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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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로 시작되는 ‘즐거운 편지’를 버스에서 중얼거리며 등교하던 고등학교 시절이 까마득하다. 시에 처음 눈뜰 무렵부터 읽어 온 그의 시는 여전히 낯설지 않고 살갑다. 표지 사진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 노시인의 눈빛이 깊고 부드럽다.

  <겨울밤 0시 5분>을 통해 황동규의 근작들을 음미한다. 시인에 대한 믿음과 연륜이 어우러져 언어의 축제를 벌이는 듯하다. 화려하고 장엄한 풍경을 노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겹고 자연스러운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된다. 여전히 긴장감 넘치는 표현과 신선한 감각이 살아 있다. 이번 시집의 특징을 뭐라고 이야기하든 황동규의 시에 흐르는 따뜻한 서정과 생의 대한 감각적 통찰은 여전하다.

  자연에 묻혀 생을 이야기하고 순간순간 마주하는 인상들과 이미지들을 풀어놓는 솜씨는 거침이 없고 물 흐르듯 편안하다. 개인적 서정의 극한을 보여주려는 듯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대상들을 언어로 표현하여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그의 시는 환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때때로 외롭고 쓸쓸하다.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삼키는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혼자 있어서 홀가분한 이 외로움,
외로움 아닌 것은 하나씩 마음 밖으로 내보낸다.
속에 봉해뒀던 사람들은 기색이 안 좋지만
하나씩 말없이 나간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비울 게 없으면 시간이 휘는지
방금 읽고 덮은 휴대폰 전광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선창에서 배 하나가 소리 없이
집어등을 환히 켰다.


  시간과 장소가 어우러져 낮과 밤의 경계를 건너는 순간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미지가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각과 후각으로 감지되는 저녁 어스름을 시인은 궁평항에서 온몸으로 맞았으리라. 하지만 그 속에 나는 없고 대상과 풍경만 존재한다.

  아득하게 모든 것이 무화되는지 시인은 집어등과 함께 사고의 흐름을 멈춰버린다. 혼자 있어 홀가분한 외로움이 아니라 환한 집어등에 대한 동경으로 읽혔다.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기면 생의 감각은 벅차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텨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 중 략 ……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사람냄새 나는 시다. 버스 종점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별을 바라보는 시인과 낯선 사람들. 그들에게 시인은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건 아마도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게다. 무엇이 집 앞에서 종점으로 그를 이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독자라면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나 외로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행동과 말들 저편에 생의 부조리와 허허로움이 서 있는 듯하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혹은 바닷가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를까?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풀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작은 존재가 되었다가 무의미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삶의 의욕을 얻기도 하고 허무한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겨울밤은 그리고 0시 5분 그런 시간이다.

낯선 외로움

자기만의 길이와 폭과 분위기를 가지고 살면서 풀에겐들
왜 저만의 슬픔과 기쁨이 따로 없으랴.
마주 앉아 찻잔 비울 때까지
속으로 삭이고 삭여야 할 생각 왜 없으랴.
삭이고 일어설 때 사방에 썰물 빠지는 적막, 속의 황홀!

학교 식당 건물과 땅 틈새에 배죽 나온 저 풀,
오늘은 노란 꽃대 하나 조그맣게 내밀었다.
손가락 끝으로 얼굴 들어보니
쬐끄만 꽃잎과 꽃술들이 오밀조밀 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조금 싸한 냄새까지 한 모양을.
왜 한 뼘쯤 앞으로 기어 나와 좀 편히 살지 않을까,
거기도 인간의 발길 채 닿지 않는 곳인데.
풀에게도 끼가 있는가?
기차게 고달파도 제 본때로 살아보겠다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몸을 온통 졸이는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있듯이 풀에게도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있다. 사람도 저마다 제 자리가 있듯 풀이 돋아난 자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운명을 거부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산다는 일이 어쩌면 잘못 삐져나온 꽃대처럼 신산스럽기만 하다. 한 뼘만 벗어났다면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을, 사람도 그리 하지 못한다.

  내 것을 다른 대상에게 발견할 때 우리는 낯설어한다. 외로움도 그렇다. 실체없는 감정이나 존재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지만 타인이나 사물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생경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외로운가?

잠깐동안

잠깐!
삶이 잠깐 동안이라는 말이 위안을 준다.
잠깐이 몇 섬광(섬광)인가?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슬픔도 잠깐 동안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견딜 만하다. 삶이 섬광처럼 지나가버린 듯 노년을 맞은 시인은 잠깐이 몇 섬광이냐고 되묻고 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깨달음일 것이다. 현재를 살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일까 안타까움일까.

  창밖에 당도해 버린 어둠처럼 죽음도 그렇게 우리에게 어김없이 찾아온다. 단 한 번은. 살아있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매일매일이 안타깝게 느껴질 수 있도록 치열하게(?) 혹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편지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습니다.
허나 감기 타듯 암벽 타듯 해온 삶
손보지 않겠습니다.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
딸인가 눈 지그시 감은 아이 옆에 세워놓고
손 벌린 눈먼 사내에게 천 원으로 알고 내민 만 원
깡통에 떨어트리고
천 원짜리로 알았겠지? 아쉬워할 만큼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

기억의 화면에는 온갖 것들이 무작위로 뜹니다.
산책길에 굴러 내리다 간신히 자리 잡았던 돌이
또다시 구릅니다.
싸락눈 흩날리는 뜰에 혼자 핀 꼿이
겁 없이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왜들 그러는지 모를 만큼 멍청합니다.

오늘은 마을 공터에서 아이들이 날리는 배드민턴 콕을
재치 있게 피했지요.
언젠가 이런 편지 쓰는 일마저 싫증나면
마음 한가운데 생짜 공터가 생기리라는 생각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생각나시면, 지난해 새끼줄로 칭칭 동여맨 나무들
두 번째 봄비 내릴 때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삶은 아직 멍청한 하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고 노래하던 ‘조그만 사랑 노래’의 시인이 이제는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고 말한다. 생의 보편적 진리를 깨달을 것일까 아니면 생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 그 모든 순간의 연속이 삶이며 미리 알고 정할 수 없다는 생각쯤은 어렴풋이 할 만하다.

  황동규의 시를 읽으며 욕심이 사라지고 생의 감각이 살아나고 깨달음을 얻을 만큼 마음이 맑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고개 숙이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듯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시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람이다. 메마른 가슴도 아니고 감각이 무딘 것도 아니지만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힘겨워 고통스런 사람은 없고 시인 홀로 외롭고 쓸쓸하다. 대상에 부딪치는 모든 감각들은 싱싱하게 살아있는 촉수를 뻗고 있으나 그 촉수가 사람에게 가 닿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육화되어 뿜어져 나오는 정제된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정갈하고 깨끗한 신새벽의 맑은 정한수처럼.


090517-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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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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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반경 수십 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아주 먼 과거의 삶은 어떠했을까? 답답해서 견디지 못했을까? 넓고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사람들은 항상 기회비용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을 후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기와 결단력이 없어서 현재의 삶을 이어간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항상 변화를 모색하며 새로운 삶을 꿈꾼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인생이 모두의 꿈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미래 혹은 희망의 이름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기다린다. 그 불안함,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을.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안정을 추구하며 예측 가능한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인류에게 유목적 삶은 시원의 바다처럼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누구나 훌쩍 떠나고 싶어한다. 바다를 동경하고 고래를 꿈꾸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생명의 근원적 속성인지도 모른다. 전혜린의 말처럼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이 숨어 있는 우리들 가슴 속에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떠나고 싶었다.

  전성태의 소설집 <늑대>는 몽골을 배경으로 한 연작들이 주를 이룬다. 낯설고 생경한 풍경, 신산스런 삶의 형태를 통해 우리들의 그것을 돌아보게 한다. 이국의 풍경이 동경과 호기심으로 그려지거나 이질적인 차이만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복잡 미묘하다. 그들의 나라 몽골은 어떤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인가 살펴보자.

  단편 ‘목란식당’은 북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다. 이곳은 남과 북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음식점의 풍경을 통해 작가는 체제의 허구를 드러낸다. 이념의 대립으로 분단은 고착화되어 있고 현실 공간에서 남과 북은 달나라만큼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제 3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음식을 나누고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며 그 실체를 확인한다. 이념의 대립을 다룬 소설도 아니고 몽골의 풍속을 위한 소설도 아니지만 그 모두를 절묘하게 담고 있기도 하다.

  표제작 ‘늑대’는 몽골 초원을 배경으로 인간의 탐욕과 원시성의 만남을 잘 그려내고 있다. 우리들은 삶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그 경계 너머를 동경하기도 한다. 단편 ‘늑대’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을 넘어선 자리에 서 있다. 인간의 탐욕과 문명은 자연의 순수성을 훼손하지 못한 채 파괴와 죽음을 부른다. 의외의 결말이 신선하기보다는 의도된 소설의 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남방식물’과 ‘코리언 쏠저’는 몽골로 이식된 한국인의 삶을 보여준다. 토착민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디든 마찬가지다. 그것이 뿌리 뽑힌 삶이든 잠시 머물기 위한 임시 방편이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몽골에서 잘 자라는 고구마처럼, 시적 감수성을 되찾기 위해서 머물렀지만 결국 코리안 쏠저가 되어야 하는 상황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삶은 때때로 불가해한 질문들을 던진다. 예기지 않은 상황과 부딪치고 원하지 않는 길로 접어들고…….

  ‘중국산 폭죽’은 몽골의 아이들을 통해 사회주의적 삶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이념과 정치체제의 비판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몽골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로 읽었다. 뉴스나 외신을 통해 접하는 낯선 소식이 아니라 우리들의 과거와 겹쳐지는 장면들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탈북자들의 상황이 몽골 아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막다른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포기한다. 기본적 삶의 조건을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이 한반도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조차 어렵다.

  모두 열편의 단편 중 여섯 편이 몽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일곱 편이 ‘지금-여기’를 넘어선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삼고 있다. 경계를 넘는 일은 불안과 공포일 수도 있고 희망과 설렘일 수도 있다. 작가가 무대로 삼은 몽골은 대자연을 무대로 과거의 영광과 상처가 남아있지만 근대적 삶의 조건들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불안한 모습으로 흔들린다. 우리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반추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누구 내 구도 못 봤소?’는 작가의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다. 가장 토착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인공을 통해 그와 그 주변 사람들이 쏟아내는 구수한 사투리의 향연은 우리말을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를 감탄하게 한다.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는 기억 저편의 과거를 보여준다. 시대극을 보여주듯 저자의 유년 시절 한 토막을 구경하는 듯하고 에피소드를 통해 당대 현실을 기막히게 재현하는 듯하다. ‘이미테이션’을 통해 뿌리깊은 사회적 편견과 삶의 조건을 점검하기도 하는 작가의 관심은 한 곳에 모아지지 않는다.

  이 소설집은 한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한 시대를, 한 세대를 아우르는 것도 아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 현실을 적확하게 그려내며 삶의 조건을 확인하고 현재의 상황을 점검한다. 소설이 무엇인지, 소설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는 듯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낯선 곳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초월적 공간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읽어 볼만한 소설이다.


09051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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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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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삶이 역사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인류의 삶이 대나무의 마디처럼 굳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삶이 현대사라고 생각한다. 먼 훗날 나도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니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도 물론 중요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들을 사회적 현상이라고 하며 그것들은 고스란히 미래의 결과가 된다. 기록된 역사는 평가를 받을 것이고 다음 세대의 현실로 이어진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지금 벌어지는 일에 대한 원인을 밝히는 일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모든 일의 결과는 아니지만 나비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다. 씨줄과 날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결과를 분석하는 일도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대안도 달라진다. 역사는 그래서 중요하다. 다양한 관점과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에 의해 서술된다. 지금도 그렇다. 현실 정치권력은 집권당과 선출된 대통령에 의해 좌우된다. 대의 민주주의는 간접 민주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선출된 민의도 어차피 사람에 의해 움직여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사는 투표에 의해 정확하게 실현되는 것일까? 누구에 의해 권력을 움켜진 사람들이 승리자인가? 그 승리자들은 패배자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

  선거와 투표에 의해 승자와 패자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국민으로 나눠진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국민의 손에 의해 선출된 권력은 국민의 눈치를 보고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 행위를 해야 한다. 전자민주주의 시대에는 선거와 투표 방법도 달라져야한다. 간접민주제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지금까지 시행하던 선거와 투표 방법을 바꿔 즉각적으로 민의가 정치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저비용으로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포퓰리즘과 의식 없는 대중들, 선전선동 등 예상되는 문제가 적지 않지만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다함께 고민하고 실현 가능한 대안들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홍구의 역사 인식과 태도는 명확하다. 일관성과 다양성은 서로 모순되는 성향이다. 따라서 일관성을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나는 한홍구가 가진 일관된 역사인식 태도와 방법에 대체로 동의한다. <대한민국史> 등 그의 저작과 인터뷰를 통해 접한 역사학자 한홍구의 관점은 진보적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논의를 모아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근현대사의 결절점을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해법이다. 과거 청산 문제를 비롯하여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과 통찰은 그 대안을 모색하는 토대가 된다.

  특히 뉴라이트라는 단체에서 근대사를 왜곡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호도하는 문제는 우리의 삶의 근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다.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 새는 안정감 있게 하늘을 비행한다. 피비린내 나는 좌우 이념대립이 아직도 진행형으로 계속되는 나라에서 생존과 직결된 문제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만 했던 과거는 불행한 현재를 낳았다. 한홍구는 이 문제들에 대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조목조목 그들의 허황된 주장과 왜곡된 안목을 비판한다.

  나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을 즐기고 싶은 국민은 아무도 없다고 믿는다. 역주행의 시대에 마음을 다지면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한홍구의 마음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한홍구의 <특강>은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으로 포문을 연다. 간첩 조작 사건, 언제나 공사중인 토건족의 나라, 민영화 논란, 광우병 괴담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괴담의 사회사, 일본순사에서 백골단 부활에 이르는 경찰 폭력의 역사, 사교육 공화국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을 꼼꼼이 돌아본다.

  하나의 사회적 현상에는 오랜 역사적 기원이 숨어있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에 따라 전체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적 토대를 점검한다. 실증 사례와 역사적 상황들은 현실의 문제들을 조망하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을 지켜보아야만 하는지 의아스럽다. 당연히 누려야 하는 국민들의 헌법적권리들은 권력의 개가 되어 짖고 있는 경찰과 검찰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다. 언론 통제가 시도되고 교육은 불공정한 게임이 지속되고 있다. 가진 자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이 동원되고 있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절정’의 한 구절이다.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진 않다. 다만 움직여 현실을 바꿀 의지와 행동이 부족하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모두의 고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더불어 함께’는 그 다음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촛불을 ‘몸에 밴 민주주의의 역동성’이라고 평가하며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저력과 상식을 믿고 싶다. 한발 더, 조금 더 움직일 수 있다면 변화는 가능하고 우리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의 교훈이며 현실에 대한 냉정한 안목과 비판적 관점이다. 희망은 그곳에서 싹트는 작은 풀꽃이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며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09051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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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의 글쓰기 - 상처 입은 젊은 영혼들과의 대화
김성수 지음 / 글누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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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행위는 영혼의 내밀한 고백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작은 액정 화면 안에 채울 수 있는 80바이트. 그 안에 배려와 사랑, 안타까움과 공감, 분노와 고민을 집어넣는다. 휴대폰이 보편화되면서 문자를 보내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소리없는 대화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소통 행위를 넘어 글을 쓰는 행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편지가 사라지고 이메일이 보편화되었다 하더라도 방법이 바뀌었을 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자신의 감정을 옮기는 행위가 그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글을 쓰며 살아간다.

  물론 글을 쓰는 목적과 방법은 제각각이다. 개인적인 의사소통과 감정 전달의 수단으로서 글쓰기가 있고 업무를 처리하거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사회적인 글쓰기가 있다. 보고서나 논문, 기획서 등 형식이 우선시 되는 글쓰기가 있고 편지나 수필처럼 자유로운 글쓰기가 있다. 또한 사설이나 칼럼 등 주장이나 설득을 담아내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글쓰기가 있고 자신의 감정이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문학적인 글쓰기가 있다. 기준과 목적, 방법에 따라 글의 종류는 다양하게 나누어질 수 있다.

  어떤 글쓰기든 우리는 평생 쓰지 않을 수 없으며 쓰는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인식하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으며 살아갈 뿐이다. 연인에게 전하는 짧은 편지나 애틋한 문자 한통이 어떤 소중한 글보다 감동적일 때가 있고 운명을 뒤바꿀 때가 있다. 지식인의 한 줄의 글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기도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금언이 아직까지 통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글을 쓸 때 어떻게 쓸 것인가. 정답이 제시되지 않는 질문은 답답할 뿐이다. 글쓰기에도 정답이 있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해 다양한 방법과 견해를 제시하지만 그것을 따라하고 배워서 글을 잘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별로 들어본 적이 있다. 꾸준한 훈련과 습작을 통해 향상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과의 대화이며 가장 진솔한 고백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도 없고 설득할 수도 없다. 우리 안에 살고 있는 프랑켄슈타인과의 대화. 그것으로부터 글쓰기는 출발한다.

  김성수의 <프랑켄슈타인의 글쓰기>는 ‘상처입은 젊은 영호들과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대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과정과 경험과 결과들을 담아낸 책이다. 스무살을 갓 넘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대학생들에게 글쓰기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어야 한다. 중, 고등학교에서 아무리 철저하게 입시위주의 교육시스템에 길들여졌다 하더라도 대학에 입학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자신과 세상은 난감하기만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썼다. 1부가 가위손의 글쓰기, 2부가 프랑켄슈타인의 글쓰기다. 1부는 글을 쓰는 가장 기초적인 자세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쓴다는 것이다.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영혼을 담아 글을 써야 하며 읽는 사람을 배려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조차 바뀔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하면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실제 사례와 더불어 소개되어 있다.

  2부에서는 사례 중심의 글들을 보여준다.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글쓰기를 중심으로 자화상을 그려보고 고통을 치유하며 비판적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한가 보여준다. 홍세화의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이란 칼럼을 통해 현재 대학생의 모습과 생각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 대학생들과 소통하고 댓글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공유한다. 글쓰기는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며 연필로 종이에만 글을 쓴다는 통념을 뒤집는다.

  일상적인 행위로서 글쓰기는 생활이며 삶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이제 글쓰기의 대중화는 선언적 의미를 뛰어넘게 된다. 아무도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매일 글을 쓰며 소통하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글의 내용과 질에 있다. 사적인 행위로서 최소한의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글쓰기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글쓰기는 나름의 문법과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나름의 노하우를 담아내고 있지만 일반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나 글쓰기 자체가 특별한 능력과 힘이 있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책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감동적이고 위대한 글쓰기의 첫걸음이라는 가장 보편적 진리를 확인하고 나면 나머지는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문장을 다듬고 내용을 가다듬고 논리적인 흐름을 생각하고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는 것은 쓰면서 익히게 되는 기술적인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만의 견해나 관점을 가지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이 책은 필요 없다. 수많은 글쓰기 책들 중에 하나가 될 것인지, 내게 꼭 필요한 책이 될 것인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책은 모두에게 권할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도 자신과의 대화에 몰두하고 있다. 왜일까?


09051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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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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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리석은 자를 견딜 줄 알라. 똑똑한 자들은 언제나 참을성이 없다. 지식이 많을수록 참을성은 줄기 때문이다. 통찰력이 큰 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제일 우선해야 할 삶의 원칙은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이며 지혜의 절반은 거기에 달려 있다. - P. 246

  책을 읽다가 바로 전에 읽었던 책을 만나는 일은 우연일 뿐이지만 즐겁다. 그라시안의 <지혜론>을 읽은 후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다가 인용된 그라시안의 말에 또다시 눈길이 오래 머문다. 결국 어떤 책을 통해서든 우리는 삶의 지혜를 간구한다. 약삭빠르게 이익을 얻기 위해서나 높은 지위를 탐해서가 아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하루하루 일상 생활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적인 충만감이 있어야 한다. 만족스런 삶은 스스로에게 충실하며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이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이 생활이어야 한다.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도 않지만 모두가 얻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돈이나 명예, 권력과 지위를 탐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즐기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얻어진다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전체의 행복과 삶의 질서가 아닐까 싶다.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회에서 모든 것에 평등을 우선적 가치로 내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져야 하고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건전한 상식이 통용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과연 좌파적 상상력인가?

  헌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삶의 양식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제국주의를 주장하거나 공산주의를 대한민국의 체재로 바꾸자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나처럼 뉴스를 끊기도 하며 철저히 현실을 외면하기도 하고 취미생활에 몰두하며 정치혐오증을 키우기도 하며 적극적인 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온 논객 유시민은 책을 써서 그 분노의 발톱을 드러낸다. 사람의 관점은 다양하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제각각이다. 유시민의 눈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태도로 감정을 앞세우거나 힘과 권력을 들이밀지는 않는다. 유시민의 힘은 거기에서 나온다. 이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권력의 그림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의 발언에 다시 귀 기울일 수 있다. 스스로 이념 성향을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선언했지만 그가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통해 보여준 모습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정치인 유시민이 선택할 문제일 뿐이다. 그의 과거 이력과 정치적 성향이 모두 삭제될 수는 없지만 그의 말과 논리는 여전히 흡인력을 발휘한다.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똘레랑스의 정신에 입각하여 객관적인 상황과 논리적인 접근법으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할 현실 인식의 태도이다. 모두 옳거나 모두 틀린 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가정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열린 마음이라면 일단 대화가 가능하다. 그것조차 안 되는 사람은 이념적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삶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유시민은 냉정하고 차가운 머리를 가졌으며 타인을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펜을 가졌다. 현실 정치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던 것은 한국적 풍토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날선 논리와 비판 정신 때문이다.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는 칼날이 자신을 향해 돌아 올 수도 있는 법이다.

  참여정부의 도덕성마저 무너져 내린 다음에야 유시민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은 할 말을 잊게 한다. 권력의 역주행을 견뎌내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금 새겨 보아야 할 일이다. 과연 앞으로 4년만 견디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가 또다시 들어설 것이며 그에 걸맞는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지배할 것이다. 아직도 절대 권력의 공고한 위치에서 왕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통령에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며칠 전에도 이명박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는 누가 죽였으며 어떻게 살릴 것인가? 이명박이 경제를 살릴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경제가 아니라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명박이라고 믿었던 순진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많았던 것일까? 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에 치를 떨며 이명박을 찍었을까? 과거 회상을 통한 보상심리를 얻자는 게 아니다.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자. 촛불을 들면 잡아간다. 시위는 하지마라. 법치주의 기본 개념도 모르고 법치주의를 외치는 정부는 국민을 협박하고 검열하며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감시와 처벌을 통해 개처럼 길들인다. 모든 국민들을. 지금도 헌법은 유효한가?

  한번도 댓가를 치르지 않고 민주공화국을 공짜로 얻은 대한민국의 업보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한홍구의 지적대로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근대를 맞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기형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성장한 경제만큼 우리의 정치도 권력도 민주적 토양과 기반이 허약하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인의 문제가 아니다. 생활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자세와 태도에 기인한다. <입시전쟁 잔혹사>에서 강준만이 간파했듯이 생존 경쟁에 내몰렸던 질곡의 세월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핑계거리는 많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가장 기초 질서인 ‘헌법’조차 무시되는 세상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유시민의 이 책은 헌법의 당위와 권력의 실재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는 행복, 자유, 주권 등 헌법의 개념과 가치를 실제 생활과 연결지어 상식선에서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이 개념들이 이명박 정부 혹은 최근의 상황과 맞물려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밝히고 있다. 앞서 밝힌대로 설득력 있고 타당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문제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며 원인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게 한다. 유시민의 글이 가진 최대 장점은 바로 이것이다. 속 시원하게 공감하며 터놓고 대화를 나눈 느낌이 아니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두 눈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며 토악질을 하고 싶었다. 에필로그에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차용한 ‘악의 평범성’을 현실에 대입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090507-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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