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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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현실 원칙을 넘어선 자리에서 욕망과 쾌락을 방기한다. 그것이 사회적 가면으로 가려진 자기 본능이든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든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간극 혹은 공감은 2차적 효과에 불과하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110년 전에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 드러내고 싶었던 욕망 등은 기억 혹은 과거라는 안타까운 한계 속에 갇혀 아름답게 유영한다. 그것은 오롯이 쓰는 자의 행복과 자유에 기인한 고백과 독백에 불과하지만, 읽는 자의 내면에 호응하는 순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선택적 기억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추동하는 힘이 된다. 쓰는 자의 경험과 무의식 속에 허우적거리던 읽는 자의 아득한 기억들은 제멋대로 춤을 추고 현실 속에 과거를 소환하며 미래를 가로질러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기이하고 생생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따뜻한 차 한잔과 마들렌 과자 혹은 바니시 냄새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현재의 나를 온통뒤흔드는 트리거로 작동하며 기억과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 지금-여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후미각과 후각 혹은 시각과 청각 등 몸의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나이브하게 드러낸다. 감추고 숨길 수 없는 조건반사처럼 각자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시간의 옷, 세월의 두께를 어찌하지 못한다. 한 인간의 언어와 비언어, 반언어들이 모여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듯 그것을 담아내는 육체는 즉물적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명한 ‘나’의 모습이다. 몸이 계급이다. 몸은 영혼을 지배한다. 그래서 몸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표로 작동한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에 담긴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은 헤아릴 수 없다. 한나절 혹은 며칠 동안의 상념일 수도 있고, 글을 쓸 당시까지 반추한 자기 삶의 기억일 수도 있다. 소설의 옷을 입고 있으나 콩브레라는 지명이 실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스완도 마찬가지다. 프루스트가 질베르트를 통해 느낀 마음, 즉 뇌의 반응과 몸에서 벌어진 감각적 변화가 없었다면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을 설명할 이유가 없다. 유대인이며 동성애자 문학청년이었던 작가의 인종과 성적 취향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에 대한 해석과 실명으로 드러난 인물들, 뱅퇴유나 코타르, 비슈로 추정되는 인물 찾기 놀이는 호사가들의 즐거움일 뿐 읽는 자의 즐거움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플롯과 스토리를 따라가며 글의 의미와 프루스트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의미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고 외친 이유와 무관하게 때때로 읽는 자는 읽히는 대로 읽는 즐거움 그 자체를 포기하고 인터넷 정보나 유튜브를 뒤적이는 우愚를 범한다. 문학을 읽는 즐거움은 해석과 분석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읽는 자의 내적 갈등과 불안 혹은 행간을 뛰어넘는 상상과 의도적 오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은 제멋대로 읽기면 충분할 때가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흥분과 열기가 가라앉은 다음 평정심은 되찾으면 그때서야 사랑인지 욕정인지 ‘생각’해 보는 일과 달리 프루스트의 소설은 망설이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몸을 맡겨도 나쁘지 않다. 문화적 환경, 역사적 배경, 사상적 토양이 다른 영국 작가가 지구 반대편에서 겪은 유년 시절과 스완의 사랑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떻게 읽혔는지 기록하는 일은 부질없다. 프루스트는 “작품의 표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내적 고향은 동일하며 따라서 작가란 엄밀한 의미에서 단 한 권의 작품밖에 쓸 수 없다.”라는 주장했다. 7편까지 읽고나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1편을 읽은 느낌은 낯설고 기이한 경험이라는 것일 뿐이다. 개인적 자아인 아니마와 아니무스 vs 사회적 자아인 페르소나의 치열한 사투가 이 작품의 본질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 존재를 해체하려는 집요한 시도와 죽음이 무의미한 삶에 대한 저항 행위라면 이렇게 시간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일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는 첫 문장을 ‘오랜 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는 각주에 동의할 수는 없다.

프루스트는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 마르셀로 추정되는 화자와 질베르트의 사랑이야말로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음악처럼 흐른다. 부질없는 묘사와 표현이 마르셀, 아니 화자의 감정을 전달할 수는 없다. 읽는 자는 자기 사랑과 감정에 취해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리면 그만이다. 남은 이야기가 무엇이든 ‘잃어버린 시간’이 ‘잃어버린 사랑’이라는 통속적 한 줄 요약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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