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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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李箱)에게 빚을 졌다면 갚아야 한다. 그는 우리 문학사의 화수분이다.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된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화려하고 다양하게 분석되고 해체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알게 된다. 이상이 누구인가를.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를 몰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상 김해경은 우리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흐릿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까. 일관성 있는 목소리나 통일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모범적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럭비공처럼 튀어 오르는 방향을 알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당대 유행하던 혹은 유럽에서 흘러든 기법이든 유행이든 상관없이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홀로 걸었든 그 쓸쓸함과 외로움 곁에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면 한번쯤 작가의 길을 꿈꾸었음에 틀림없다.

  2009년 ‘이상문학상’은 김연수에게 돌아갔다. 2000년 이인화가 받았을 때처럼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다. 남의 문학상에 뭐라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상문학상’이 가진 위상과 의미를 생각할 때 오래전 황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보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문학이지만 김연수는 최근의 작품들이나 활동으로 보아 충분히 예견된 수상이었다. 문학상은 김연수의 말대로 그저 칭찬이고 위안일 수 있다. 더 잘하고 잘해 보라고. 종착점에서 걸어주는 꽃다발이 아니라 마라톤 도중 마시는 탁자위에 생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힘들고 지친 발걸음을 내딛는 작가에게 격려와 칭찬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김연수가 이제 조금 더 힘을 내고 행복한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새로운 서사적 기법도 ‘메타적 글쓰기의 방법에 의해 상호 텍스트적 중층성을 확립’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읽은 수상작은 그저 문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상징에 다름 아니다. ‘코끼로’로 상징되는 인간 내면의 고통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소설 안에서 단순하게 상징화 되었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야기하듯이 그것이 코끼리가 아니라도, 동물이 아니라도 좋다. 추상적 대상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징적 메타포가 필요할 뿐이다.

  나는 이 단편을 통해 김연수 소설의 미래를 가늠해 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그것은 각 심사위원들의 중점적 심사평에서는 조성기만이 언급했고 작품론에서 김형중이 언급한 ‘촛불’이다. 소설 말미에 ‘그것’이라는 고딕체의 글씨가 선명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어내는 키워드는 그것이 아닐까? 구체적 대상을 보여주지 않고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지시어 그것을 김형중은 ‘촛불’이라고 읽었다.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개인의 고통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특히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에게 고통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 장치가 된다. 이 개인적 고통이 사회로 확대되는 일은 현실 참여 문학이 아니고서는 좀체로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의 지향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내면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다. 아니면 지나간 역사에게 소설의 방향을 묻고 있다. 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부족하다. 고통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나 교묘한 틀과 구조들을 살펴보는 소설을 찾기 어렵다. 철지난 노래를 부르자는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고 또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원인이 밝혀 고통을 나누기도 쉽지 않다.

  김연수에게 과연 ‘촛불’이 어떤 의미로 그리고 어떤 형태로 밝혀질 수 있을지 그의 다음 소설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작가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작가론에서 손정수는 ‘소통’으로 김연수의 소설을 이야기했지만 그 소통은 내면적인 고통이나 아픔을 드러내는 타인과의 소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에 실패한 주인공의 내면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소통을 넘어 연대와 참여로 나설 수 있는 역사적 주체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한 ‘여자’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됐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다시 읽었다. 새로운 느낌으로 작가 자선 대표작이라는 이름으로 읽었다. 그가 찾으려는 혹은 헤매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혹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쓰는 일 자체가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책임감과 의무가 되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행복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내게 읽는 재미를 주었던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들 중 박민규의 ‘𪚥’가 주목을 끝다. 예의 발랄하고 풍자적인 어법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수법이 독자들을 한없이 즐겁게 한다. 현실을 비틀고 풍자하는 많은 방법 중에 무림의 고수를 선택한 것은 무협의 세계라는 아련한 추억과 더불어 진정한 고수의 의미를 중첩시키고 있다. 윤이형의 ‘완전한 항해’ 또한 주목을 끌었지만 새로움 이상을 보지 못했다. 이혜경, 정지아, 공선옥, 전성태, 조용호의 소설들도 나름의 개성과 탄탄함을 갖추고 있지만 눈에 띠는 신선함이나 깊은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수상작을 읽어며 윤대녕을 떠 올렸는데 심사평에서 김윤식이 한 번 언급해서 반가웠다. 누군가의 영향과 교집합을 읽어내는 것도 소설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상찬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정진할 것을 믿는다. 깊이와 넓이라는 상호 모순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독자들의 입맛은 점점 까탈스럽다. 작가도 독자와의 만남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더라도 소설은 영원히 새로움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물, 새로운 기법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그것처럼.


090208-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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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 읽고 리뷰 제목 이해했어요.

sceptic 2009-02-20 12:09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소설이 재미있죠...변하지 않더라도 계속 읽고 싶죠...그래도 내일이 더 기대되는 작가이기도 하구요...^^
 
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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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행동이다’라는 J. 네루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책의 종착역도 행동이다. 책은 사상의 집합체이며 인간 지식의 결정체다. 누가 뭐래도 인간의 호기심은 책을 통해 확인될 수밖에 없다. 책은 가장 은밀하고 수준 높은 영혼의 교류였으며 말없는 혁명가였다. 아무나 책을 쉽게 접할 수 없던 시대에 책은 지식이었고 권력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책을 따라 흘렀고 책을 통해 펼쳐졌으며 책을 통해 변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의 경우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책의 문화사를 정리할 만하다. 이민희의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은 기득권 세력이나 왕의 입장과 달랐기 때문에 화를 입었던 책이나 저자의 생각이 시대와 불화하여 일어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던 책 이야기를 적고 있다. 책은 어느 시대에나 불온하며 위험하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책의 운명들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을 이용한 정치와 기득권 세력과 왕의 장난이다.

  근대 이전의 시기였기 때문에 책의 의미와 역할은 더욱 컸다. 글을 알고 책을 읽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던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은 양반들의 이야기이고 정치의 이야기이며 권력의 이야기이다. 글 모르는 대다수 서민들은 이 책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끼어들 틈이 없다. 한글이 의사소통과 문자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는 18세기 이후에나 책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책의 역사는 슬픔과 고통의 역사다.

  방각본 소설이 나와 전기수가 활약했다는 것은 책이 그만큼 귀하고 글 아는 사람이 적었다는 반증이다. 누구나 쉽게 책을 살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시대는 긴 인류의 역사에서 정말 얼마 안 되는 시기의 이야기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발표로 책 판매량을 급증시켜주었듯 이제는 금지도서나 불온서적은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키고 호기심을 높여줄 뿐이다. 책 뿐만 아니라 여전히 노래 가사를 검열하고 영화를 심의하는 나라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자니 좀 우습기는 하다.

  조선시대의 책 이야기는 현재의 관점에서 흥미롭다. 책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조선의 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을 취한 이 책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책의 ‘문화사’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는 조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실록이나 다른 사료 등을 통해 드러나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역사의 갈피들 속에 씨줄과 날줄처럼 이야기들이 얽혀있고 교묘하게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 틈을 정확하게 읽어주고 있다.

  단순히 저자의 상상력이나 추측성 발언으로 흥미를 끌어내는 책은 아니다. ‘책’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맥락, 역사적 인물들이 보여준 태도 등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진 사건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는 평면이 아니고 입체적이다. 역사는 죽은 미라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다. 

  사실에 대한 재해석이 역사라면 책은 해석의 기준과 잣대로 훌륭한 역할을 한다. 한 권의 책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세계관이나 학문적 깊이 혹은 내용의 새로움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 가능한 것이 책이지만 그 책이 탄생하게 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전의 경우 그 책이 갖는 의미를 절반 밖에 읽어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책의 문화사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열 세가지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야기보다 더 흥미 있는 형식은 없다. 채수의 ‘설공찬전’이 사림의 훈구파 사냥으로 비화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책은 문을 연다. ‘조선책략’을 통해 구한말을 들여다보는 일은 답답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500여 년을 이어온 왕조에 대한 애틋함이 아니라 500년 동안 그 모순과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서민들의 삶이 원통함이 읽힌다.

  이 책을 덮으면서 책과 무관하게 이렇게 모진 역사를 지탱하고 견뎌낸 것은 기득권의 모략과 우국충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조차 읽을 수 없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민중들의 생각은 이 책들에서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읽고 싶어졌다.

  지식이 곧 권력이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식에 접근하는 경로조차 차단되고 비밀에 부쳐지던 역사를 견뎌온 21세기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한 재미로 그칠 일이 아니다. 아직도 상식 밖의 일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 현실의 길을 책에서 고민하는 것 뿐이다.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모든 지식을 전해주지만 어떤 길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길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쓰인 책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것을 고찰하는 일은 단순히 역사에서 교훈을 읽어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과정과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일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책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의미가 퇴색하고 세상이 달라졌지만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선인들의 삶까지 퇴색하지는 않았다. 푸르게 살아 숨 쉬는 정신들을 본받거나 되새기는 일이 중요하다. 한 권의 책을 둘러싼 무협영화 같은 주변 이야기는 흥미와 호기심을 위한 당의정일 뿐이다.
 
  각 이야기들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일곱 개의 ‘조선의 책이야기’는 책의 흥미와 여백을 훌륭하게 이어준다. 조선 시대 전체를 망라할 순 없지만 대표적인 책과 관련된 사건들을 통해 당시의 사상과 문화, 정치와 외교를 읽어내는 재미는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이다. 더구나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09020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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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7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24-08-06 19: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글쓰기의 최소원칙
도정일 외 지음 / 룩스문디(Lux Mundi)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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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화 사회라고 명명되는 네트워크 시대로 접어들면서 글쓰기가 일반화 되었다. 나같은 사람도 목적 없이 끄적이고 있을 정도로 글쓰기는 이제 보편화되었다. 지식인의 전유물도 아니고 특수한 계층만이 지닌 특권도 아니다. 이제 누구나 쓰고 누구나 읽는다. 불과 100여년 만에 천지가 개벽하듯이 근대화의 물결 이후 지식은 보편화되었다. 책을 통해 지식인과 기득권 계층의 비밀이 공개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사회는 개방되었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열린사회’를 이야기했지만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하고 점진적인 변혁이 가능한 진정한 열린사회는 아직도 요원하다. 읽기와 쓰기는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가장 첨단의 도구이다. 컴퓨터와 IT 기술이 아니라 가장 고전적인 방식인 책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서만 열린사회는 가능하다고 본다.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은 이미 현실을 장악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블로그의 확산과 1인 미디어 시대는 미래 사회를 예측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다.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다는 가능성. 더 이상 고 읽었다면 생각하고 쓰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 블로그의 확산과 더불어 글쓰기의 욕망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최근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현상이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이것을 대학 입시에서는 ‘논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행 대한민국의 입시 논술은 글쓰기 능력에 대한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출제와 정답이 있는 논술이 글쓰기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주관식 평가에 다른 이름이다. 모범답안과 점수로 환산되는 글쓰기가 가능한가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문제에서부터 논술은 접근되어야 한다. 최근 들어 자체적인 시행착오와 시행상의 어려움들이 문제시되면서 통합논술이라는 괴물도 주춤하고 있다. 강수돌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를 통해 그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볼 수 있다. 글쓰기를 배울 수 없는 핑계를 대자면 대입제도 때문이며 대입 제도는 학벌과 헤게모니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귀결된다. 오버했나?

  <글쓰기의 최소 원칙>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책이다. 일단 여러 명이 공저한 책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적과 의미가 분명하지만 필자들의 논의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다양성을 확보할 수도 있지만 잡탕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후자에 가깝다. 절반의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2007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특별강좌로 마련되었다면 학교 현장의 교사들에게 필요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글쓰기를 욕망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귀중한 이야기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몇 사람이 산보를 나간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청중과 질문자를 외면하는 내용에 또 다시 울컥.

  도정일의 이야기를 김수이가 이끌어내는 첫 번째 이야기 ‘무엇을 쓸 것인가’와 김훈의 ‘문학적 글쓰기는 하나의 전략이다’, 배병삼의 ‘고전,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할 ‘오래된 미래’’, 김영하의 ‘존재․삶․글쓰기’가 읽을만하다. 표지에는 열네명이나 적혀있지만 전공분야의 이야기나 글쓰기와 아주 먼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런 식의 이야기라면 도대체 글쓰기와 무관한 이야기가 어딨나?

  제목은 구미가 당기지만 책의 내용과 거리가 멀다. 대담자나 강사로 나온 분들의 면면이나 내용이 읽을 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글쓰기의 최소 원칙은 몇 가지 얻지 못한다. 이름난 분들의 경우 이 책 저 책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로 개인적으로 지루한 면이 많았다.

  특별하고 새로운 방법이야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문제점을 파악해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글쓰기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말에는 백번 공감한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과 기본적인 원칙들에 대한 고민들로 채워졌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핸드폰 문자, 이메일, 댓글에서부터 보고서, 기획안, 논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매일 읽고 쓰며 살아간다. 무엇을 쓸 것인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글쓰기의 시작이다. 정확하고 바른 문장부터 시작해서 읽을 만한 글이 되기 위한 과정들은 누구나 알고 싶어 한다. 글쓰기에 관한 무수한 책들이 나왔고 나올 것이다. 나에게 맞는 책을 찾아 단 한 줄의 영감이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글쓰기는 즐거움이어야 한다는 대원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책읽기든 글쓰기든 문학적인 글이든 실용적인 글이든 스스로 즐기지 못한다면 건강에 해롭다. 의무감에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자유롭고 행복한 일로 만드는 일이 글쓰기의 최소 원칙이 아닐까?


09020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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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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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을 들이고 내는 관청이었던 승정원에서는 그 전날 처리한 일을 적어서 매일 아침마다 널리 반포했다. 일종의 관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기별(寄別)’이라고 불렀고, 기별을 담은 종이를 ‘기별지(寄別紙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확실히 결정된 것을 확인하려면 기별지를 받아야 알 수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결정이 기별지에 반포되면 일의 성사 여부를 알 수 있었으므로 그때서야 사람들은 기쁨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용하는 ‘기별이 왔는가?’ 하는 말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별이 올 것을 기다린다. 그것이 사람이나 소식일 수도 있고 막연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의사 소통 불능 상태를 보여준다.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단절된 관계로 인해 인간은 근원적 외로움을 확인한다. 고도는 어디에나 있으며 아무곳에도 없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무엇인지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다. 희망은 그렇게 인간들을 잔인하게 고문해 왔다. 고도는 기별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P. 13

  김훈에게 바다는 고도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바다의 기별>은 ‘사랑의 기별’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고 고도가 있고 사랑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슬픈 거리를 유지한다. 아니 어쩌면 실체 없는 대상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감상들을 형식이나 서사 구조와 무관하게 써내려간 이런 종류의 글들을 통해 독자들은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소설이 아닌 작가를 읽는다. 그의 생각과 감성, 생활인으로서 일상과 인간적인 면모와 접하게 된다.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내지 못한 수다를 들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낯설게 하기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읽어내고 그 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언어라는 모호한 매체를 통해 독자에게 분명하게 전달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훈의 문장은 탄력있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정확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글을 읽고 나면 군더더기 없는, 단백한 음식을 먹고 난 후의 느낌이다.

  이번 산문집도 마찬가지다. 생활인으로서 혹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특히 ‘말과 사물’ 한 편의 글로도 이 책을 읽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얼마나 더 김훈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혹은 의도를 읽어내는 혹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김훈의 산문집은 잡문집이다. 구체적인 대상과 일관된 생각의 흐름을 읽어내기에 부족하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에 부족하다면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부록으로 책들의 서문과 수상소감들을 모아 겨우 분량을 채웠다. 상업 출판의 극단을 보는 듯하다. 의미없는 책은 없겠지만 이런 책은 독자를 슬프게 한다. 김훈의 문장은 정확하고 분명하다. 모호한 흐름이나 지나친 수사가 거의 없다. 감성이 풍부하지만 의미가 불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다.

  에세이가 누구나 가볍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을 혐오한다. 내용과 물리적 형식이 어그러져 김훈의 글들이 허공을 맴돈다. 출판사는 과작(寡作)의 작가인 김훈의 책을 팔고 싶은 욕망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아니라면 이 책을 혐오할 이유가 없다. 시간이 날 때 서점에 서서 읽기에 좋은 책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090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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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역사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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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며칠 동안 시간 여행은 참으로 행복했다. 무릇 책은 온 영혼을 바쳐 써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독자가 몰입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다. 내용과 무관하게 저자의 내밀한 고백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이다. 가볍고 즐거운 방법이라도 그것이 독자의 내면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독자와 작가의 궁합도 필요하다. 독자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책이 선택되고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고 서로 소통하며 독서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일면식도 책꽂이에 좁은 책등을 내보인 채 일렬로 서 있는 책들을 볼 때마다 반추한다. 제목과 저자를 떠올리고 내용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흐린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소파에 앉아 책장을 훑어보는 일은 그래서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그것은 내가 지내온 시간의 역사이기도 하며 흘러온 과거의 추억이기도 하다.

  한 개인에게도 삶의 굴곡이 있고 결정적 순간이 있으며 변화의 시점이 존재한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는 말해 무엇 할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나의 사유 방식 그리고 나의 미래를 말해준다.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경태의 <역사>는 탁월하다. 수많은 역사책을 뒤적여보았지만 내게 필요한 책은 바로 이런 책이었다고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역사책이 아니다. 연대기적 서술이나 사실의 확인을 위한 역사책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시공간을 가로질러 웅장한 교향곡과 같이 연주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저자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이 아니라면 이런 책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역사 자체의 의미를 묻거나 역사의 관점에 대한 논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평가, 유사한 사건이나 개별적 인물들의 공통점 등 역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의 보고이며 확대 재생산이 가능한 학문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안목과 특별한 관점을 선보인다.

  스스로 ‘문외한’이라 칭한 저자의 겸손은 지나치다. 전문 역사가의 몫은 따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크로스오버나 퓨전을 전문으로 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는 돋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과 평가지만 이 책은 저자의 노력에 값하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6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작년에 구입하고 유일하게 읽지 못한 책이었다. 집중해서 시간을 들여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학>, <개념어사전>, <스토리철학18> 등을 통해 보여준 인문학적 지식과 활용 능력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저자를 믿고 구입하고 읽고 기대 이상을 충족한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 책의 면면을 살펴보자.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탄생은 역사가 시작된 단계와 문명 이전의 선사시대를 다루고 있다. 2부 성장에서는 제각각 걸어온 시기를 다룬다. 13세기 무렵까지의 역사가 되겠다. 가장 중요한 3부 만남과 섞임에서는 두 문명이 본격적으로 조우하는 과정을 그리고 문명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과정들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마지막 4부에서는 두 문명의 차이와 오늘날의 영향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잘 짜인 대하 역사 드라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해석이나 중요했던 순간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두 개의 문명 축을 중심으로 그 성격을 규명하고 차이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게다가 현실적 관점에서 그 연원을 밝히는 논평은 작가만의 시각을 개성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에 연표가 붙어 있다. 시기별로 연대별로 정리된 중요한 사건들을 훑어 볼 수 있으며 내용의 흐름에 따라 찾아 볼 수 있지만 개별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정확한 연대기가 필요하다면 잘 정리된 다른 책을 참고하면 될 듯싶다. 이 책은 역사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유목한다. 연대를 거슬러 유사한 사건과 인물들을 배치하기도 하고 동서양을 넘나들며 정치제도와 경제적 토대를 비교하기도 한다. 문화적 차이와 삶의 토대는 역사적 관점이 없다면 그 연원을 밝히기가 힘들다. 단순한 사건과 개별적 사실들이 한 데 어우러져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동양 문명의 중심은 중국의 중원이라는 땅 덩어리였지만, 그에 해당하는 서양 문명의 중심은 지중해하는 바다였다.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의 차이다. - P. 50

  분열과 분산을 본성으로 하는 유럽 문명에 최소한의 통합성을 부여한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로마제국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다. 그것들이 있기에 유럽의 중세 문명은 역사적․현실적 동질성과 함께 종교적․정신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P. 148


  동서양 문명의 차이는 물론 유럽 문명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한 마디로 짚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배경과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하게 밝혀내고 하나의 맥락으로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책은 맥락읽기가 가능한 책이다.

  문제는 독자의 입장에서 단순한 흥미와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저자의 관점에 동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오늘날 벌어지는 사회 경제적 문제들의 연원을 밝히는 데 그 연결고리를 제대로 이어져 있는지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책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본적인 태도와 관점의 유사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수레바퀴처럼 그 흔적들을 따라가고 있다. 전철을 밟는다는 표현은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에는 지름길이 있을 뿐 결코 비약은 없다. - P. 547

고 말한다.

개인의 의식적 행위가 역사적 무의식의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민간 부문의 활성화를 축으로 하는 서양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이 바로 서양 문명을 세계 문명으로 이끈 힘이다. - P. 285

  동양의 역사에서는 국가 체제가 아주 일찍부터 발달했으나 묘하게도 ‘국민’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다. ‘백성’은 언제나 있었어도 ‘국민’은 20세기의 산물이자 서양식 근대화의 결과다. 그 이유는 통치의 룰이 달랐기 때문이다. 동양의 지배자는 권위에 기반해 국가를 경영한 반면 서양의 지배자는 계약에 기반에 국가를 경영했다. - P. 328

  국가를 유기체처럼 여기고 개인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받드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점이다. 동양의 역사와 우리 역사에서는 늘 정치, 즉 나라의 경영이 모든 것보다 우선했고 일찍부터 관이 민을 지배하는 체제가 자리 잡았다. 공화국 전통 60년이 넘은 지금도 우리는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P. 638


  의도된 역사는 없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과거를 토대로 할 뿐이다. 저자는 그것을 무의식의 결과라고 표현했다. 서양의 문명은 물처럼 흘렀고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지만 동양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통제되었으며 하나로 수렴되었다. 얼마나 큰 차이가 벌어졌겠는가. 그 결과는 오늘 우리가 확인하는 그대로이다.

  시민혁명의 경험 - 그 소중한 경험이 우리에겐 없다. 백성과 국민은 있었지만 시민은 없었다.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생각할 때 가장 아쉽고 통탄할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겪어온 시간의 흔적이다. 가정법 없는 역사에서 안타까움을 찾아내기 보다는 미래를 위한 비전을 읽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와 사회,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저자의 평가를 부정할 수 없다. 역사는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를 거울에 비춰보는 행위이며 내일의 지표를 설정하는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에필로그가 더없이 뼈에 사무친다. 우리는 역사를 아직도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역사적 관점은 인문학적 관점이다.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현실의 문제는 누가 무엇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문제의 해법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는 대단히 유용하며, 보이지 않는 지름길을 찾는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인문학이 그에 마땅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풍토다. - P. 657

09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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