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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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李箱)에게 빚을 졌다면 갚아야 한다. 그는 우리 문학사의 화수분이다.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된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화려하고 다양하게 분석되고 해체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알게 된다. 이상이 누구인가를.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를 몰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상 김해경은 우리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흐릿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까. 일관성 있는 목소리나 통일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모범적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럭비공처럼 튀어 오르는 방향을 알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당대 유행하던 혹은 유럽에서 흘러든 기법이든 유행이든 상관없이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홀로 걸었든 그 쓸쓸함과 외로움 곁에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면 한번쯤 작가의 길을 꿈꾸었음에 틀림없다.

  2009년 ‘이상문학상’은 김연수에게 돌아갔다. 2000년 이인화가 받았을 때처럼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다. 남의 문학상에 뭐라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상문학상’이 가진 위상과 의미를 생각할 때 오래전 황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보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문학이지만 김연수는 최근의 작품들이나 활동으로 보아 충분히 예견된 수상이었다. 문학상은 김연수의 말대로 그저 칭찬이고 위안일 수 있다. 더 잘하고 잘해 보라고. 종착점에서 걸어주는 꽃다발이 아니라 마라톤 도중 마시는 탁자위에 생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힘들고 지친 발걸음을 내딛는 작가에게 격려와 칭찬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김연수가 이제 조금 더 힘을 내고 행복한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새로운 서사적 기법도 ‘메타적 글쓰기의 방법에 의해 상호 텍스트적 중층성을 확립’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읽은 수상작은 그저 문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상징에 다름 아니다. ‘코끼로’로 상징되는 인간 내면의 고통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소설 안에서 단순하게 상징화 되었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야기하듯이 그것이 코끼리가 아니라도, 동물이 아니라도 좋다. 추상적 대상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징적 메타포가 필요할 뿐이다.

  나는 이 단편을 통해 김연수 소설의 미래를 가늠해 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그것은 각 심사위원들의 중점적 심사평에서는 조성기만이 언급했고 작품론에서 김형중이 언급한 ‘촛불’이다. 소설 말미에 ‘그것’이라는 고딕체의 글씨가 선명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어내는 키워드는 그것이 아닐까? 구체적 대상을 보여주지 않고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지시어 그것을 김형중은 ‘촛불’이라고 읽었다.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개인의 고통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특히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에게 고통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 장치가 된다. 이 개인적 고통이 사회로 확대되는 일은 현실 참여 문학이 아니고서는 좀체로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의 지향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내면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다. 아니면 지나간 역사에게 소설의 방향을 묻고 있다. 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부족하다. 고통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나 교묘한 틀과 구조들을 살펴보는 소설을 찾기 어렵다. 철지난 노래를 부르자는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고 또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원인이 밝혀 고통을 나누기도 쉽지 않다.

  김연수에게 과연 ‘촛불’이 어떤 의미로 그리고 어떤 형태로 밝혀질 수 있을지 그의 다음 소설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작가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작가론에서 손정수는 ‘소통’으로 김연수의 소설을 이야기했지만 그 소통은 내면적인 고통이나 아픔을 드러내는 타인과의 소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에 실패한 주인공의 내면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소통을 넘어 연대와 참여로 나설 수 있는 역사적 주체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한 ‘여자’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됐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다시 읽었다. 새로운 느낌으로 작가 자선 대표작이라는 이름으로 읽었다. 그가 찾으려는 혹은 헤매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혹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쓰는 일 자체가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책임감과 의무가 되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행복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내게 읽는 재미를 주었던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들 중 박민규의 ‘𪚥’가 주목을 끝다. 예의 발랄하고 풍자적인 어법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수법이 독자들을 한없이 즐겁게 한다. 현실을 비틀고 풍자하는 많은 방법 중에 무림의 고수를 선택한 것은 무협의 세계라는 아련한 추억과 더불어 진정한 고수의 의미를 중첩시키고 있다. 윤이형의 ‘완전한 항해’ 또한 주목을 끌었지만 새로움 이상을 보지 못했다. 이혜경, 정지아, 공선옥, 전성태, 조용호의 소설들도 나름의 개성과 탄탄함을 갖추고 있지만 눈에 띠는 신선함이나 깊은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수상작을 읽어며 윤대녕을 떠 올렸는데 심사평에서 김윤식이 한 번 언급해서 반가웠다. 누군가의 영향과 교집합을 읽어내는 것도 소설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상찬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정진할 것을 믿는다. 깊이와 넓이라는 상호 모순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독자들의 입맛은 점점 까탈스럽다. 작가도 독자와의 만남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더라도 소설은 영원히 새로움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물, 새로운 기법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그것처럼.


090208-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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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 읽고 리뷰 제목 이해했어요.

sceptic 2009-02-20 12:09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소설이 재미있죠...변하지 않더라도 계속 읽고 싶죠...그래도 내일이 더 기대되는 작가이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