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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에 홀리다 - 신화, 종교, 과학에 얽힌 시각적 경이로움의 역사
줄리언 스팰딩 지음, 김병화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의 의식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보는 것(seeing)이다. 시각적 정보에 의해 모든 사건과 사물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결정되며 그 시선은 간단하지 않은 우리들의 의식구조와 인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시각적 정보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만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1차적이고 즉자적인 정보는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감각들의 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식의 차원에서 본다면 언어의 사용을 위한 청각보다도 우선적이다. 머릿속에 갈무리 되지 않은 언어의 개념은 무용하다. 기표(記表·Signifiant)는 기의(記意·signifie)를 전제로하는데 기표는 감각적 이미지의 재현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시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당연한 진술이 나온다. 줄리언 스팰딩은 예술을 봄(seeing)으로부터 출발한다. <미술, 세상을 홀리다>는 출판사의 책 제목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만 책 내용을 그다지 잘 담아내지도 못했고, 진부한 방식의 답습으로 강한 인상도 흡인력 있는 문구도 제시하지 못한 채 밋밋하게 ‘○○, ○○하다’는 제목이 주는 안정감에 편승하고 있어 조금 아쉽다. 번역서의 제목은 책의 이미지와 판매부수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제목을 시비 거는 이유는 훌륭한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이다.
이 책은 다른 미술관련 책들과 많이 다르다. 우선 미술사를 표방하고 있지만 연대기적 서술이나 유파별 혹은 작가별 서술은 찾아볼 수가 없다. 미술사를 통찰하는 유일한 기준은 ‘경이로움(wonder)’이다. 책의 원제가 ‘경이로움의 예술(Art of Wonder): 보는 행위의 역사(A History of Seeing)’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의 큐레이터이자 미술사가인 저자는 미술에 대한 또 하나의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에 의한 미술과의 만남은 1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접근이다. 보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미술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에 독자들은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눈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셸 프루스트의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은 미술 뿐만 아니라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행의 중요성은 장소가 아니라 동행하는 사람인 것과 같이 무언가 깨달음과 각성이 필요하다면 새로운 풍경을 쫓을 것이 아니라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는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오해와 관심은 사실 편견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seeing) 자체에서, 우리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과정에서 또다시 놀라운 것이 발견될 것이다. 사적 경험의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세계는 지금까지 사실관계만을 따지는 과학적 탐구 분야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왔지만, 이제는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예술가가 활동할 풍요롭고 다채로운 사냥터이다. 의식, 죽음의 인식, 예술 제작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있고, 이러한 연관성이 바로 우리와 다른 생물, 심지어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네안데르탈인과의 차이일 수도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지평선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경험의 핵심적 본질인 감정과 생각은 그 지평선에서 다시 한 번 경이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결국은 우리 눈에 별이 있는지도 모른다. - P. 315
예술의 발생과 기원으로부터 출발해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표현과 흐름들을 재미있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저자의 노력은 책 곳곳에 배어있다. 우선 책날개 부분을 활용한 삽화들과 사진들은 낯선 작품과 애매한 느낌을 즉각 해소시켜 주는 시각 자료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 본문에 삽입된 그림이나 사진 자료는 물론이지만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크기와 편집을 통해 적절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배열하고 있어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장점을 지니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서양 예술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신화의 시대부터 종교의 세기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와 예술적 경향들 그리고 작가들의 노력이 작품을 통해 제시된다.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저자는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배경으로 예술과 역사 그리고 색다른 예술의 세계를 소개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부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미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별과 태양과 달, 탄생과 죽음, 빛과 어둠 등 주제별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묶이면서 전체가 미술사 전체를 조망하도록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계획한다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없는 책임은 물론이다. 일견 부럽기도 하고 번역서가 가지는 다소 딱딱하고 건조한 문장이 가지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는 책이다. 어쨌든 대중적인 미술사로 이만한 책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책을 번역한 김병화가 인용한 마티스의 말을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책장을 덮는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후천적인 습관에 따라 다소 왜곡된다. 이런 현상은 영화 포스터와 잡지들이 온갖 틀에 박힌 이미지를 쏟아 내는 오늘날 더욱 자명해 보인다. 편견이 마음을 오염하든 이런 이미지는 눈을 오염한다. 왜곡 없이 사물을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는 모든 대상을 항상 처음 보듯 대해야 하는 화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아이와 똑 같은 눈으로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능력이 없으면 자신을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없다.” - P. 321(마티스)
071202-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