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오디세이 - 수학이 즐거워지는 수학 이야기
앤 루니 지음, 문수인 옮김 / 돋을새김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부터 9까지 숫자 중에 하나를 떠올려 보자. 그 숫자에 9를 곱하고 두 자리 수가 나오면 각각의 숫자를 더한다. 그 수에서 4를 빼고 제곱을 한다. 그리고 다시 4를 뺀다.

정답은 바로 오늘 날짜인 ‘21’

마술처럼 보이는 이 놀이는 숫자의 비밀을 알려주는 간단한 놀이에 불과하다. 눈을 뜨고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숫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학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 복잡해질수록 더 많은 숫자가 필요하고 더 자주 수학과 만나게 된다. 머리가 복잡해지자 불현 듯 명료한 수의 세계가 조금 궁금해졌다.

누구나 한 번쯤 왜 하루가 24시간이고 한 달은 30일이며 1년은 365일지 궁금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가장 복잡해 보이는 컴퓨터는 2진법을 사용한다.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10진법에서 60진법에 이르기까지 수와 관련된 비밀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기록을 위해 문자를 발명한 것처럼 수의 발명도 기록과 계산의 편의를 위해서 시작된 것이다. 2000년 전 나일강의 문화권에서 시작되었다는 수학의 역사는 인류 발전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해왔다. 앤 루니의 『수학 오디세이』는 수학의 신비로움에 한발 다가설 수 있는 책이다. 수의 신비는 물론 수학의 역사와 수학자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을 잘 하기 위한 학습도 아니고 수수께끼나 수학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수학이 걸어온 걸을 더듬어보는 수학에 관한 인문학적 교양서이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 소개를 보고 조금 놀랐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특이한 책이어서 먼저 눈길을 끌었다. 앤 루니는 중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문학 전공자가 과학과 역사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수학에 관한 폭넓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수학의 즐거움과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문간 경계를 넘어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에 대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이 책을 통해 확인된다. 저자의 전공과 이력이 책의 내용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신기하기도 했고 오히려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은 숫자에서 시작해서 증명으로 끝난다. 전체 9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계산, 기하학, 삼각법, 곡선, 대수학, 미적분, 통계, 집합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에 중요한 수학적 발견과 배경을 설명한다. 딱딱하고 지루하게 수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과 배경을 중심으로 그것의 사회적 영향 등을 소개한다. 어려운 개념이나 수학자의 삶을 소개하는 정보 박스가 곳곳에 배치되어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한 권의 책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거나 틀에 박힌 생활에 숨통을 트여주기도 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삶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채찍질하기도 하며 이성의 정수박이에 찬물을 들이붓기도 한다. 그것은 유사한 분야에서 사유의 폭을 넓히는 과정에서 비롯되기보다 낯선 분야에 발을 들여놓을 때가 더 많다.

세상은 물음표로 가득하다. 왜 사람들은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지, 왜 자연은 그러한지. 절대적인 진리와 흔들림 없이 명쾌한 이론이 때로는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한다는 측면에서 수학은 가장 적합한 또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논리 정연한 수학의 세계는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채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생각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겪게 되는 수학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이나 수학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모호하고 혼란스런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질서정연한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보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그물처럼 촘촘한 네트워크 세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원리들이 수학과 과학의 원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인류가 눈부신 물질문명을 이룩하여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새로운 도전과 끝없는 노력의 작은 결과물들 때문이다. 축적된 지식과 역사의 연결고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삶도 없다. 그것이 수학이든 그 어떤 것이든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내일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위한 반성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질 수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수학의 세계를 들여다는 보는 것은 바로 이런 노력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것이 어떤 언어로 작성되었는지 알아야만 한다. 수학이 바로 그 언어이다. - 갈릴레오


1011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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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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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역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은 위대하다. ‘문학의 종언’에 관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가 읽히는 시대는 어떤가. 사춘기 시절, 문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정호승의 열 번째 시집을 읽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를 닳도록 읽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을 그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일 지도 모른다. 무언가 조금 알 것 같을 때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년 겨울 정호승 시인을 학교에 특강 초청 강사로 모셨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가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 시인이었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을 뿐 그 형형한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시를 읽고 시인을 만나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첫 시집부터 고스란히 그의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이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지하, 김남주, 황지우, 조태일, 곽재구, 김정환, 이성부나 이성복, 오규원, 황동규, 최승자, 김승희와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노래했기 때문에 현실참여도 서정도 아닌 혹은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극단의 경계에 머물며 별을 노래했던 시인 정호승.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서정시’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시인이 된 정호승. 안도현이나 김용택과 더불어 시를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해 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은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시작된다. 그 가슴 안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지는 그의 시를 읽는다.

추운 겨울 뜨겁게 한몸이 되는 역설적 순간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추위를 견딘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꽝꽝 얼어붙고 싶다.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매일매일 ‘고비’를 넘기는 사람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에 부풀고, 내일 죽을 것처럼 절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고비들을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시인은 이제 시대를 고민하지도 않고 아픔과 슬픔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고비’라는 모호한 말로 뭉뚱그린다.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날선 시선도 조금은 둥그렇게 다듬어졌고,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방법도 알게 되었나보다. 가볍고 쉬운 발걸음이 경쾌해 보인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아프지도 않아 보인다.

고비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런 시에 눈길이 머문다. 심장이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시가 한 편 눈에 띤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파란 안경을 벗겨주고 싶었을까?

시인이 말한 ‘왼쪽’의 기준은 어디일까. 한 편의 시가 말하는 시대의 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때론 너무 모호하고 난해하다. ‘왼쪽’에서 시인을 바라보면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갑작스런 생각.

왼쪽에 대한 편견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직선의 대로이거나 어두운 골목이거나
내가 바라보던 모든 지평선도 수평선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지구에 여행 온 나그네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떤 삶을 꿈꾸어야 하는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술에 취할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꿈을 위해 슬퍼할 일이다. 시인도 사라지고 별빛도 사라지고 삶의 방향도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도 사라지는 시대의 슬픔으로 읽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오독(誤讀)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여전히 ‘소년’이 되고 싶은, 아니 여전히 ‘소년’인 시인의 고백으로 이 시집은 문을 닫는다. ‘봄비’로 시작해서 ‘소년’으로 끝날 때까지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여전히 시를 쓰겠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는다. 말랑한 감수성과 쉬운 표현 몸에 닿는 이야기들을 통해 이제 수많은 독자를 얻는 시인이 더 이상 내게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만나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 뿐. 누군가의 말대로 이제 그가 ‘쓸’ 시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 언제나 ‘소년’으로 살고 있는 철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다. 오늘 밤은 별도 없이 캄캄하여 바라볼 수도 없다.

소년

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10111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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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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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역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은 위대하다. ‘문학의 종언’에 관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가 읽히는 시대는 어떤가. 사춘기 시절, 문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정호승의 열 번째 시집을 읽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를 닳도록 읽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을 그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일 지도 모른다. 무언가 조금 알 것 같을 때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년 겨울 정호승 시인을 학교에 특강 초청 강사로 모셨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가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 시인이었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을 뿐 그 형형한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시를 읽고 시인을 만나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첫 시집부터 고스란히 그의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이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지하, 김남주, 황지우, 조태일, 곽재구, 김정환, 이성부나 이성복, 오규원, 황동규, 최승자, 김승희와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노래했기 때문에 현실참여도 서정도 아닌 혹은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극단의 경계에 머물며 별을 노래했던 시인 정호승.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서정시’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시인이 된 정호승. 안도현이나 김용택과 더불어 시를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해 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은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시작된다. 그 가슴 안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지는 그의 시를 읽는다.

추운 겨울 뜨겁게 한몸이 되는 역설적 순간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추위를 견딘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꽝꽝 얼어붙고 싶다.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매일매일 ‘고비’를 넘기는 사람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에 부풀고, 내일 죽을 것처럼 절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고비들을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시인은 이제 시대를 고민하지도 않고 아픔과 슬픔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고비’라는 모호한 말로 뭉뚱그린다.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날선 시선도 조금은 둥그렇게 다듬어졌고,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방법도 알게 되었나보다. 가볍고 쉬운 발걸음이 경쾌해 보인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아프지도 않아 보인다.

고비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런 시에 눈길이 머문다. 심장이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시가 한 편 눈에 띤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파란 안경을 벗겨주고 싶었을까?

시인이 말한 ‘왼쪽’의 기준은 어디일까. 한 편의 시가 말하는 시대의 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때론 너무 모호하고 난해하다. ‘왼쪽’에서 시인을 바라보면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갑작스런 생각.

왼쪽에 대한 편견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직선의 대로이거나 어두운 골목이거나
내가 바라보던 모든 지평선도 수평선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지구에 여행 온 나그네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떤 삶을 꿈꾸어야 하는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술에 취할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꿈을 위해 슬퍼할 일이다. 시인도 사라지고 별빛도 사라지고 삶의 방향도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도 사라지는 시대의 슬픔으로 읽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오독(誤讀)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여전히 ‘소년’이 되고 싶은, 아니 여전히 ‘소년’인 시인의 고백으로 이 시집은 문을 닫는다. ‘봄비’로 시작해서 ‘소년’으로 끝날 때까지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여전히 시를 쓰겠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는다. 말랑한 감수성과 쉬운 표현 몸에 닿는 이야기들을 통해 이제 수많은 독자를 얻는 시인이 더 이상 내게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만나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 뿐. 누군가의 말대로 이제 그가 ‘쓸’ 시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 언제나 ‘소년’으로 살고 있는 철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다. 오늘 밤은 별도 없이 캄캄하여 바라볼 수도 없다.

소년

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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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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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환 전 외교부장관의 딸은 공공연한 대한민국의 ‘음서제(蔭敍制)’를 공론화했다. 아버지가 기업을 이루고 그 아들이 물려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외교부의 특별채용에 분노하는 이유는 개인기업과 국가기관이라는 차이 뿐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상식의 범위와 한계는 문화적 토대와 사회, 역사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최근의 사회학자에 이르기까지 보편 타당한 윤리학에 관한 기준과 개념은 논쟁의 중심에 놓여있다. 특히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사람을 평가하며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커다란 논란에 휩싸인다. 정치적 성향, 종교, 지역과 문화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도덕’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지극히 단순 명료한 입장에서 도덕적 입장을 밝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현대사회의 복잡성은 수많은 정치적 논쟁을 불러왔다. 자유주의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의 기나긴 대립은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싸움처럼 지루하다. ‘도덕’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사람과 세계를 해석하는 기준의 차이로 드러나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why marality』를 통해 이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렸던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는다. 신산스런 역사를 돌아보면 철저하게 생존경쟁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자화상이 처연하다. 그래서 ‘도덕’보다 ‘생존’이 앞섰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 살아남았다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공동체의 가치는 생소한 용어이며 ‘가족’이라는 이기적 울타리 안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근대국가가 출발하며 사람들에게 심어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만큼이나 ‘가족’ 단위의 공동체는 강고하기만 하다. 나와 우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나와 가족 안에서 매몰되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은 가장의 가족 살해와 자살이라는 끔찍한 신문기사를 양산한다.

1부에서는 경제적 도덕, 사회적 도덕, 교육과 도덕, 종교와 도덕, 정치적 도덕 등에 대한 미국 사회의 현안들을 점검한다. 복권과 도박에서부터 낙태, 동성애, 존엄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덕적 주제를 다룬다. 2부에서는 정치 이론들을 검토한다. 이 이론들은 물론 미국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정치적, 종교적 가치는 물론 공동체와 시민의 덕목에 대해 살펴본다. 3부에서는 미국 정치사의 주요 논쟁을 보여준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에 이어 세 번째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한국적 가치체계에 대한 부재와 우리 사회의 부끄러움이다. 선진국과 후진국, 문명국과 원시사회를 가르는 기준은 자유와 평등, 인권의식, 정의와 윤리, 복지정책, 정치제도 등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공동체적 가치는 무엇인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정치적 성향과 정책의 차이는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와 강원도의 차이도 아니고 보수와 진보의 차이여서도 안 된다. 합의된 공동체의 가치가 마련되어야 하며 지향점을 향해 수많은 논쟁을 통해 정의의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공정사회’는 주둥이로 부르짖는 공허한 외침이어서는 안 되며 모두가 공감하는 사회적 합의와 가치가 되어야 한다. 제도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공직사회에 발을 부치지 못해야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짓임을 알게 해야 한다. 개인적인 잣대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긴, 전 재산 29만원으로 아직도 살아있는 전직대통령 재임시절 국정지표가 ‘정의사회 구현’이었던 대한민국이다.

미국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와 다르듯 정의와 도덕의 기준과 개념도 다르다. 이 책은 오래된 논쟁의 한 페이지들을 넘겨 볼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비록 미국의 이야기지만 보편적 가치를 통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정한 법 집행, 교육의 시장논리, 사생활 보호, 정치인의 거짓말 등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이지만 바라보는 관점과 받아들이는 태도는 많이 다르다.

이 책은 결국 3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인 자유가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를 위한 경제정책, 시장중심주의의 위험성, 개인주의를 넘어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아야한다. 나와 무관한 정치인들의 이야기나 내가 어쩔 수 없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찾아보아야 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도덕인가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이론이나 정치적 신념이 아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넘어선 우리 사회의 가치 지향점에 관한 논의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듯한 책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나를 말해준다. 즉, 우리사회의 베스트셀러가 가장 좋은 책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들의 관심사와 우리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와 권력의 이름으로 부당거래가 공공연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들의 생각과 미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책은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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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적(的) 접사. (일부 명사 뒤어 붙어) ‘그 성격을 띠는’, ‘그에 관계된’, ‘그 상태로 된’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고유어에는 ‘-적(的)’이 붙지 않는다. 부사에 붙은 ‘-적으로’와 부사어에 붙은 ‘-적’은 군더더기이다. ‘-적’ 대신 조사나 접사를 붙이면 한국어에 한결 어울린다.

정영숙, 일본어 접사 “的”의 성립 및 한국어로의 유입문제 고찰,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문영은, 日本語と韓國語の漢語につく接辭「的」の硏究,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국회도서관이나 협정기관(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논문자료라서 찾아볼 수 없다. 다음으로 미루어 두었다. 도대체 ‘-的’이란 무엇인가? 일본어의 영향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예를 보면 가끔씩 눈에 거슬릴 때가 많다. 책을 읽다가 특정 단어를 세어보기는 처음이다. 23페이지에 14번.

논문과 학술지에 사용하는 문장과 문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글씨는 따분하고 고루한 반면 진중하고 깊은 맛이 난다. 이에 비해 저널리즘에 충실한 글씨는 유연하고 부드럽지만 가볍고 자극적일 수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은 당연히 두 가지 특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정원의 『전傳을 범하다』를 읽기 시작하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유를 찾다가 떠오른 생각들이다. 초반에 힘이 너무 들어간 것 같다. 중반이후에는 생각의 흐름이나 문장이 쉽게 읽힌다. 어쨌든 작가 특유의 문체라고 볼 수 없는 버릇 때문에 몰입할 수 없어 난감할 때가 있다.

자극적인 제목만큼 표지도 삽화도 전체 디자인도 공을 많이 들인 책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소설을 재해석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책머리에 앞세운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고전은 누구나 그 가치를 인정하는 책이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다. 특히 세계문학과 고전문학이 그러하다. 줄거리를 알고 있거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먼저 접했기 때문에 읽은 것 같은 느낌,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많다. 꼼꼼하게 읽어가며 시대와 대화를 나누고 작가와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독자들 입장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고전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미이고, 뻔한 내용과 주제를 뒤집어 생각하는 다시읽기의 즐거움이 두 번째 의미이다. 황새결송이나 최낭전처럼 익숙하지 않은 고전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고, 토끼전이나 심청전 같은 익숙한 소설들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신선하다. 殺(죽은자의 변), 慾(욕망의 늪), 權(지배자의 힘), 我(나의 재발견)의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놓칠 수 없는 대목을 소개하기도 하고 각 부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기도 한다. 이렇게 소개한 고전소설은 모두 열일곱 편이다.

<토끼전>은 ‘봉권 권력에 대한 민중의 승리’ 따위의 도식적인 주제로 정리될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처연한 진실을 보여준다. - P. 103

예를 들어, <토끼전>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관계에서 파생된 삶의 진실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해석은 단순하게 토끼의 임기응변과 용기, 자라의 충직함을 교훈적으로 받아들인 독자들에게 새로운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토끼의 간을 빼려는 시도는 생명에도 ‘경중’과 ‘상하’의 위계관계가 엄존한다는 사실이 전제된 행위이다. 봉건사회의 가치가 반영된 이 소설은 자라 부인과 토끼와의 관계 등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본질을 드러낸다. 이렇게 고전 소설은 현재적 유용성을 가지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문학의 보편성이란 시공을 초월한 자리에 오롯이 놓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토끼전>은 우리의 삶을 이렇게 재해석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이 천박한 발전의 논리는 우리 사회에서 선진국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일류 국가의 명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국가는 가난한 시민들의 간을 빼내어 신도시를 건설하려 하고, 하찮은 동식물을 죽여 세련된 자연 환경을 유지하려 한다. 자신이 수행하는 일에 대한 과분한 사명감은 때로 정말로 슬픈 결과를 낳기도 한다. - P. 106

무소불위의 용왕과 자라의 충직함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픈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고전읽기의 전례가 될 것이다. 고전은 언제나 살아 숨 쉬는 텍스트여야 하며 박제된 모습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책꽂이 한켠을 장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장화홍련전>에서 시작해서 <전우치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횡무진 고전소설의 숲을 산택하는 즐거움은 충분하다. 스토리만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꼼꼼한 텍스트 읽기의 필요성과 그것을 소화시키는 다양한 방법을 즐길 수 있다. 오래된 미래를 기억하는 상상의 공동체가 민족이다. 고전소설이 전하는 지혜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하는 거울이며 당대의 삶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조상들의 모습과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중첩되는 이유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신산스런 삶은 어깨를 무겁게 하지만 시대정신과 삶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도 바로 우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고전이다. 다시 읽고 되새기고 그 깊은 맛을 음미해 보기 전에 좋은 안내서가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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