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을 들이고 내는 관청이었던 승정원에서는 그 전날 처리한 일을 적어서 매일 아침마다 널리 반포했다. 일종의 관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기별(寄別)’이라고 불렀고, 기별을 담은 종이를 ‘기별지(寄別紙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확실히 결정된 것을 확인하려면 기별지를 받아야 알 수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결정이 기별지에 반포되면 일의 성사 여부를 알 수 있었으므로 그때서야 사람들은 기쁨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용하는 ‘기별이 왔는가?’ 하는 말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별이 올 것을 기다린다. 그것이 사람이나 소식일 수도 있고 막연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의사 소통 불능 상태를 보여준다.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단절된 관계로 인해 인간은 근원적 외로움을 확인한다. 고도는 어디에나 있으며 아무곳에도 없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무엇인지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다. 희망은 그렇게 인간들을 잔인하게 고문해 왔다. 고도는 기별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P. 13

  김훈에게 바다는 고도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바다의 기별>은 ‘사랑의 기별’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고 고도가 있고 사랑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슬픈 거리를 유지한다. 아니 어쩌면 실체 없는 대상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감상들을 형식이나 서사 구조와 무관하게 써내려간 이런 종류의 글들을 통해 독자들은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소설이 아닌 작가를 읽는다. 그의 생각과 감성, 생활인으로서 일상과 인간적인 면모와 접하게 된다.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내지 못한 수다를 들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낯설게 하기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읽어내고 그 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언어라는 모호한 매체를 통해 독자에게 분명하게 전달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훈의 문장은 탄력있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정확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글을 읽고 나면 군더더기 없는, 단백한 음식을 먹고 난 후의 느낌이다.

  이번 산문집도 마찬가지다. 생활인으로서 혹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특히 ‘말과 사물’ 한 편의 글로도 이 책을 읽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얼마나 더 김훈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혹은 의도를 읽어내는 혹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김훈의 산문집은 잡문집이다. 구체적인 대상과 일관된 생각의 흐름을 읽어내기에 부족하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에 부족하다면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부록으로 책들의 서문과 수상소감들을 모아 겨우 분량을 채웠다. 상업 출판의 극단을 보는 듯하다. 의미없는 책은 없겠지만 이런 책은 독자를 슬프게 한다. 김훈의 문장은 정확하고 분명하다. 모호한 흐름이나 지나친 수사가 거의 없다. 감성이 풍부하지만 의미가 불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다.

  에세이가 누구나 가볍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을 혐오한다. 내용과 물리적 형식이 어그러져 김훈의 글들이 허공을 맴돈다. 출판사는 과작(寡作)의 작가인 김훈의 책을 팔고 싶은 욕망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아니라면 이 책을 혐오할 이유가 없다. 시간이 날 때 서점에 서서 읽기에 좋은 책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090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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