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가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속성 중 하나인 불안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만큼 단편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극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만큼 감성과 이성 모두를 자극하는 것도 없을듯 싶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그가 펴낸 저작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저로 기억될만하다. 단지 시류에 영합하거나 얄팍한 상술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류의 책들과는 조금 다르다. 철학에서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때로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내용의 깊이와 사색의 넓이를 확보하면서 그것을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역할도 어렵지 않게 성공하고 있다. 진정한 에세이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칭찬을 덧붙일 수 있는 수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책들은 원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의 원제는 였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의 원제는 이었다. 번역서의 제목이 판매부수를 결정한다는 통설처럼 이 책들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의 경우 제목이 바뀌어 재출판 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경우에 해당한다. <불안>의 원제는 이다. 원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에 대해 한정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책장을 열어야 한다.

  먼저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 구성을 단순화한 것이 눈에 띤다. 크게 ‘불안’에 대한 ‘원인’과 ‘해법’으로 구별해 놓고 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해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나누어 진단하고 있다. 그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한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 P. 38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 P. 81

  사회적 ․ 경제적 지위에서 느끼는 불안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특히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 이후 인간이 느끼는 가장 극심한 불안과 공포는 물질적 궁핍에 대한 것이다. ‘돈’, 혹은 ‘부’에 대한 정의와 개념은 조금씩 다르게 논의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극히 드물다. 종교적 삶을 택했거나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살지 않는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게 동일한 이데올로기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을 유발한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라는 보통의 말은 그래서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이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모두 다르겠지만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끔찍하다. 욕망도 규격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또 하나의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 P. 124

  그렇다.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 그러나 그 하녀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욕망을 없애는 방법과 하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 둘 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한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한다는 것은 표현 자체가 모순이다. 욕망의 절제라니? 그것도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적정 수준에서 절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기 변명과 위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병든 영혼에 대한 처방전은 아니다. 그저 그 원인들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안’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도감은 무척 크게 느껴진다. 안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대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의 ‘해법’에 대해서는 공감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우?철학과 예술이 주는 위안 그것이다. 사유하는 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에 따라 불안은 물론 극복되거나 치유될 수도 있다. 정치와 기독교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치와 기독교가 가중시킨 ‘불안’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사회적 불안에 누구보다도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개인의 삶에 대적 영향을 끼친 분야를 불안의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시한 ‘보헤미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했으나 실패담 위주이고 일반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실과의 접목 문제나 구체적 접근 방법이 없다.

  보통은 이 책에서 수많은 고전과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종합하며 그것들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견해가 공존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도 종합적인 통합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싶다. 철학자가 수학자는 아니다. 더구나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디 있을까.

  몇가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꾸준히 지속되어온 그의 연구와 일련의 저작들 속에서 빛을 발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고 분석해서 다양한 층위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필요한 것은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 불안에 대한 작가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P. 268


200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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