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1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범 옮김 / 책세상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살다보면 가끔씩 무모한 도전을 할 때가 있다. 뻔히 질 줄 아는 게임을 하기도 한다. 무모한 도전이지만 신념과 가치 때문에 개인적 이익과 안전을 포기할 때도 있다. 인간적인 갈등이야 없을 수 없지만 부끄럽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가끔 무리수를 둘 때가 있다. 주로 철학책이 그러하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이 그랬고, 비트겐슈타인의 <청갈색 책>이 그랬다. 하지만 끓어 넘치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다. 번번히 보기좋게 나가떨어져도 포기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래도 좀 나았는데, <형이상학>은 얼마나 이해하고 그 핵심을 만져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책에 대한 평가는 어불성설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직접 만난다는 설렘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완역판이 아니라 발췌본을 먼저 대할 생각으로 가벼운 분량의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시리즈를 선택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배우고 익히고 싶다는 생각은 현실을 핑계로 훗날로 미루고만 있다. 함께 생각하고 앎을 나누는 공동체는 현실에 있음에도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탓이리라.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있음으로 시작된다. 나와 대상이 있다면 있음은 본질과 형상으로 구분된다. 보여지는 것의 실체와 운동 개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설명한다. 내 존재의 근원과 삶의 가치를 성찰하기 위해 가장 밑바탕이 되는 사유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고 그 생각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책이 <형이상학>이다.

  사물의 실체는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며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유를 통해서만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스승의 한계를 뛰어넘으로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자 하지만 내게는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모호하고 아득한 개념들의 유희들로 비춰진다. 철학을 한다는 것이 개념을 밝히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인데 추상적 사고를 위한 사고 훈련이 턱없이 부족한 탓일 게다.

  겸손한 마음으로 보다 잘 소화된 2차 저작들을 먼저 섭렵하고 다시 도전해 볼 일이다. 책을 통해 얼마나 지적 훈련과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을지 알수 없으나 스스로 노력하는 만큼의 성과는 분명히 얻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가끔씩 삶의 목적이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은 미래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맥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존재의 근원’에 대해 성찰하고 싶은 욕망이 넘칠 때 또다시 도전하게 될지도 모를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뒤로 미룬다.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을 옮긴 김재범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아 중간에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 책을 내놓은 저자의 노력과 학문적 열정 그리고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가 나를 이끌었다. 짧지만 진정성이 묻어나는 모든 저자와 번역자의 수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 만물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호기심 내 존재에 대한 질문들은 곧 우리들 삶에 대한 질문이다.

  ‘A. 원리와 원인에 관한 앞 철학자들의 이론’이라는 첫 장은 최초의 철학사라고 불린다. 제 1 장 앎에 관한 탐구 첫 문장은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감각적인 앎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함이 이것을 입증한다’는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출발점이다. 서로 생각이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은 눈에 보이는 형상과 그것의 재료 사이의 관계와 운동 사이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진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적 삶의 태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것은 철학적 사유나 언어 이전의 문제일질도 모른다.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겠으나 밤하늘에 떠 있는 희뿌윰한 달빛처럼 모호할 뿐이다. 내가 사는 이유와 방법이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 앞에 우리는 번번이 절망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도 깨우치지 못한 삶의 진리 혹은 존재의 근원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인 것을.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자세만큼은 유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이라고 자각해야 할 것이다.


090630-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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