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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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기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이후 오랜만에 진은영의 시집을 읽었다.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지 못하고 언어의 간극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서시에 해당하는 ‘아름답다’가 피워올리는 텅빈 굴뚝의 연기같은 이미지만 무성하다. 표상적 의미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같은’ 아름다움만 난무한다. 낯설고 생경한 이미지의 충돌 속에서 나는 오늘도 길을 헤매나보다.

  행위의 주체는 없고 세계의 현상만 남아있다. 세계를 말하려는 시는 구체적인 대상과 이미지가 없다. 추상과 상징만 남은 의미의 충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추하거나 아득하지 않은 세계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내는 고단한 작업이 시인의 업은 아닐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름다움 이전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터.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 끝에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그의 존재는 그리움이다. 나는 누구인가? 멜랑콜리아는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다. 시인에게 우울증은 천형의 형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쾌하고 즐거운 세상이라면 굳이 시를 쓰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부재나 나의 부재로 인해 존재의 무화를 통해 고통은 시작된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주체와 객체를 바꾸면 그대로 그는 시인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엎어지고 자빠지지만 벗어날 수 없는 숙명같은 게 있다. 하나의 이미지와 상징으로 말해질 수 없는 사소함이 있다. 흰 셔츠에 버찌가 번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그 사소함들을 어떻게 말할까?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는 조소아닌 조소. 우리가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일상의 우스꽝스러움, 그 어리석음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의 혼돈과 어둠만이 존재할 뿐.

  깨지고 흔들리는 이미지들은 세계 밖에 존재한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으나 감각할 수 없는 세계는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부서진다.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씩 지나가는 것처럼 그 그림자는 길고 지루하다. 시는 언어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 달나라처럼 머나먼 거리감만 더해줄 뿐이다. 그것이 시의 자가당착이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경계선!

70년대産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구체적인 상황도 설명도 없이 결국 서로 쏘는 세대가 되어버린 자화상을 그린다. 시인은 70년産이다.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 것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결국 서로 쏜다. 그러나 현실은 상징이 아니다. 굳이 시에서 현실을 읽어낼 필요도 없지만.

  기다림의 끝에 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세대. 비극적 결말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는 현실. 권혁웅의 해설처럼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후일담이 사랑보다 선행할 때가 있으므로.

사랑에 대한 후일담이 사랑보다 선행할 때가 있고, 자신에 관한 회고담이 자신보다 앞설 때가 있다. 시원(始原)은 파생과 유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점을 지시할 수 있는 법이다. 무언가가 자신을 긁고 지나간 후에야 우리는 그게 사랑이었음을 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고 실체가 아니라 속성이다. - 권혁웅, ‘멜랑콜리 펜타곤Melancholy Pentagon’중에서,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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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 -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리처드 H. 탈러 &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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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이냐 반찬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셀프서비스로 운영되는 식당의 경우를 살펴보자. 군대를 갔다 온 혹은 군 복무 중인 수많은 남성들은 식판 위에 산처럼 밥을 퍼 담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들은 오늘도 구내 식당, 학교 급식실에서 양껏 밥을 담는다. 그리고 자신이 먹을 만큼 반찬을 담기 시작한다. 누가 떠주면 어쩔 수 없이 정량을 받아야 하지만 사람마다 식성과 식사량이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떠 먹는 좋을 것이다. 어찌됐든 대부분의 경우 밥과 반찬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실제 낭비되는 음식의 양은 엄청나다. 우선 개인적으로 살펴보면 음식을 많이 남긴다. 배고픈 상태에서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먹을 만큼의 밥을 먼저 담고 나면 배를 채울만한 고기나 탕수육, 잡채 등이 반찬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그러면 밥과 반찬 중 한쪽이 남거나 둘 다 남기 마련이다. 이때 배열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반찬을 먼저 배열하고 밥을 맨 마지막에 담도록 하면 남기는 양이 상당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 대부분 사람들이 선호하는 반찬이나 배를 채울만한 종류의 반찬을 앞쪽에 배치하면 버려지는 음식의 양이 상당히 줄어들지 않을까?

  <넛지nudge>를 읽으면서 떠 오른 생각이다. 이 책의 서두 부분에서 반찬의 높이와 배열 순서에 따라 특정 음식의 소비를 현저하게 줄이거나 늘였다는 사례를 보고 마찬가지 원리로 음식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보았다. 사회과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람’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생각과 행동 패턴 속에 숨어 있는 비밀들을 풀어내는 일은 특정 학문 분야의 연구 주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경제학자 둘이 공저했다.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괴짜 경제학>이나 작년에 출판되어 반향을 불러 일으킨 <블랙스완>, 엊그제 읽은 <야성적 충동>에 이어 <넛지>에 이르기까지 최근 경제학은 행동 경제학의 열풍이다. 완전한 이성을 갖춘 경제적 인간이 일관성 있는 경제 활동을 벌인다는 전제 자체를 거부한 이 책들은 심리학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경제 행위를 점검하고 있다.

  ‘넛지nudge’는 ‘눗지noodge’와 다르다. 눗지는 ‘성가신 사람, 골칫거리, 끊임없이 불평하는 사람’을 뜻하는 명사지만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옆구리를 찌르기라는 말이다. 주의를 환기하거나 부드럽게 경고하기 위해 상대에게 넛지를 행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눗지와 전혀 다르다. 이 책에서는 물론 눗지가 아니라 넛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연 넛지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경제 활동에 임하는 사람은 천재이면서 바보라는 가정 하에 이 책의 논의가 시작된다. 사람은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과 그저 평범한 인간(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전자를 ‘이콘(Econ)’, 후자를 ‘인간(Human)’이라고 부른다. 이콘은 좌뇌를 주로 사용할 것이고 인간은 주로 우뇌를 사용할 것이다. 이콘은 숙고 시스템을 사용하고 인간은 자동 시스템을 사용한다. 넛지는 인간을 위해 필요하며 잘못된 혹은 당연한 자동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수정하기 위해 필요하다.

  인간은 어림짐작과 비현실적 낙관주의에 익숙하고 100원의 이익보다 100원의 손실을 훨씬 더 고통스러워한다. 현상유지 편향을 갖고 있다. ‘너의 가슴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며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진보적 성향에 대해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는 나같은 인간에게도 현상유지의 보수적 편향은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액자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프레임이 어떠하냐에 따라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수술을 앞 둔 환자에게 ‘100명 90명이 5년 이상 살았다’와 ‘100명 10명이 5년 이내에 죽었다’는 말을 해 준다고 할 때 환자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은 이콘의 입장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넛지의 활용을 주장한다.

  넛지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념과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오류, 행동의 패턴을 보다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는 없는지 점검해 보자. 인센티브와 다른 넛지의 세계는 디폴트에서 시작한다. 최소 저항 경로를 따라가며 피드백을 주고 매핑을 통해 행복을 이끌어주는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가져다준다. 저축과 투자, 연금 특히 모기지, 학자금 대출, 신용카드 사용의 실례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멍청한’ 판단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면 ‘이렇게 살다 죽게 내비둬!’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아니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넛지가 필요하다. 사회보장, 의료보험, 장기기증, 환경 등 경제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도 인간이 아니라 이콘이 필요하다. 관심을 갖지 않고 혹은 모르고 지나치는 일상들 속에 누군가 팔꿈치로 슬쩍 찔러준다면 어떨까? 기분 나쁘게 간섭하고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툭치고 지나가며 가볍게 윙크를 날려준다면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다시 한번 고려해보지 않을까? 저자들은 이것을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고 부른다. 자유에 대한 개념과 한계를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에 따라 이념의 대립으로 비화할 수 있으므로 경제학자인 두 사람은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절충하고 있다. 그 접점에서 찾은 개념이 바로 넛지다.

  책의 말미에서 반대 의견들까지 정리하고 있다. 정성스럽고 꼼꼼한 사례 조사와 그 적용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쉽고 재미있다.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한밤의 세례나데>를 본 것을 제외하고 꼬박 이 책에 코를 박고 주말을 보냈다. 400페이지 넘는 분량이지만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재미있고 정확하게 분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다양한 분석과 해법들 속에서 이 책이 빛을 발하는 것은 결국 어떤 문제도 이콘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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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적 충동 -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조지 애커로프, 로버트 J. 쉴러 지음, 김태훈 옮김, 장보형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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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점의 차이는 문제의 원인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낸다. 이성적 동물이라고 굳게 믿는 인간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때가 많다. 얼마나 본능에 충실하며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판단을 내리는지 알고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소위 지식인이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예외가 없다. 이론과 실제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며 학문적 관점과 실제 생활의 거리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경제적 동물인 인간이 이익을 취하는 장면이나 물건을 구입하는 장면을 살펴보면 얼마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알 수 있다. 조지 애커로프와 쉴러가 공저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은 이러한 인간의 특성에서 출발한다. 이 개념은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1936)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인간이 얼마나 비경제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두 저자는 최근에 벌어진 세계 경제의 흐름을 읽어내는 데 ‘야성적 충동’이라는 개념을 활용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중요한 장면들을 분석하다보면 다양한 이론적 잣대가 사용되고 경제적 용어들이 난무하지만 결국 그 실마리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 세계 언론의 격찬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평가가 어찌됐든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표준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해석하는 책이라는 장하준의 추천사가 아니라도 경제는 ‘심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간단한 말을 분석하고 있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그 원인과 대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한다. 하지만 대부분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전제로 한다. 논리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당연히 어느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저자는 우리의 경제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학을 변화시키고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야성적 충동’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적 요인’을 통틀어 ‘야성적 충동’이라고 말했지만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경제불황의 원인이나 금융위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찾아낸 용어는 아니다. 이 책의 1부에서 ‘자신감, 공정성, 부패와 악의, 화폐 착각, 이야기’라는 충동의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이것들은 2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왜 경제는 불황에 빠지는가?’, ‘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등 여덟 가지 경제위기에 대한 전제조건이 된다. 감수자의 말대로 여덟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1부를 읽으면 더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저자들은 비논리적인 선택과 우연, 과대 포장, 거짓말, 비도덕적 성향 등 여러 가지 다양한 근거와 역사적 맥락을 통해 야성적 충동의 본질적 속성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 충동으로 불황의 역사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한다. 여덟 가지 질문과 대답 속에는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원인이 달라지면 당연히 대책도 달라진다. 경제의 문제는 바로 사람들의 ‘야성적 충동’에 기인한다는 결론을 얻었다면 그로 인한 대책과 위기극복 방안들이 드러날 것이다.

  경제의 작동원리가 단 한 가지 원인으로 요약될 순 없다. 다만 이 책에서 주장하는 케인스의 ‘야성적 충동’은 최근의 경제 위기를 풀어내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설득력 있는 분석과 일반인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물론 경제 이론과 설명들이 친절하지 않아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고 저자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잘 모르겠지만, 거시 경제학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나 철학의 문제와 닿아 있는 듯하다. 심리학이나 역사학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니 인문학적 관심과 자연과학적 척도가 결합될 때 보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와 대안들이 논의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현실 경제를 풀어내고 사람들이 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이바지해야함은 물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신자유주의는 아니다. 인류가 검토해 온 다양한 제도 중에서 인간의 본성과 가장 근접한 제도가 자본주의라고 인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자유주의가 왜곡되어 시장 제일주의, 친기업주의가 될 수는 없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이 정책과 입안자들은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하지만 그 부작용의 피해자는 항상 노동자들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이 현재의 경제 위기를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문제들의 대안을 고민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경제는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숨 쉬는 공기가 되었으니 피해 갈 수는 없다. 원론적으로 보다 나은 미래를 꿈만 꿀 수도 없다. 실현 가능한 제도의 운용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정책 방향을 기대한다. 우리에겐 누가 있으며 어디에 기대야 할 것인가? 거시경제의 문제를 일반인들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이 냉소를 만들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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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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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가. 어쩌면 점점 단단해지는 구조물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기득권을 가진 자와 그것을 지키려는 자들을 위한 철옹성이 되어간다. 이념적 성향을 떠나 이기적 욕망이 앞서고 다수를 위한 사회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은 식후의 디저트처럼 항상 2차적이고 부수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고 더 많이 가질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주변을 돌아볼 수도 있다는 태도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과연 현재와 같은 상태가 꾸준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인류는 독재와 파시즘, 식민지 등 암흑과 같은 시대를 견뎌내기도 했지만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문학은 이 견고한 구조물에 계란을 던지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건물 안에 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우스꽝스런 건물의 외관을 비웃기도 한다. 또한 너무 익숙해서 이상하다고 생각지도 못하는 구조와 설계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장애물을 두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 이대로 좋은가? 과연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얼마나 견딜 수 있으며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통해 공지영을 처음 만났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이 소설가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소설 외적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작가는 항상 그저 소설로 말할 뿐이다. <도가니>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들>를 잇는 그녀의 장편소설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포털 Daum에 연재했던 소설이라는 발표 형식상의 특징이 내용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그녀 특유의 섬세하고 비유와 구체적인 표현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저리들은 독자들을 몽롱한 안개 속으로 안내하기에 충분하다. 너무 깔끔하고 정돈된 솜씨로 유려하게 읽히는 소설의 문장들은 때때로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번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사회복지시설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과 그 처리 과정을 그려낸다. 사형 문제에 이어 장애인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과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처리되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니, 작가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구조적 모순들과 우리 안에 잠재된 ‘광란의 도가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가니의 사전적 의미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흥분이나 감격 따위로 들끓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작가는 소설 속 공간인 ‘무진(霧津)’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구별되지 않는 안개의 특성은 진실과 거짓이 뒤엉킨 채 우리들의 사고와 가치판단조차도 흐리게 만드는 듯하다. 가장 추악한 인간의 모습과 이기적 욕망들이 결합된 도가니는 무진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오롯하다.

  이 사회의 흉측한 몰골을 여실히 드러내는 무진시의 기득권층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략하게 묘사한다. 단순한 스케치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문제들을 거론하며 윤리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에 대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이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문제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외면하고 생활에서 실천하지 못하거나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가치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이 없을 것 같은 모호한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나 선명하고 확고한 진실 앞에서도 우리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가진 자의 손에서 무언가를 뺏어내는 일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자기 것을 지키려는 자가 쉽게 손가락에 힘을 빼지는 않는다. 선악의 문제로 단순화할 수 없는 문제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립학교법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미디어법은 목숨을 걸고 통과시키려하고 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암묵적 합의, 우리는 보통 이것을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한다. 말없이 서로를 위해 복무하고 정교한 그물처럼 짜인 세상에서 변화는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나와 무관해도 그 피해정도와 여파를 고민한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며 타협하고 손을 내민다.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하는 삶이 시작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경우의 수를 측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기도 한다.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은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평범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더 불행할까? 이 소설 속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은 고뇌의 흔적이 별로 없다. 무진을 떠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 순탄치 않지만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무진을 떠난다. 하인숙을 떠난 윤희중처럼 서유진을 떠난 강인호는 도피라고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현실과 진실 사이의 고뇌와 갈등의 결과일까. 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강인호였다면?

  광주 인화학교 사건은 노무현 정권 말기에 5년형이 구형됐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건이다. 단순히 ‘용서’의 문제가 이 소설의 주제는 아니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차용한 구조는 현실 밖의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다. 동떨어진 머나먼 장소에서 끈적하고 답답한 분위기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무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다. 2009년의 현실이 무진 아니겠는가? 그래서 서유진은 이렇게 외쳤는지도 모른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것예요.” - P. 257


090708-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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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9-07-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날카로우시네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거에요. 이 문장에 가슴을 벤 듯 아려요.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는 진실하나로 버텨가기에 하루하루 힘겨운 나날들.

sceptic 2009-07-10 23: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원한 주말 보내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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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아니 이해하더라도 접근 불가능한 고유한 세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동굴’이라고 부른다. 자의식이 강하고 내성적인 사람,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비현실적 인생관을 지닌 사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 도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실 속 어느 장소이거나 나름의 행동과 습관이거나 특별한 취미이거나 개별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어떤 형태로든 모든 사람들에게 ‘동굴’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외향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서 항상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가면과 본질적 자아 사이의 괴리감은 사회생활을 통해 누적되는 피로로 나타난다. 가족 내 역할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한 개인의 삶은 결정된다. 그러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외치게 된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나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본질적인 자아를 위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기적인 삶이라고 볼 수 없으면서도 자신의 의도와 취향과 목적이 뚜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신념처럼 위험한 것도 없지만 가치관이 뚜렷하고 일반적인 삶의 패턴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그런 사람들은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구별되는 몰입의 즐거움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그 기준만큼 방법은 인구 수 만큼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시인, 문화평론가, 방송인 등 다양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김갑수는 클래식 애호가이자 매니아로 정평이 나 있다. <지구 위의 작업실>은 책 전체가 자기 소개서다. 신변잡기를 궤변으로 엮어 미용실 아줌마들의 뒷담화처럼, 사우나실 아저씨들의 수다처럼 격이 없고 친근하다. 형식도 내용도 자유롭고 거침이 없다. 시원시원한 문장과 편안하고 자유로운 문장은 책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그것도 취향의 문제라면 나는 김갑수의 문장을 매우 유쾌하게 읽었다.

  자기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니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이고 행복이며 실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친한 사람이 없다면 행복은 불가능한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친하다는 것은 자기 확장 의지를 뜻한다. 그러나 가망 없는 시도가 아닐까. 타인에게서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자 하는 행위는 횡포다. 순수의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이 적나라하게 닿는 일은 일종의 작은 폭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지금 나는 인간 혐오, 관계 혐오, 대인 기피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타인 의존을 통한 자기 방기가 끔찍하다는 말이다. - P. 88

  세상에는 수많은 대책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대책이란 자본과 경쟁에서 비껴 서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행복의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아파트 평수와 종합주가 지수와 적금 액수와 수능 점수와 연봉의 공통점은 수치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과연 행복한 삶은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일까. 방송과 강연과 인세로 평범한 사람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어 스스로 ‘불쌍’과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는 저자의 고백과 무관하게 그의 작업실은 낭만이며 행복이고 자아 확장의 공간이다.

만일 낭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섬세함에서 온다. 그것은 괴로움에 짓눌려 끙끙거리며 자라나고 좁다란 밀실에서 아른아른 피어난다. 낭만이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낭만은 바라보는 자의 몫이지 낭만가객 자신의 몫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낭만을 가장 혐오하는 것이 타고난 낭만주의자들이다. - P. 116

  마포 37평 지하실에는 빛과 소리가 완벽된 김갑수의 작업실이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음악을 듣고 커피를 끓이고 책을 읽는 작업을 한다. 한 마디로 ‘논다’. 아무나 이런 놀이 공간을 가질 수 없다는 자괴감 보다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작은 작업실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물질적인 공간과 돈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에 몰입할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본 사람이라면 LP 3만장, CD 4천장이 들어 찬 작업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오디오 작업의 세계는 나열된 어휘조차 이해 불가능이다. 커피에 대한 공력은 그의 작업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말해준다. 아나키스트 김갑수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작업실이 부러운 사람이라면 그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아직도 근육과 정신이 근절거리는 혈기방장 젊은 나이였다면 나는 아나키스트가 됐을 것이다. 프루동이나 바쿠닌처럼 무시무시한 강골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국가는 폭력이다”라고 외친, 그래서 세금이며 노역이며 국가가 요구하는 것은 모조리 거부하자고 주장한 톨스토이식 온건 아나키즘쯤에 닿았을 것 같다. 아니, 아니다. 무슨 ‘이즘’ 따위로 거창하게 나가지 말고 단순소박으로 이 ‘나라 지겨움’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자. - P. 127

  어린 시절 끔찍한 폭력과 친구의 화실을 전전하던 지독한 가난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잠시 언급하는 대목에서 잠시 목이 메인다. 짧은 문장이지만 스스로를 진단하는 이야기가 그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음악을 듣는 ‘일’이 그의 삶이라면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오디오 작업을 하는 행위는 음악을 위한 준비운동일까? 누구에게나 작업실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공간을 만들어 살고 있는 김갑수의 인문학적 교양, 몰입의 즐거움에 공감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나도 김갑수를 부러워만 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미쳐야 미친다.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없이 미쳐가고 싶다.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하고 싶다. 미쳐달라고. 텅 빈 우물 속에서 제발 조금씩은 미쳐버려달라고.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없이. - P. 279

090705-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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