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 이제 베짱이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한경애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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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내가 살아 있는 매 순간이며 삶 그 자체이다. 우리의 삶이 무엇도 박탈당하지 않고 그 자체로 충실한 현재일 수는 없을까? - P. 45

  나는 여전히 연속적인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새에 불과하다. 날고 싶은 꿈을 꾸었지만 비상하지 못한 채 날개만 파닥이며 새장 안을 떠돌고 있다. 창살에 부딪히는 순간 돌파구를 마련하기 보다는 왜 거기에 창살이 있는지 생각에 잠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보다 발까지 가는 길은 훨씬 더 멀고도 험하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행동’이라는 말했던 J. 네루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운신의 폭은 넓지 않다.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분단위로 시간을 가른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것들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상황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때가 많다. 내 삶을 그 자체로 즐기거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다는 꿈을 버린 지는 너무도 오래 되었다. 잠을 줄이고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말자고 다짐하는 일이 서글프기도 하다. 책 속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는 없지만 토막 난 모든 시간들은 책 속에 몰입하며 지낸다. 나는 과연 내 삶의 주인인가?

  충실한 현재를 즐기고 있다는 믿음은 자기 최면이거나 미래를 위해 순간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희망일 수 있겠다. 인생이 놀이가 되는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놀이’라는 개념이 ‘일’의 대척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생각해 봐야 한다.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는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패턴을 반성한다. 경쟁과 자본의 논리에 매몰된 우리의 인생을 되돌려 달라고 외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라는 시리즈 이름이 도발적이다. 첫 번째 책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에서 고미숙이 힘주어 말했던 참된 공부법은 바로 ‘놀이’라는 개념과 상통한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고 자신의 이념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놀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놀이의 달인’을 내세운 것이 ‘공부의 달인’과 반대인 것 같지만 인생에 대한 진짜 공부가 놀이가 되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어린 시절 ‘개미와 베짱이’ 우화로 세뇌되기 시작한 우리의 믿음은 단선적이다.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공부)해야 한다. 게으름은 죄악이다. 쉬지 말고, 놀지 말고 열심히 해라.’ 이러한 맹목적인 강요와 믿음은 여전히 계속된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 대한 목적과 방향이 없으니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가진 자가 행복하다는 말에 반론이 있을 수 없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진짜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은가. 구체적인 방법과 대안을 제시해서 이렇게 살면 된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반성과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는 그 안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싶다.

  두 살부터 영어를 시작하고 영어 유치원에서 경쟁력을 키워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각종 경시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늦게까지 문제집과 씨름하다가 중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특목고에 올인 한다. 입시지옥은 긴 설명이 필요 없고 정답이 정해진 논술을 위해 책은 수단이 되었고 대학은 취업을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래다. 재테크와 주식투자 동아리에서 실전 감각을 키워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전략을 세우고 청약 점수를 계산하며 아이가 생기면 내가 살아왔고 아이가 살아가게 될 미래의 경쟁력을 위해 또 다시 무한 경쟁이 반복된다. 늙어죽기 위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계산해 보라는 TV 광고의 압박에 시달리고 노후 준비를 하지 않는 삶은 끔찍하기만 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과연 행복한가?

  일반적인 삶의 패턴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들 인생의 자화상이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저자는 완강히 거부한다. 축제와 놀이로 가득한 인생은 불가능한가? 현재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소극적인 낙관주의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계란과 닭의 관계처럼 교육과 사회 구조의 문제는 단순화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거기에 한미 FTA에 이르기까지 급변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가중되고 있다. 그 와중에 한바탕 즐기고 놀아보자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모두 파괴되고 모든 것이 사고파는 상품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아무도 나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공포는 끝없는 노동을 강요한다. 과거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의 삶은 훨씬 바쁘고 힘들어졌으며 노동은 고통스럽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행복은 끝없이 연기되고, 미래에 대한 공포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 P. 55 

  노동과 일이 어떻게 다른지, 놀이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이 놀이의 달인이었는지 이 책은 쉽고 재미있게 보여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인 저자는 교육과 연관시켜 이 문제를 논하고 있지는 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놀아본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있다. <모더니티의 지층들>을 통해 보여주었던 만만치 않은 내공과 편안한 글쓰기는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짧은 분량임에도 그림과 사진 등 다양한 예술 작품과 어울어져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고 책의 내용을 풍성하게 꾸며주고 있다.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들이 왜 필요한지, 인생역전이 과연 인문학을 통해 가능하지 의아하겠지만 새로운 시각과 트인 생각은 사람들과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정답도 없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막연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대신 기쁨을 창조하라. 우리의 욕망, 우리의 성장, 우리의 실천, 우리의 놀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고 외치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 한 번쯤 귀 기울여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싶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갖는다면 현실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경고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즐거움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루한 세계를 돌파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함께 놀 친구들, 힘센 상상력이 필요하다. - P. 163

07102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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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7:04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멜기세덱 2007-12-14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sceptic 2007-12-17 22:15   좋아요 0 | URL
저보다 님에게 축하를 보내야 할 듯 한데요...책값 축하드립니다...
 

많이 만들고 많이 버는 것, 즉 물질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러한 삶이 스포츠와 예술 같은 놀이마저 노동으로 만들고 말았다고 호이징가는 탄식한다. - P. 33

그러나 시간은 금이 아니다. 시간은 내가 살아 있는 매 순간이며 삶 그 자체이다. 우리의 삶이 무엇도 박탈당하지 않고 그 자체로 충실한 현재일 수는 없을까? - P. 45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모두 파괴되고 모든 것이 사고파는 상품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아무도 나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공포는 끝없는 노동을 강요한다. 과거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의 삶은 훨씬 바쁘고 힘들어졌으며 노동은 고통스럽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행복은 끝없이 연기되고, 미래에 대한 공포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 P. 55

외부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조금씩 마비 상태가 되어 더 큰 자극을 욕망할 때 나는 놀고 있는 게 아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아바타에 불과할 뿐. - P. 83

놀이는 언제나 그 안에 전혀 다른 미래, 우연과 의외성을 숨기고 있어야 한다. - P. 85

당연한 듯 우리를 포획하던 규칙을 벗어나 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전혀 새로운 욕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P. 125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대신 기쁨을 창조하라. 우리의 욕망, 우리의 성장, 우리의 실천, 우리의 놀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 P. 125

그러나 잊지 말자. 즐거움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루한 세계를 돌파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함께 놀 친구들, 힘센 상상력이 필요하다. - P. 163

우리는 소비하기 위해 노동한다. 그리고 어느새 소비의 순간만이, 우리가 주인이 된 것처럼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 되어버렸다. - P.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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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피면 - 10대의 선택에 관한 여덟 편의 이야기 창비청소년문학 4
최인석 외 지음, 원종찬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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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 이문세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며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리는 가을 오면 아침 찬 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워~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리는 가을 오면 아침 찬 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워~ 여위어 가는 가로수 그늘 밑 그향기 더 하는데 워~
 
아름다운 세상 너는 알았지 내가 사랑한 모습 저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내가 사랑한 그대는 아나

  
  이문세의 노래를 들으며, <별이 빛나는 밤에>에 귀 기울이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 시대의 흐름은 유행가의 변천 과정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나 결정적 시기라고 하는 말들은 불가해한 심리적 변화와 예측 불가능성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불안과 열정으로 대표되는 청소년기는 사춘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어야 하는 세대를 일컫는 말이 청소년이다. 정확하게 세대를 규정지을 만한 기준은 없다. 그래서 명칭도 모호하다. 청년과 소년의 합성어인 청소년은 보통 1318세대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과정으로 보면 중고등학생들을 이르는 말이다.

  세대마다 독특한 특징과 나름의 문화를 형성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다. 그 세대들을 4.19세대 혹은 386세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살아온 시대가 아니라 특정한 시기를 가리켜 지칭하기도 한다. 청소년기는 어떤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성장통’을 공유하는 세대이다. 불안한 심리상태와 급격한 신체 변화 끊임없는 내적 갈등과 ‘선택’에 대한 고민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이다.

  주변에 훌륭한 멘토를 만나 호기심을 해결하고 마음을 의지하며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또래 친구들이 아니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왜곡된 시선과 부정확한 정보로 세상을 잘못 인식하기도 하며 사람들과의 관계는 삐그덕 거리기만 한다. 이런 시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구체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학교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폭력적인 입시지옥과 규율은 다양성과 자율성을 철저하게 침해하고 있으며 하나의 길로 인도하거나 결국 똑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으로 길러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인생에서 자신이 걸어갈 길을 찾기 위해 부딪히고 고민하며 다양한 삶의 가치에 대해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와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사람들이 청소년이 아닐까 싶다.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어떤 것에 열정을 가지고 즐겁고 재미있는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는지 그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의 고민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것은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아동문학의 범람과 성인 문학의 확고한 아성 사이에서 소외되는 청소년 문학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 ‘창비청소년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시도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본격적인 창작 문학 분야에서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가 계속해서 발간되고 있다. 이번에 발간된 <라일락 피면>은 8명의 소설가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하나의 주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공선옥 ‘라일락 피면’,  방미진 ‘영희가 O형을 선택한 이유’,  성석제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오수연 ‘너와 함께’, 오진원 ‘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 조은이 ‘헤바(HEBA)’, 최인석 ‘쉰아홉 개의 이빨’, 표명희 ‘널 위해 준비했어’

  기성 작가들과 아동 문학을 업으로 삼은 작가들이 청소년들을 위해 써 놓은 단편들이 모여 있지만 기획의도와는 달리 전체가 조화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그 의도와 명분은 높이 살만하지만 작품들의 수준(?)과 깊이가 제각각이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겠지만 공선옥의 ‘라일락 피면’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줄 수 없었던 소설만의 미덕을 잘 살리고 있다. 석진이의 내면 풍경과 그의 시선에 비친 80년 5월 광주의 봄이 라일락으로 상징되는 화려함과 겹쳐 비극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아픔을 겪지 않은 시대는 없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는 없다. 석진과 윤희의 선택을 보며 청소년들을 무슨 생각을 할까.

  작가들을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여 표제작이 되었지만 대표작이 될 만하다. ‘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와 ‘널 위해 준비했어’는 동성애와 은둔형 외톨이라는 비주류 계층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묻어 있다.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한 노력은 머리로만 되지 않는다. 가슴으로 다가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좀 더 다양한 소재와 접근 방식으로 청소년 문학이 풍성해지기 바랄 뿐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덟 편의 단편이 다소 불협화음을 내더라도 따로, 또 같이 그들만의 문제와 고민들을 공유할 수 있고, 보다 폭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변화 가능한 청소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고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고민의 단면들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07102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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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향기 2007-10-25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봤습니다. 화려한 휴가를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던 중학생 딸애에게 이 책을 권해줘야겠네요.

sceptic 2007-10-25 15:27   좋아요 0 | URL
화려한 휴가를 보며...참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갖는 건 기성세대 뿐만은 아니겠지요...중학생 따님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인의 관계심리학 살림지식총서 279
권수영 지음 / 살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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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다가 핸들을 꺾으며 정리되기도 하고 말없이 사라지던 뒷모습이 생각나기도 하는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끊임없이 죽어가도 계속해서 태어난다. 인류는 끄덕없이 유지되며 아직도 오히려 좀 더 죽어줬으면 좋겠다. 쾌적한 지구를 위해서는 아직도 인구가 너무 많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구덩이를 파고 홀로 매몰되어 있는 듯 하지만 지구의 반대편까지 여섯 단계의 법칙에 따라 연결되어 있다. 넓고도 좁은 세상에서 우리는 한 번도 대면하지 않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문제는 사람의 숫자나 관계의 망이 아닐 수도 있다. 그 관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와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이러한 인간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 보면 우리의 일상과 만나게 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린왕자가 말한 것처럼 길들인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들이는 과정에 ‘동의’가 생략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부모 자식 간이나, 부부 사이, 친구 사이,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다. 길들여지고 싶지 않은데 길들이려는 사람이 있고 길들여지고 싶은데 길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모두 불행해진다.

  이러한 ‘관계’는 맺어진다고 표현하는데 특히 한국에서의 ‘관계’는 조금 특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문화적 특성의 차이이기도 하다. 대선 후보들이 무슨 무슨 ‘향우회’로 똘똘 뭉쳐진 모임에 나가 한 표를 구걸하는 모습은 코미디에 가깝다. 21세기에도 고향이 같은 사람들의 힘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다. ‘관계’는 그렇게 인위적인 선택이 아니라 우연적인 필연에 의해 발생한다. 그 첫 번째 관계가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서로에게 가장 큰 ‘사랑’을 나누어 주기도 하지만 죽음과도 같은 가장 큰 ‘고통’을 주기도 한다. 특수 관계라는 말로 규정짓기에 우리에게 가족은 너무 큰 멍에와도 같다. 부모형제 모두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개인이나 각자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선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끔 부러울 때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화의 불편부당함과 부자유스러움은 목을 죄는 사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혈연과 지연에 의해 묶여 사는 우리의 모습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아주 느리고 점진적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가부장제와 장자중심의 문화에 제도적인 변화가 도래하고 있다. 호적법이 바뀌고 결혼이나 가족제도에 변화가 밀려오면 우리는 더 이상 근대 혹은 전근대적인 ‘관계맺음’에서 자유로워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계가 모호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경계를 인식하거나 안전하게 지켜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거나, 부당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공격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P. 38

  관계는 이렇게 취향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며 선호도도 다르다. 특히 ‘효孝’나, ‘우애友愛’ 등으로 묶인 사람들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집착과 소유의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관계심리학>이라고 하는 매력적인 제목의 책은 핵심을 짚었지만 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에서 보여줬던 탁월한 분석이나 정리를 목적으로 한 책은 아니지만 결론이 애매하다. 한국인 사이의 ‘관계’의 의미를 밝히고 그것을 나누는 ‘경계’가 인간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경계’와 윤리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따로 또 같이’ 문화를 만들어 왔던 우리를 돌아본다. 결국 한국인의 관계를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사람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룬 ‘경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안전하기 위해 담을 높이 쌓아 올릴 것이 아니라, 함께 하면서 공감하고 서로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관계가 공존할 수 있도록 남을 배려하는 바로 ‘관계적인 경계’가 필요하다. 우리의 존재 밑바탕에 경계와 경계의 사이를 관계로 메울 수 있어야 한다. - P. 93

고 정리하는 저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고민한다. 아니, 우리가 더 고민한다. 사람들에게 한참 회자되었던 정현종의 ‘섬’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시가 된다. ‘가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가지 못할 것이라는 안타까움에 대한 열망이자 영원한 시지프스의 신화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0710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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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림 읽기 - 알베르토 망구엘의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미경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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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림은 미술의 한 분야이지만 때때로 예술을 대표하기도 한다. 통념상 미술하면 그림을 떠올린다. 조각이나 건축도 미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예술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수많은 시간들을 그림 그리기에 할애한다. 목적도 이유도 없다. 그림은 그저 하나의 놀이이고 유희일 뿐이다. 그것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초상화나 종교화와 결합되었고 예술의 중추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실용적인 목적이든 예술적인 목적이든 우리는 그림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박물관과 전시관 속에 박제되어 버린 예술 작품들을 찾아다니며 관람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새로운 예술의 향유 방식이기는 하다. 내가 내 발로 미술관을 찾아간 것은 10년도 되지 않는다. 슬픈 일인지 모르지만 책을 통해서 그림과 예술에 흥미를 느꼈고 직접 찾아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술의 전당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회나 덕수궁, 인사동 전시회는 기회가 될 때마다 찾게 된다. 사진이나 다른 전시회도 마찬가지지만 막연한 감상 속에서 부딪히게 될 희열이나 정서적 충격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덕수궁에서 합스부르크가에서 소장했던 비엔나미술관의 그림들을 보면서 당시와 역사와 왕가의 계보를 모른다면 얼마나 미적 감흥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다. 중간 중간 배경 지식을 깔아 놓기도 했고 오디오 설명기계도 비치해 놓았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도 감상하고 확인하는 그림 감상 방법은 상징과 알레고리로 똘똘 뭉쳐진 그림들의 해석 방법이다. 시대와 그림에 따라 감상 태도와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는 책에 관한 책으로 손 꼽을 만한 책이다. 학문과 예술을 넘나들며 유목하는 지식인들이 부럽기만 하다. 우리와 다른 지적 풍토 때문인지, 교육환경 때문인지 모르지만 바다 건너편에는 그런 인간들이 많다. 진짜 부럽다. 단순 비교를 통해 그들의 비교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적 편력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망구엘의 눈을 빌려 몇 명의 작가를 살펴보고 몇 장의 그림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말한 것처럼 내 방식대로 예술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그것은 내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포용적인 시선과 넓은 시야를 가능하게 한다.

  이 책에는 조앤 미첼의 <두 대의 피아노>, 로베르 캉팽의 <화열 가리개 앞의 동정녀와 아기 예수>, 티나 모도티의 ‘무제’, 라비니아 폰타나의 <토니나 초상화>, 메리애나 가트너의 <서 있는 네 사람>, 필록세누스의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모자이크화>, 파블로 피카소의 <통곡하는 여인>, 알레이자디뉴의 ‘성 베드로 조각상’, 클로드-니콜라 를두의 ‘아르케스낭’, 피터 아이젠만의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 모형, 가라바조의 <일곱 가지 자비스런 행동>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적혀 있다. 저자의 박학과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과 문화적 배경은 물론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공시적, 통시적 관점의 시선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한 작가의 한 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와 그를 둘러싼 주변 풍경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특별한 형식 없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풀어나가는 글이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그림들을 즐기며 감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인쇄 상태와 지질이 양호하기 때문에 조잡하지 않다. 편안한 음악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이 책과 함께 해도 좋겠다. <독서의 역사>에 대한 좋은 기억과 강유원의 추천을 믿고 본 책이다. 책을 선별하고 도서목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즐거움이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미술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책이 도구가 되어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안목이 길러진다면 나름대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해설이나 주관적인 감상, 배경지식의 나열을 통해 독자들에게 좋은 안내자가 될 수도 있지만 해설서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창조행위다. 그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코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물론 예술작품은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도 역시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예술작품의 본성 때문에 완전하고 결정적인 해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많은 것을 시사하면서도 동시에 애매모호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 230

  수전 손택은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저자는 예술작품은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타당한 설명과 감상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견해를 밝힌 두 사람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를 문제이다. 그것은 관찰자 혹은 독자 개개인의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 알고 보든, 보는 것만으로 느끼든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진실은 다양하게 변주될 것이다.

  그것이 단 하나의 해답을 품고 있거나 직관적인 감상만 가능하다면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닐 것이다. 현실과 예술의 관계, 해석과 감상의 문제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예술은 없다. 자연에 대한 모방과 외경에서 예술이 출발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만큼 창 밖에 가을비가 아름답다. 이 비 그치고 나면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여주겠지만.

그림이든 조각상이든 결국 모든 형상은 망막을 현혹시켜 발견이나 기억의 환상을 야기하는 얕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입자 하나하나마다 우리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고 있는 미립자로 이루어진 무한소의 나선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 P. 432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진실의 작은 조각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막론하고 예술작품 속에 담긴 진실을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반신반의하면서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적어 내려간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 P. 432



07101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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