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고 나오는데 거실에서 C가 말했다.
"비디오 볼거야?"
"비디오 빌렸어?"
"엉" (빌렸다는 대답)
"어" (보겠다는 대답)
S는 방에서 컴퓨터와 놀고 계시고 C는 거실에서 케이블 영화를 보고 계시고
나는 오후 내내 내 방에서 시체처럼 자다가 일어나서는 비디오 러브콜을 받아주시고.
내 방의 장식장에도 DVD가 가득하고, 거실의 TV 밑 서랍장에도 DVD가 가득하건만,
이상하게 우리는 비디오 빌려보는 것을 좋아한다.
비디오 아저씨가 오래되서 골골 거리는데도 우리는 굳이 비디오 테이프를
비디오 아저씨 입 안에 밀어넣어 주는 것은,
C와 내가 아날로그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습관 때문일까.
어쨌거나 빌린 테이프를 보니 한글로 '다크 나이트'라고 써 있고
무섭게 생긴 남자가 표지에 있길래, (그것이 비디오 [하]편이었지)
"이거, 공포영화야?" (난 호러물을 싫어한다)
"배트맨이잖아" (약간 짜증섞임과 어이없음이 섞인 목소리..-_-)
뭐야, 난 [상]편 표지를 못봐서 몰랐단 말이야. (거기엔 배트맨이 떡 하니 있어주었다)
전에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포스터를 봤을 때 내 반응은,
'흥, 난 배트맨 안 좋아해' 였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다크 나이트] 영화의 평이 좋은 것을 보고서 '재밌나보다' 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내 거실에 와서 기다릴줄이야.
어차피 밥을 먹는 동안은 TV를 볼 생각이었으므로 아무 생각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결과는?
"재밌네~" 였다.
영화 보는 내내 전편을 보지 못했던 나로써는 '뭐야'를 연발했고, 옆에서 C는 설명하느라 바빴다.
리뷰를 쓸만한 건덕지가 없어서 페이퍼에 쓰기는 하지만 인상 깊었던 것이 2개 있었다.
하나는, 배트맨 주인공이 내가 좋아하는 [이퀼리브리엄]의 그 멋쟁이 총잡이였고!!! (>_<)
하나는, 도시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두 배에 악당이 폭탄을 놓고 시험하는 장면이었다.
하나의 배에는 선량한 시민들이 타고 있었고(그 '선량한' 이라는 수식어는 흉악 범죄를 안 저질렀다는 것에서
선량하다는 것이지 과연 그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사소한 그러나 비열한' 잘못들을 안했을까?)
하나의 배에는 흉악한 범죄인들이 타고 있었다.(그 '흉악한' 이라는 수식어는 강간/살인 등을 뜻하는 것이었겠지만
과연 그 범죄인들 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된 자들이 없었을까?)
어쨌거나, 악당은 '사회실험'을 한단다.
배의 마이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서로에게 폭탄 기폭장치를 주면서 상대방의 배를 폭파시키면
한 쪽은 살려주겠다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고약한 실험이 또 있을까?
예상했겠지만 양쪽 모두 의견이 갈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연히 '선량한' 배 쪽의 사람들은 '저 쪽은 범죄자들이잖아. 우리가 죽을 필요는 없다' 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의 '민주 시민'답게 찬성과 반대를 투표하잔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투표를 냉정히 한다는 것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시간은 계속 흘러, 10분..20분 정도 지났을까?
'선량한' 배의 투표 결과는 찬성 쪽이 396표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의외였던 것은 반대 표가 160 이나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중에서도 '그렇다고 우리가 범죄인들의 목숨을 함부로 할 권한은 없다' 라는
인도주의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일까.
'흉악한' 배에서는 키 크고 덩치 좋은 - 딱 봐도 범죄인들 중에서도 우두머리나 될 것 같은 - 흑인 남자가
망설이고 있는 배의 캡틴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한다.
"기폭장치를 내게 줘. 당신이 10분 전에 못한 것을 내가 하겠다. 나한테 억지로 뺏겼다고 말해라"
'아, 결국 흑인이 비난 받을 각오를 하고 터트리는구나' 라는 멍청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그 흑인의 눈빛과 목소리는 '어른'다운 깊음이 보였으니까.
역시나 흑인은 기폭장치를 창 밖 바다 속으로 던져 버렸다.
같은 시각, 찬성표가 많은데도 망설이는 캡틴을 대신해 한 시민 남자가 기폭 장치를 자신이 터트리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도 못하고 다시 내려놓는 장면이 나온다.
브라보~!!!
악당 조커가 원하던 결과는 안 나왔다.
어차피 영화에서는 '있는 폼' 잡는게 당연한 공식이므로 저럴 것이라 생각을 해서인지 감동은 없었지만
현실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다 저렇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에서는 서로 미쳐 날뛰다가 누군가가 실수로 기폭장치를 누르는 것의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멋있는 장면이 꽤 있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진을 첨부하고 싶지만 귀찮은 관계로 패스 -_-)
배트맨이 야경이 펼쳐진 도시 건물들 사이로 멋지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고,
배트맨이 특수차에서 분리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게 멋있었고,
배트맨이 악당을 향해 고층 건물의 유리벽을 깨고 정말 박쥐처럼 날아들어오는게 짱이었다.
그런데 악당 조커의 우스꽝스럽고 별종답게 행동하는 장면에서는 왜 '잭 스패로우' 선장이 떠올랐으며,
배트맨의 비밀 아지트를 보면서 '어디서 많이 본 장소..' -_- 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까. 하하하하..;;
어쨌거나 [이퀼리브리엄]에서 뽕 반해버린 그 주인공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만나서 무지 좋았다는.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배우 이름도 모르는건 뭐냐..)
웃긴 것은,
한글 [다크 나이트]를 보았을 때는 'Dark night' 인줄 알았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화면에 펼쳐진 제목을 보고서야 'Dark knight' 였다니.
'뭐, 어때! 어차피 철자 한 개 차이인걸!' 하고 우기기엔 뜻이 너무 틀리지 않은가.
미국은 끊임없이 영웅을 만드는 영화를 원한다.
그것은 그만큼 현실에서 영웅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짧은 역사를 영웅으로 대신하고 싶은걸까,
그것도 아니면 영웅을 추대하는 사회적 문화 특성 때문일까.
미국이 굳이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영웅을 추대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을 대신한 대리만족일까,
아니면 같은 인간에게서도 뛰어난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