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을이다 - 위험 사회에서 살아남기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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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자기 의지와 무관한 일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의지박약이나 의존적, 외부적, 타인 지향적, 책임 회피 성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은 것이 인생이다. 절대로 공평하지 않으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개인의 입장에서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를 조망하는 일은 결코 객관활 될 수 없다. 알면서도 아쉽고 허탈할 때가 많은 법이다.

  자기 삶의 중심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직업과 연령, 성별과 지역을 떠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생에 대한 태도는 다양하기만 하다. 문화인류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조한혜정의 렌즈에 투영된 세상은 어떤 것일까. <다시, 마을이다>는 그 기록의 한 켠을 보여주는 칼럼집이다.

  신문에 실린 칼럼들은 시론時論이기 때문에 철지난 노래처럼 들릴 수도 있고 지나간 신문 뭉치처럼 거북하게 여기질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책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거의 7, 8년 전 칼럼부터 최근의 글들까지 다양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기억이 아득할 수도 있고 최근의 일들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다만 나와 다른 관점, 혹은 조금 빗겨선 자리에서 렌즈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몇 가지 생각의 갈피들을 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기에 접어들었다는 사회학적 평가는 타당한가. 저자는 이론적으로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아니 접근할 수가 없는 분량과 지면이다. 착한 국민 콤플렉스나 미국의 애국주의 혹은 천수만 개발 반대를 위한 삼보 일배 등을 통해 개발 독재 시대와 환경 문제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근대성을 발견한다. 도심 한복판 인사동에서 벌어지는 추석 축제를 통해 우리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개별 가정의 구조와 편의 시설이 문제가 아니라 이웃과 마을을 고려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조건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하자센타(http://www.haja.net)’를 운영하면서 이 땅의 청소년들에 대해 가졌던 관심과 애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일탈과 방황의 원인 그리고 그 대안과 미래를 고민하는 저자의 열정도 엿볼 수 있다. 우리들의 자화상이며 우리들의 미래인 그들의 모습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그들 스스로가 비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보여주고 가르쳐준 것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프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가장 불행한 세대라는 ‘88만원 세대’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과거와 결과물일 뿐이다. 책임 소재를 밝혀보자는 말이 아니라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 의식과 다함께 고민을 나눠야 할 문제라는 공통된 인식부터 필요하지 않은가.

  내 아이는 사교육비를 처발라 일류대를 목표로 경쟁에서 이기고 있으니 니들끼리 얘기해라, 다른 아이는 몰라도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지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등의 생각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부모라면 지금 우리의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이데올로기, 이념과 갈등의 시대를 넘어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한 후 이제는 가족과 개인의 행복과 이기적 욕망들이 더욱 거세게 넘쳐날 것이다. 대안교육과 홈스쿨링 등 대안들이 모색되고 공교육 자체의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경쟁과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떻게 규정될까? 어느 시대나 갈등과 문제는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고민들이 사회를 지탱해 왔겠지만 끝없는 경쟁과 시험, 취업 전쟁과 육아 전쟁을 거쳐 주택과 노인 문제로 이어지는 대다수 서민들의 삶에서 희망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희망은 돈으로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

  새로움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로부터 벗어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시간만 흘러간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는 어떤 사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합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반의 지지’ 혹은 ‘절대적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되었다고 굳게 믿는 이명박은 우리에게 어떤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인가 하고 손 놓고 기다릴 일이 아니다. 내 손등을 찍고 싶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행동하고 책임져야 한다. 그를 찍지 않았다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07122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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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진화 - 자기정당화의 심리학
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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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가 길을 가다가 포도를 발견했다. 포도는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다. 여우는 포도를 따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지만 결국 따지 못한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길을 가면서 여우는 중얼거렸다.
  ‘저건 신 포도일 거야.’


  심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신포도기제’ 이야기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낮게 평가하는 인간의 속성을 정확하게 꼬집는다. 반면에 달콤한 ‘레몬기제’도 있다. 내가 가진 것을 과대평가하는 속성이다. 자기 합리화는 누구에게나 있다.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선택한 물건과 사람과 학교와 직장에 대한 긍정적이고 관대한 태도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반면에 기회비용으로 지불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저평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부정적 태도 또한 살아가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긍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나무랄 까닭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 양립할 수 없는 생각들이 대립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이 때 인간은 적절한 조건을 만들어 자신의 믿음에 맞추어 행동을 바꾸기보다는 행동에 맞추어 믿을 조정하게 된다. 리언 페스팅어는 이것을 ‘인지부조화 이론’이라 명명했다. 이 이론을 토대로 ‘자기정당화의 심리학’을 파헤친 책이 <거짓말의 진화>이다.

  이 책은 의도적인 거짓말에 대한 심리학 책이 아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엘리엇 애런슨과 캐럴 태브리스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연구 보고서이면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행동 양상과 그에 따른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는 책이다. 인지부조화는 자기 정당화의 엔진이다. 이것을 토대로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부정확하며 심지어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실증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실험과 제약회사들의 연구지원을 받는 의사들의 연구보고서 등 황우석까지 사례로 들어 자기 정당화의 사례들을 나열하고 있다. 광범위한 자료와 실례를 통해 우리가 간과하고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법 전문가의 경우가 가장 심각해 보인다. 수사, 심문, 기소, 판결 과정에서 벌어지는 피의자들의 무죄 사례를 통해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굳건한 믿음들이 얼마나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사랑과 결혼으로까지 이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적 매커니즘까지 읽고 나면 평소에 우리가 하는 행동과 생각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게 된다. ‘인지부조화’를 ‘자기정당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기울였던 장치들을 확인할 수 있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나의 행동과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부조화’와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잘못이 저질러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조언은 철학자나 인생의 멘토 입장이 아니라 심리학자의 입장에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불편이든 결정의 대가가 클수록, 그리고 그 결과를 물릴 수 없는 정도가 높을수록 부조화는 커진다. 더불어 자신이 내린 결정에 따르는 좋은 것들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부조화를 줄일 필요성도 커진다. - P. 39

부조화 줄이기는 자동 온도 조절 장치처럼 작동한다. 우리의 자존감을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자기정당화에 둔감한 것이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어리석은 결정도 내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자신에게 하는 작은 거짓말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 P. 50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했던 모든 말들과 행동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모든 판단들이 흔들리기도 한다.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 있으며 같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진실을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인정하고 자기 정당화를 줄여나가고 부조화를 줄이는 각자의 방법이 다르게 나타난다. 거짓말인줄도 모르면서 하게 되는 거짓말도 있을 수 있고,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지속되는 변명도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계속된다.

  스스로를 삼가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인聖人이 아니면 불가능한 영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자기정당화’의 위험성이다. 그것이 변명이나 거짓이 아니라 신념이나 믿음이라고 외칠 때 올 수 있는 불행에 대해 경고한다. 정치인들이 대표적이지만 의사나 사법 전문가, 군인 등 직종에 상관없이 자기의 역할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실수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071219-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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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진화 - 자기정당화의 심리학
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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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속이기 위한 의식적 거짓말과 자신을 속이기 위한 무의식적 자기정당화 사이에는 매혹적인 회색 영역이 존재한다. 이곳을 순찰하는 것은 미덥지 못하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역사가, 곧 기억이다. 기억은 종종 과거 사건의 윤곽을 흐리게 하고, 범죄성을 호도(糊塗)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자기고양편향(ego-enhancing bais)에 의해 재단되고 형성된다. - P. 16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불편이든 결정의 대가가 클수록, 그리고 그 결과를 물릴 수 없는 정도가 높을수록 부조화는 커진다. 더불어 자신이 내린 결정에 따르는 좋은 것들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부조화를 줄일 필요성도 커진다. - P. 39

부조화 줄이기는 자동 온도 조절 장치처럼 작동한다. 우리의 자존감을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자기정당화에 둔감한 것이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어리석은 결정도 내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자신에게 하는 작은 거짓말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 P. 50

당신의 행위가 변했음에도 당신의 맹점과 자기정당화 때문에 당신의 지적 ․ 직업적 성실성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 P.83

편견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고 싶은 못된 짓을 정당화한다. - P. 98

내 기억이 ‘내가 그것을 했다.’라고 말한다.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굴복한다. - P. 109

기억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첫째, 그때의 감정과 세세한 내용까지 담고 있는 생생한 기억이 명백히 틀리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라는 것이다. 둘째, 어떤 기억의 정확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해도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셋째, 기억의 착오가 현재의 감정과 신념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 P. 110

나약한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빠져 있는 터널시는 시정하기가 좀 더 수월하다. 우리들 대다수가 자기교정이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맹점이 교정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에, 인간이 불가피하게 저지르는 과오를 시정하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외적인 절차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 P.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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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 강유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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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랬다. 보름 남은 2007년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 3일전이다. 총선과 달리 비례 대표도 없다. 한 놈만 정해서 찍어야 한다. 2002년과 다르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놈현과 비교될 만 한 놈도 없다. 이제 정치도 개인의 역량과 능력보다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는 데 그렇게 될 수는 없다. 4천만이 한 마음이라면 그게 어디 사람 살만한 사회인가. 어쨌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지만 감동도 희망도 없는 선거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콘크리트 지지층의 결집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긴 맹박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나. 아니 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한국노총이 맹박이 지지선언을 하는 꼴을 마르크스가 봤어야 하는건데. 희대의 코미디가 벌어지는 현실 때문에 더 이상 ‘개콘’이나 ‘웃찾사’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파시스트라고 볼 수 있을까? 21세기에 다시 읽는 파시즘은 무엇으로도 바꾸기 힘든 인간의 욕망과 본성들이 내재해 있다. 대중들의 파시즘에 관한 심리를 가장 탁월하게 읽어낸 사람 중의 하나인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심리의 파시즘>을 통해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자본가라는 단어가 욕설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특수한 종류의 대중지도와 대중적인 영향력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즉 파시즘은 권위주의적이며, 일당체제이며 따라서 전체주의적이며, 또한 권력이 본질적 이해관계보다 우선하며,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사실이 왜곡되는 체제인 것이다.(P. 307)”라고 선언한 바 있다.

  나치의 상징이었던 하켄크로이츠를 인간이 얽혀 있는 성적 상징으로 읽어 낸 라이히는 성경제학과 가족 내의 억압 구조를 통해 대중들의 파시즘에 경도되는 현상을 간파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음 사용했던 ‘파시스트fascist’라는 용어는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정치 세력과 20세기 초 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상황과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제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개별 국가들의 정치 상황과 맞물렸던 파시즘은 투표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여성의 정치 참여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을 강타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즘ism’들의 향연 속에서 파시즘은 강렬한 유혹으로 대중들을 사로잡는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수 세력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고 있던 시기, 바야흐로 혁명의 후폭풍에 시달리면 세상은 불안한 동거가 계속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광기는 단순하게 우생학과 인종주의로 설명될 수 없다. 유대인의 절멸만이 게르만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는 히틀러나 괴벨스의 개인적 성향의 문제로 귀결될 수는 없다. 케빈 패스모어의 <파시즘>은 유럽에서 자생한 ‘파시즘’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의 광풍이 일어나기 전의 파시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보수주의와 결합한 파시즘의 현상을 되돌아보며 이것이 민족과 인종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젠더와 계급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관점 중의 하나이다.

공산주의 초기의, 파시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는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에 따르면 ‘권력을 장악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이고 쇼비니스트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금융자본주의 요소의 개방적이고 테러적인 독재체제’다. - P. 35

이 관점은 경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파시즘의 대한 정의이긴 하지만 파시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더더욱 놀라운 것은 파시즘도 결국은 “민주적인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선거와 기술적 수단이 없었다면 파시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P. 72)”라는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파시즘도 우리들의 선택이었다는 전제가 가능해진다. 이 책은 파시즘의 역사와 변천 과정 현실 정치와 현실과의 관계를 고찰하면서도 여전히 ‘here and now지금-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폭력과 대응 폭력은 미국의 패권적 제국주의와 이슬람문화와의 갈등 관계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무한 순환 구조는 권위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파시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민족적 대중주의’가 파시즘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은 기우에 불과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걱정과 우려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닐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민주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단순한 믿음만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광기와 폭력은 친구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07년의 현실은 어디쯤 위치해 있는 것일까? 하늘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고 싶다. 아득한 태초에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미래로 여행 중이라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아니 지금 현재의 모습보다 먼 미래의 모습보다 짧은 미래라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아니 타인들의 희망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그래도 2008년은 시작될 것이고, 우리의 삶도 계속되겠지만 파시즘이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해 보인다.


071216-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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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11-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옮겨가도 되겠죠. 지금-여기의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sceptic 2008-11-28 21:59   좋아요 0 | URL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저는 무섭습니다. 분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
박홍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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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종류의 책은 어디에 분류해야 할 지 난감하다. 합치고 아우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나누고 가르는 일도 쉽지 않다. 박홍규의 책 중에서 직설적인 감정이 많이 우러나온 책이다. 감정은 내면이나 의식에서 배어나오는 이성의 작용이다. 이 감정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이 조건 없이 인간관계를 통해 확인되는 감정이 아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사람들이 가진 삶의 조건, 인생의 가치와 일상의 모습 등을 통한 이성적 작용의 결과물이다. 내면에서 외부로 표출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이 아니라 외부 세계를 투과한 감정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거대한 명칭은 듣기에도 부담스럽다. ‘대한민국’은 ‘대영제국’을 모방한 명칭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떠하며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인구수만큼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박홍규의 <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거울은 사물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비춰주지만 인간의 시선과 관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주관적 시선을 뒷받침하는 사상과 이념은 객관적인 평가와 이성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이나 삶의 가치가 다를 경우 저자의 이야기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돌아보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 저자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연 우리는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발전과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과언이 아니다.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달했고 인간의 생활은 편리해졌다. 물론 비교의 기준은 20세기 이전을 말한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다. 시속 150km가 넘게 속도를 내면 시야가 좁아진다. 주변의 사물이나 자연 풍경을 감상할 여지가 없어진다. 김광규의 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처럼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시간과 속도의 경쟁은 무한하다.

  그렇게 살다보니 타성에 젖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시골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박홍규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초등학생들도 들고 다니는 핸드폰 없이 세상을 향해 쓴 소리를 뱉어내는 모습이 과연 불만과 불평을 토해내는 것인가? 개인적인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것은 이런 사회 비평 서적이 나와도 눈여겨보고 자신의 모습이나 우리들의 현재를 반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늘어나느냐의 문제이다. 항상 결론은 실천이다.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손대야 할 지 모른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알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견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욕에 오염된, 돈으로 분단된, 힘으로 왜곡된, 공공이 상실된, 인조로 추악한, 획일로 위기인 대한민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시민이 <대한민국 개조론>을 한 달 만에 썼다고 했는데 박홍규도 이 책을 일본에서 한 달만에 썼다고 한다. 전혀 다른 관점과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두 책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던 유시민과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일리히의 책을 번역하고 실천에 옮기며 살아가는 박홍규는 무엇이 다른가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느 쪽이며 똑같이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얼마나 다른 진보와 개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며 세상을 판단하는 가치와 기준도 다르다. 아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현재와 생활에 이끌려 내 삶을 거기에 끼워 맞추듯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가?

  2007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비현실적으로 해석한 책이 아니다. 우리가 당면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상, 가치 등에 대한 총체적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아니 이 책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가를 한번쯤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지닌 책이 될 것이다.


07121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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