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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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된다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한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한 시절과 만나는 일이다. 시인은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며 살아온 시간들과 바라본 사물들, 떠오른 생각들로 언어의 집을 짓는다. 그것이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독자에게 읽힌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다보면 시인의 눈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세상과 내면의 풍경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독서가 말없는 저자와의 끊임없는 의사소통 과정이라면 시읽기는 시인의 정서와 교감하는 통음通音의 과정이다.

  특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의 시집은 더욱 그러하다. 그에 대한 사전 정보와 배경지식이 있고 다른 시를 통해 그와 만난 적이 있다면 매우 친숙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시인의 시를 읽게 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시인 안도현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는 이전의 시편들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들과 새로움이 중첩된다. 나는 그를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만났다. 2004년에 나온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에 이르기까지 안도현의 시는 변함없이 연탄불의 따스함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자연에 대한 따스한 시선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훈훈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애정없이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을까마는 안도현의 시선은 여전히 축축하다. 물기어린 시선으로 때로는 나약하게 때로는 간절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훈훈한 숨결로 감싼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시의 특성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학적 변모와 변화의 기대까지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소수 독자들의 바람일지 모르지만 아직 이른 판단이기도 하다.

병어회와 깻잎

군산 째보선창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

그 꼬순 것을 깻잎에 싸서 먹으려는데 주모가 손사래 치며 달려왔다

병어회 먹을 때는 꼭 깻잎을 뒤집어 싸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입 안이 까끌거리지 않는다고


  이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에서도 시인 특유의 잠언투의 문장과 주관적 판단과 감성에 기댄 시선들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백석(白石) 생각’이라는 시를 쓸 정도로 이번 시집에는 음식에 관한 시가 많다. 사라지는 것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수많은 음식에 관한 추억과 아련한 기억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관계 맺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잘 나타난 시편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익숙한 음식들인 수제비, 무말랭이, 닭개장, 민어회, 에서부터 먹어본 적도 없는 예천 태평추, 건진국수, 전어속젓, 콩밭짓거리 등 다양한 음식들이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한다. 음식은 오감을 자극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지나간 시간들과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 아슴하게 들추어낸다. 짙은 아쉬움보다 붉은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시들이 이 시집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오래된 발자국

시골 서점 책꽂이에 아주 오랜 시간 꽂혀 있는 시집이 있다
출간된 지 몇해 째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이 죽은 뒤에도 꼿꼿이 그 자리에 꽂혀 살아 있다
나는 그 시인의 고독한 애독자를 안다
본문은 펼쳐 읽지 못하고 제목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날마다 시집 귀퉁이만 밟아보다가 돌아서던 그를 안다
햇볕의 발자국을 가진 사람을 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망각을 담보로 한다. 시인의 시도 잊혀질 것이고 수많은 책꽂이에 꽂혀 칼잠자는 낡은 책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제각기 다른 자세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들 속에서 안도현의 시가 빛을 발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대상에 대한 부드러운 시선 때문이다. 따뜻하게 감싸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사람과 자연과 그리고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언어로 무장한 채 살아가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대한 애정과 또 다른 관심들도 이어지길 바란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나는 ‘참 철없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080127-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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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2008-01-2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에서 저도 '가을의 소원'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는데 여기도 그렿네요,
반갑습니다.
가을이 되면 친구들에게 들려주려고 아껴 두겠습니다,

sceptic 2008-01-29 22:15   좋아요 0 | URL
그렇죠...그냥 전달되는 시들은 마음이 먼저니까...공감할 수 있다면 더욱 좋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