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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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아우라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인류 문학의 거장 마르셀 프루스트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기 전에 사전 정보를 최대한 차단하고 오로지 텍스트 자체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맛보려고 노력한다. 현대 문학과 달리 고전은 두 가지 시점으로 바라본다. 첫 번째는 ‘당대성’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힌 사회, 역사적 배경과 문화, 사상적 토대가 고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는 ‘현대성’이다.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살아가는 나의 관점이다. 이해와 공감, 재미와 감동은 문학의 가장 큰 효용이지만 내가 즐길 수 없다면 굳이 책장을 넘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지극히 사적인 허구적 자서전 또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유대인 배척주의, 드레퓌스 사건 등은 당대에 가장 첨예한 사회적 이슈였다. 한 사회의 가치판단, 집단적 무의식은 오랜 전통과 문화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지향점,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로 판가름 난다. 프루스트가 어떤 이념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소설은 아니다. 다만 무엇을 쓸 것인지, 또 어떻게 쓸 것인지에 관한 거대한 자전적 작품론 혹은 작가론으로 읽히는 건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이 갖는 형식과 내용 때문이다.

1부 ‘스완 부인의 주변’은 파리 샹젤리제의 겨울이 배경이다. 화자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스완 부인을 바라보는 관점,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2편 ‘고장의 이름-고장’은 발베크의 여름이 배경이다. 1부에서 작가 베르고트가 화자의 글쓰기 혹은 작가로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면 2부에서 화가 엘스티르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는 게 아니라 인상파 화가는 ‘빛’에 의해 보이는 대상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이 질베르트와 어떻게 달라지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이행하는 과정,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스완과 귀족을 상징하는 게르망트와의 관계 혹은 대립은 1800대 후반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을 벨 에포크가 아닌 조용한 변화와 갈등의 시대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물론 철저하게 그리고 지극히 사적인 기억 혹은 추억 속에서 반추하는 방식을 선택한 프루스트의 독특한 서술과 묘사, 어마어마한 만연체 문장, 사건과 감정에 대한 표현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독창성과 개성을 드러낸다. 문체가 곧 작가다. 그런 면에서 프루스트의 아우라는 곧 문체에서 나온다고 느꼈다.

신흥 부르주아 vs 전통 귀족 계급의 갈등과 대립의 서사의 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거대하고 지루한 문체에 함몰된 독자가 읽어내는 것은 베르뒤랭 부인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차이가 아니라 전기와 전화가 보급될 19세기말 유럽 사회를 바라보는 프루스트의 고현학이다. 콩브레에서 샹젤리제를 거쳐 발베크에 도착한 프루스는 유아에서 소년으로 그리도 이제 청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자기 삶의 주체로 홀로 선다. 인상파 화가로 등장하는 엘스티르는 “원인부터 설명하지 않고 우리 지각이 받아들이는 순서에 따라 사물을 제시”한다는 말로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한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관점이 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 혹은 선택과 판단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세상에서는 ‘인식’보다 ‘지각’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집합은 아닐까 싶었다. 인상파의 명암대비가 세계를 당시 세계를 보는 유럽인의 눈이었다면 또 다른 관점으로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는 화가도 있었으나 결국 프루스는 인상파의 위대함이 ‘시간’ 속에 숨어있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의 흐름이 곧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편은 그렇게 ‘시간’이라는 주제와 꽃과 소녀들의 대비를 통해 프루스트의 화양연화 혹은 자기 삶의 벨 에포크 시대를 그려낸 건 아닌지 모르겠다.

10년 동안 번역에 매달린 프루스트 전공자 김희영은 해설에서 “작가의 창조적 자아는 그 도덕적 인격이나 겉모습, 즉 사회적 자아와는 다르다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스완과 오데트, 베르고트와 엘스티르, 질베르트와 알베르틴 혹은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철저한 주관적 변용을 통해 재해석된다. 그러나 당대를 함께 했던 실존 인물과 현실은 관계 형성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사건과 사고를 설명하거나 이것이 그대로 문학적 알레고리로, 때로는 웅숭깊은 은유로 발현되는 것은 프루스트 읽기의 또 다른 재미이자 진입장벽으로 독자들에게 깊이 읽기를 강요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크레이프 케이크를 떠오르게 한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와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4권을 읽은 후의 감상이겠으나 정성스레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의 질감을 느끼게 한다. 똑같은 층위의 반복일지라도 또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아직 멀고 긴 시간 여행이 기다리고 있겠으나 7편의 소설이 따로 또 같이 읽혀도 무방하다. 어차피 한 인간의 일생도 찰나에 불과하며 어떤 시간의 단면도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않는가. 사랑과 이별과 망각의 고통이 이 작품의 주된 리듬이라면 이제 겨우 사랑과 이별의 크페이프 한 조각을 시식했을 뿐이다. 읽기는 어려우나 여운은 길고 입맛은 몸에 남을 듯하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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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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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객관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다 똑같은 수준으로, 필수불가결하게 중요한가요? -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22쪽

예쁜 사람보다 귀여운 사람을 좋다. 예쁜 건 꾸밀 수 있으나 귀여움은 사람이나 사람의 본질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남자든 여자든 후천적 노력으로 멋진 몸을 만들고 메이크업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도 있으나 귀여움은 나이브한 상태 혹은 타고난 특성에 가깝다. 귀여움을 연기할 수는 없다. 타고난 아름다움을 폄훼하는 게 아니라 귀여움에 관한 생각일 뿐이다.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는 대체로 시간을 견딜 수 없지만 귀여운 사람은 세월을 뛰어넘는다. 어떤 형용사가 빚는 이미지는 개인마다 다르게 갈무리되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려워 사회적 언어로 공감하기도 쉽지 않다. 시니피앙에 의해 형성되는 시니피에 또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니, ‘예쁘다’와 ‘귀엽다’를 구별하거나 차이를 드러내는 일은 부질 없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물이 끓는 비등점, 곡률이 바뀌는 변곡점을 지나면 부분적으로 각개 약진하던 기술들이 통합되어 혁명적 변화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너지 효과를 예상하는 건 첨단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쉽지 않다. 오히려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역할에 충실한 과학자보다 가당치 않은 상상력으로 미래를 보여주는 예술가들에 의해 인류는 진보를 거듭해온 것처럼 보인다.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가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모욕일 수 있으나 스스로 ‘당대 인간의 삶과 사회’에 방점을 찍고 있는 장강명의 소설은 그래서 상상적 현실을 가능케 한다. ‘월급사실주의 소설가, 단행본 저술업자’라는 소개가 반가운 이유다.

프로필 사진의 보정이나 인공지능 어플 사용으로 외모를 마사지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면 각자의 눈에 어플을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 그 자체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장치, 모든 사람을 멋지게 바꿔주는 도구가 있다면 모두가 윈윈 게임이 아닐까. 외모 콤플렉스 따위가 없는 세상도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표제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사소하지만 실현 가능한, 매우 현실적인 접근이라서 오히려 신선했다. 미래는 알 수 없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도 불안을 숙명으로 안고 사는 현대인에게 그들–예술가 혹은 과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가늠할 수 있는 내일을 예고 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에 무관심한 건 아닐까. 어차피 각자 보고 싶은 걸 보고 믿고 싶은 걸 믿으니까. 팩트 체크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 사실을 압도하는 일상이 오히려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사회 현상에 기인한 소설가의 상상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의 삶과 사회를 고민한다. 단편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오마주이자 패러디이며 재해석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문제의식은 종횡무진 시공을 초월하지만 결국 ‘인간과 사회’에 천착한다. 우리는, 아니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 시대정신을 말하는 사람은 정치적이며 밥그릇을 쳐다보는 사람은 근시안이다. 허나, 우리가 사는 세상과 오늘의 현실은 정치적 근시안과 ‘을’들의 전쟁으로 피가 튄다. 자신의 계급 이익과 무관한 맹목적 지지와 비난이 초래하는 결과가 참혹하다.

「사이보그의 글쓰기」와 「데이터 시대의 사랑」은 「아스타틴」의 상상력과 결이 다르다. 지극히 현실에 바탕을 둔 상상과 기대와 욕망에 바탕을 둔 현실은 차이가 크다. 일곱 편의 단편이 한 권으로 묶이면서 이 소설집은 현실적 SF, 아니 작가의 주장대로 ‘STSscience, Technology, Society SF’라고 불러도 좋겠다. 명칭이야 어쨌든 과학 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고민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충분히 의미가 있고, 다분히 매력적이다. “과학기술은 이제 여러 영역에서 실존적 위기를 일으키고 있고, 나는 문학이 여기에 대응해야 하며,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며 장강명은 소설이 나갈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장강명의 등단작 장편소설『표백』, 르포『당선, 합격, 계급』등 지속적으로 그의 시선이 놓인 자리와 관심사가 사회학적 상상력과 닿아 있다. 문학의 역할과 기능이 모호해진 시대다. 소설보다 재밌는 게 넘치는 세상이다. 문학의 종언을 외치는 대신 문학의 변신과 지평의 확대를 모색하는 작품을 기대하는 건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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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가슴에 닿는 문장에 밑줄을 치고 필사하거나 사진을 찍습니다. 가끔 저는 연필이 없거나 메모지가 없을 때 급한 마음에 책 모서리를 접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접어놓은 책 귀퉁이는 귀여운 강아지의 귀처럼 보입니다. ‘도그 이어dog-ear’라는 영어 단어는 책장의 ‘모서리를 접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준비하며 가제를 <생각의 모서리를 접다>라고 지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삶엔 쉼표가 필요하고, 모서리를 접어 놓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현실과 일상 때문에 책읽을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책을 멀리하니 지금-여기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이 책은 도서관에 갇힌 인문학, 현실과 유리된 테스트를 거부합니다. 대체로 우리가 겪는 삶의 문제들은 때와 장소와 달라졌을 뿐 누군가 이미 겪었던 일들입니다. 기시감이 들 정도로 비슷한 고민을 책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밑줄을 그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혹은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은 문제를 안고 삽니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니라는 건, 그 고민의 깊이와 넓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 방법의 실마리를 찾고,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살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히,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거나 함부로 충고하는 주제넘는 짓을 할만한 깜량은 없습니다.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잔소리는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정도는 눈치껏 알만한 나이가 됐으니까요. 다만, 타인과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 인류가 쌓아온 인문학의 개념들은 지식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 삶에 적용되고 나의 현실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만의 고통과 슬픔, 내가 겪는 절망과 분노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살피는 동안 우리는 한발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나이가 먹어 늙는 게 아니라 성장을 멈추는 순간 노인이 됩니다.

젊꼰이 되지 않을 권리, 여전히 성장하는 노인이 될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각자의 몫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대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 성장하는 기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바틀비, 메데이아, 소스케, 영화 <위플래쉬>와 <세렌디피티>, 미드 <오자크> 그리고 발터 벤야민과 마르크스와 칼 융까지 잡다한 이야기들을 통해 선택, 속도, 시선, 사회적 상상력, 시간, 성장을 주제로 익숙하거나 낯선 개념들을 설명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들의 문제를 점검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책을 만나셔도 좋고 개인적 고민의 실마리를 찾으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모든 텍스트를 오독할 자유와 권리를 가진 독자의 몫일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힘겨운 모든 틈과 틈 사이로 스미는 빛을 따라가는 시간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늘 그러하듯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삶, '나'의 시간들만 오롯이 내 앞에 남겨져 있으니까요.

책이 나올때마다 말포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애정과 수고로움을 보태주시는 편집자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출판사 관계자 모든 분들의 고민과 노력으로 탄생한 책입니다. 부족한 점은 오롯이 제몫이지만 읽을만하면 모두 도움을 주신 분들의 덕분입니다.

계속해서 읽고 쓰는 삶을 이어갈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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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Philos 시리즈 4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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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지막 3개월간 주제는 「신화」였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신화는 공동체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민중들의 생각과 경험과 기억이 보태진 집단 창작물이 바로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기록하면서 현재의 형태로 고정되었으나 기록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니 원본은 의미가 없고 디테일에 목숨 걸 필요도 없습니다. 세계 각국의 신화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문명 시대에도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21세기에도 라그나로크 같은 게임의 세계관을 제공하며 스타벅스 커피잔에도 세이렌이 새겨질 만큼 자본주의 첨병으로도 활약합니다. 그래서 조지프 캠베은 “꿈이 사적인 신화”라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라고 정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종횡무진 세계 각국의 신화를 누비며 비교 신화학의 전설이 되어버린 저자에 대한 찬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1987년에 세상을 떠난 조지프 캠벨의 이 책은 199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1992년 이윤기가 번역했고, 2002년 개정판이 나왔다가 2020년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싶은 책이지만 배경지식이 전혀 없거나 신화 입문용으로는 조금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너무 쉽고 재밌는 콘텐츠에 익숙하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적당한 난이도는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 빌 모이어스는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인상적인 발언인데, 이 말은 조지프 캠벨이 천착했던 칼 융의 ‘집단 무의식’을 설명합니다. 신화는 근대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부터 군집 생활을 했던 인류 공동체의 삶과 꿈을 반영합니다. 원형적 상징으로서 자연에 대한 공포,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아 신화는 태초의 인류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조지프 캠벨은 “‘산타 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導師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 클로스는 부모와 자식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 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 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며 동심을 파괴합니다. 종교와 신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태도가 객관적일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내재한 서양의 전통과 문화와 달리 우리는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 결속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화,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그게 무슨 삼각김밥 끈 떨어지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으나 인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가족과 사회를 통해 만들어진 욕망의 하수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라는 거대한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사유하는 기능을 점검하지 않는 개인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겨울 산에서 길을 잃어 아재 둘이 동사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동호회원들의 무관심보다 어둡고 캄캄한 산속에서 난감했을 불안과 공포가 떠올라 한동안 마음이 쓰였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신화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먼 훗날 신화로 전해지지 않을까요.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동해로 떠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대신 다가올 미래는 결국 과거와 현재의 결과일 뿐이라는 걸 알면 어차피 연말에 후회만 남기는 신년 계획 대신 내 삶의 신화를 스스로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와 태도를 점검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달력이 바뀐다고 삶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희망 고문 대신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 신화 읽기를 통해 우리 삶에 숨겨진 메타포를 읽어내는 방법일 겁니다. 그러니 계속 따로, 또 같이 걸어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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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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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현실 원칙을 넘어선 자리에서 욕망과 쾌락을 방기한다. 그것이 사회적 가면으로 가려진 자기 본능이든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든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간극 혹은 공감은 2차적 효과에 불과하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110년 전에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 드러내고 싶었던 욕망 등은 기억 혹은 과거라는 안타까운 한계 속에 갇혀 아름답게 유영한다. 그것은 오롯이 쓰는 자의 행복과 자유에 기인한 고백과 독백에 불과하지만, 읽는 자의 내면에 호응하는 순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선택적 기억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추동하는 힘이 된다. 쓰는 자의 경험과 무의식 속에 허우적거리던 읽는 자의 아득한 기억들은 제멋대로 춤을 추고 현실 속에 과거를 소환하며 미래를 가로질러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기이하고 생생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따뜻한 차 한잔과 마들렌 과자 혹은 바니시 냄새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현재의 나를 온통뒤흔드는 트리거로 작동하며 기억과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 지금-여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후미각과 후각 혹은 시각과 청각 등 몸의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나이브하게 드러낸다. 감추고 숨길 수 없는 조건반사처럼 각자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시간의 옷, 세월의 두께를 어찌하지 못한다. 한 인간의 언어와 비언어, 반언어들이 모여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듯 그것을 담아내는 육체는 즉물적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명한 ‘나’의 모습이다. 몸이 계급이다. 몸은 영혼을 지배한다. 그래서 몸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표로 작동한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에 담긴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은 헤아릴 수 없다. 한나절 혹은 며칠 동안의 상념일 수도 있고, 글을 쓸 당시까지 반추한 자기 삶의 기억일 수도 있다. 소설의 옷을 입고 있으나 콩브레라는 지명이 실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스완도 마찬가지다. 프루스트가 질베르트를 통해 느낀 마음, 즉 뇌의 반응과 몸에서 벌어진 감각적 변화가 없었다면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을 설명할 이유가 없다. 유대인이며 동성애자 문학청년이었던 작가의 인종과 성적 취향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에 대한 해석과 실명으로 드러난 인물들, 뱅퇴유나 코타르, 비슈로 추정되는 인물 찾기 놀이는 호사가들의 즐거움일 뿐 읽는 자의 즐거움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플롯과 스토리를 따라가며 글의 의미와 프루스트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의미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고 외친 이유와 무관하게 때때로 읽는 자는 읽히는 대로 읽는 즐거움 그 자체를 포기하고 인터넷 정보나 유튜브를 뒤적이는 우愚를 범한다. 문학을 읽는 즐거움은 해석과 분석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읽는 자의 내적 갈등과 불안 혹은 행간을 뛰어넘는 상상과 의도적 오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은 제멋대로 읽기면 충분할 때가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흥분과 열기가 가라앉은 다음 평정심은 되찾으면 그때서야 사랑인지 욕정인지 ‘생각’해 보는 일과 달리 프루스트의 소설은 망설이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몸을 맡겨도 나쁘지 않다. 문화적 환경, 역사적 배경, 사상적 토양이 다른 영국 작가가 지구 반대편에서 겪은 유년 시절과 스완의 사랑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떻게 읽혔는지 기록하는 일은 부질없다. 프루스트는 “작품의 표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내적 고향은 동일하며 따라서 작가란 엄밀한 의미에서 단 한 권의 작품밖에 쓸 수 없다.”라는 주장했다. 7편까지 읽고나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1편을 읽은 느낌은 낯설고 기이한 경험이라는 것일 뿐이다. 개인적 자아인 아니마와 아니무스 vs 사회적 자아인 페르소나의 치열한 사투가 이 작품의 본질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 존재를 해체하려는 집요한 시도와 죽음이 무의미한 삶에 대한 저항 행위라면 이렇게 시간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일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는 첫 문장을 ‘오랜 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는 각주에 동의할 수는 없다.

프루스트는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 마르셀로 추정되는 화자와 질베르트의 사랑이야말로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음악처럼 흐른다. 부질없는 묘사와 표현이 마르셀, 아니 화자의 감정을 전달할 수는 없다. 읽는 자는 자기 사랑과 감정에 취해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리면 그만이다. 남은 이야기가 무엇이든 ‘잃어버린 시간’이 ‘잃어버린 사랑’이라는 통속적 한 줄 요약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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