갤 수 있는지 손가락으로 바닥을 딱딱딱 치곤 하지요.(웃음)

자, 깐따님의 아날로그에는 ☆☆☆☆☆

순오기 2009-02-07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리땐 시화전이라고 했어요.
판넬에 물바래기로 종이 붙이고 포스터칼라로 색칠하고 글씨 잘 쓰는 친구가 쓰고...내게도 추억이예요!^^
특히나 연정의 대상에 취하는 태도~ 공감^^ ☆☆☆☆☆

L.SHIN 2009-02-08 06:58   좋아요 0 | URL
물바래기는 무엇인가요? (갸우뚱)
아날로그 모으기 하면서 새로운 단어도 덤으로 수집하네요 ㅎㅎㅎ

순오기 2009-02-08 07:41   좋아요 0 | URL
물바래기는 판넬에 종이를 붙일때 종이 전체에 물을 펴바른 후 판넬에 붙이는 거죠. 그 물이 마르면서 종이를 팽팽하게 당겨주니까 울지 않아요. 그렇게 팽팽해진 종이에 색칠하고 그리고 글씨를 쓰죠~~^^

L.SHIN 2009-02-09 05:08   좋아요 0 | URL
와~ 새로운 단어를 알았다! +_+ (나중에 그렇게 해봐야지~)

hnine 2009-02-0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 학교 다닐 때에도 '시화전'이라고 불렀는데.
중학교 때 저도 내본적 있어요. 손이 많이 가더군요.

L.SHIN 2009-02-08 06:58   좋아요 0 | URL
아항~ 시와 그림이 함께 있어서 그렇게 부르나보군요. ^^
저것은 정말 오래 걸리는 작업이죠!

무해한모리군 2009-02-07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화전 저도 고등학교 때 문학동아리를 해서 해본적이 있어요..
사실 제 첫사랑과의 첫데이트도 시화전 초대장을 들고 여학교로 처음 온 그 친구와 둘이 학교앞 떡뽁이집에서 였는데 하하하
어쨌든 제 시는 저희 어머니만 좋아하셨다는 ㅎㅎ

L.SHIN 2009-02-08 06:59   좋아요 0 | URL
으헤헤~ 하나의 주제가 나오면, 모두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이 아날로그!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