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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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기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이후 오랜만에 진은영의 시집을 읽었다.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지 못하고 언어의 간극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서시에 해당하는 ‘아름답다’가 피워올리는 텅빈 굴뚝의 연기같은 이미지만 무성하다. 표상적 의미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같은’ 아름다움만 난무한다. 낯설고 생경한 이미지의 충돌 속에서 나는 오늘도 길을 헤매나보다.

  행위의 주체는 없고 세계의 현상만 남아있다. 세계를 말하려는 시는 구체적인 대상과 이미지가 없다. 추상과 상징만 남은 의미의 충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추하거나 아득하지 않은 세계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내는 고단한 작업이 시인의 업은 아닐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름다움 이전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터.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 끝에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그의 존재는 그리움이다. 나는 누구인가? 멜랑콜리아는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다. 시인에게 우울증은 천형의 형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쾌하고 즐거운 세상이라면 굳이 시를 쓰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부재나 나의 부재로 인해 존재의 무화를 통해 고통은 시작된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주체와 객체를 바꾸면 그대로 그는 시인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엎어지고 자빠지지만 벗어날 수 없는 숙명같은 게 있다. 하나의 이미지와 상징으로 말해질 수 없는 사소함이 있다. 흰 셔츠에 버찌가 번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그 사소함들을 어떻게 말할까?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는 조소아닌 조소. 우리가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일상의 우스꽝스러움, 그 어리석음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의 혼돈과 어둠만이 존재할 뿐.

  깨지고 흔들리는 이미지들은 세계 밖에 존재한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으나 감각할 수 없는 세계는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부서진다.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씩 지나가는 것처럼 그 그림자는 길고 지루하다. 시는 언어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 달나라처럼 머나먼 거리감만 더해줄 뿐이다. 그것이 시의 자가당착이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경계선!

70년대産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구체적인 상황도 설명도 없이 결국 서로 쏘는 세대가 되어버린 자화상을 그린다. 시인은 70년産이다.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 것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결국 서로 쏜다. 그러나 현실은 상징이 아니다. 굳이 시에서 현실을 읽어낼 필요도 없지만.

  기다림의 끝에 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세대. 비극적 결말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는 현실. 권혁웅의 해설처럼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후일담이 사랑보다 선행할 때가 있으므로.

사랑에 대한 후일담이 사랑보다 선행할 때가 있고, 자신에 관한 회고담이 자신보다 앞설 때가 있다. 시원(始原)은 파생과 유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점을 지시할 수 있는 법이다. 무언가가 자신을 긁고 지나간 후에야 우리는 그게 사랑이었음을 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고 실체가 아니라 속성이다. - 권혁웅, ‘멜랑콜리 펜타곤Melancholy Pentagon’중에서, P.100


090719-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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