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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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아니 자주 나는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의문을 가져왔다. 물론 그것에 대한 답이 될만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원스런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를테면 사회경제적 지위로 볼 때 당연히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띠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조선일보를 보면서 기사의 방향과 논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착각하는 비합리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오래된 숙제처럼 대중들의 비합리적 정치 성향과 사회경제적 지위의 모순은 풀리지 않았다.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그 의문부호에 확신에 찬 답변을 던져준다. 1933년에 출판된 이 책이 많은 부분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라이히 사상의 정수를 선보인 것은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만하다. 단순하게 사회와 정치를 보는 거시적 안목에 대한 탁월함이나 뛰어난 통찰력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을 통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의 기원을 분석해내는 방법과 논리는 명쾌하다. 프로이트와 동시대 인물로 정신분석학 연구소에 일했을 만큼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한계를 느끼고 독특한 자신의 이론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라이히는 인간정신의 심리구조를 미시적으로 파악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향을 극복하고 거시적 관점인 역사적, 사회적 인식의 틀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맑스다. 맑스의 노동과 사회학적 관점이 라이히 사상의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라이히는 ‘성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 이 이론의 정수가 바로 <파시즘의 대중심리>라고 볼 수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극에 달한 시점에서 쓰여진 이 책은 이후 3차례의 개정 증보판을 내게 된다. 그린비에서 이번에 번역된 책은 1942 8월에 쓴 라이히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붙어 있다. 라이히는 이후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며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소를 세워 연구활동을 하던 중 미국 정부에 의해 연구 성과가 파괴되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60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옥사한다.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 후 출판된 이 책은 그의 이론의 독특성과 정치적 성향 때문에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차피 정치는 개인의 성향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당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시대를 반영한다. 파시즘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혔던 라이히가 대중심리의 비합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프로이트와의 인연으로 인간의 정신분석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으며 정치적으로 공산당원이었던 그의 입장에서 대중들의 모순된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대중심리를 이용하고 억압하며 그것을 숨기지 않은 채 당당히 현실 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라이히의 고민에 공감이 간다. 이런 대중들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를 자연스러운 성의 신비적 왜곡과 억압된 오르가즘에 대한 열망 그리고 가부장적으로 구조화된 사회경제적인 억압에서 찾고 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라이히는 노동자들을 계층별로 세분화하고 그들의 정치 성향을 비교함으로써 그 원인을 찾아 나선다. 개인의 성적 억압과 가족내에서 구조화된 가부장적 억압구조는 이러한 대중심리를 지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 라이히가 생존했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구조를 지닌 현대 사회는 그 특징을 쉽게 규정하기조차 힘들다. 인류는 이미 정보 사회로 접어들었드며 인터넷의 발달과 자유로운 공간의 이동에 따라 삶의 형태와 의식 구조가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 대중들의 정치적 성향과 변화 주기도 예측하기 어렵다. 대중들의 심리를 일방적으로 통제하거나 묶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 원인을 몇 가지로 분류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변하지 않는 대중들의 심리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더불어 성적 억압구조나 가족 지상주의, 언론과 정보 사회의 극단적 포퓰리즘 등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회경제적 계급구조는 더욱 모호해져가고 있다. 아니 모호해져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스스로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라이히의 지적대로 물질적 상황과 이데올로기 성향 사이의 균열의 원인이 항상 소시민들이 위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당연한 논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현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인류 사회의 구조와 경제적 토대가 어떤 형태로 변화될 지 알 수 없으나 라이히의 주장은 상당부분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한 부분이 많다. 전공자가 아니라서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관점과 이론적 토대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이 생긴다.


  ‘소시민계층의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원인을, 혹은 그 연결고리를 ‘가족’으로 보았던 라이히의 견해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상황이 변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면 그 다양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의 몫이겠지만 현실 정치에 나타나는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정치 협잡꾼이 아니라 소시민계층이 뼈를 깎는 고통과 반성을 통해 바로 잡아야할 문제다. 이 책의 의미를 나는 여기에서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히의 말 한마디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인간 존재의 원천이다. 또한 이것들이 인간 존재를 지배해야 한다!" - P. 496

 

 

06040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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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시선 258
이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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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와 시의 상관성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았다면, 등단 시기와 첫 시집의 의미를 고민해 보았다면 우리는 시집을 읽어 나가면서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고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시인들과 시들과 비교하면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지 시에 대한 일종의 편견인지 모른다. 다만 새롭고 신선한, 혹은 낯설고 독특한 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시집을 펴낼 수 시인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한 권의 시집을 대할 때 절대적인 기준과 눈높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희의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는 시집은 첫 시집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완숙하고 노련하며 안전하다. 97년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99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65년생 시인의 첫 시집으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인다. 시를 대하는 태도나 언어의 사용에 대해서 신인으로 볼 수 없고 나이와 연륜에서 묻어나는 사물에 대한 시선과 깊이가 다작과는 거리가 먼 시인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잔잔하게 응시하는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가 마음에 닿는다. 기약할 수 없는 두 번째 시집도 읽어보고 싶다.

돌멩이를 쥐고

  둥근 돌이 싫습니다. 그 둥글다는 게, 그 순딩이 같은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싫었습니다. 깨트려버리고서야 알았습니다. 둥근 돌 속에 감추어진 그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던 것을, 무덤 같기만 하던 그 속에 정말로 살아 있던 것은 시뻘건 불을 피워 올리고도 남을 분노라는 것을.
  둥근 것들은 다 그렇게 제 속으로만 날카로운 각을 세우나봅니다.


  이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1부에서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혹은 삶의 지난했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난과 유년 시절의 결핍이 주축을 이룬다. 누님을 기억하는 시편들에 나타난 그의 삶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쓸쓸하고 외로웠을 화자의 모습은 자연의 대상을 통해 투영된다. 그것은 성장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시집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인은 그 외로움 안에서 혼자 놀았고, 그것이 쓸쓸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오랜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멩이 연작들은 가슴 속에 아프게 닿는다. 둥근 돌 속에 내재한 ‘날카로운 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배고픈지 볼이 옴폭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밤새 달그락 달그락거대는 달

  밥 먹듯이 이력서를 쓰는 시절에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시인의 문제는 실존적이다. 저녁을 굶은 화자의 이력서는 달에게 보내는 연서와는 무관하게 냉혹한 현실과 과거의 한 때를 떠올리는 변하지 않는 증거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결핍과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과 삶’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승희가 생각하는 사랑은,

사랑은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사랑은 무엇이다. 무엇이다에 해당하는 서술어는 각자 채울 일이다. 시인의 말보다 앞서 가지 않았다면 찬찬히 읽어보면 된다. 동의할 수 있다면, 공감할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면 그뿐이다. 개인적 경험에서 촉발된 언어의 생동감은 쉽게 내면화되지 못한다. 사람과 생에 대해 존재론적 결핍과 열정의 부재에 대해 허무한 시선을 던지는 시인은 이제 어떤 시를 쓰게 될 것인지. 세상에 대한, 혹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뚜렷한 성찰도 끝나지 않은 듯한 시인의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내가 바라보는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세상을 끌어가는 힘이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라고 동의할 수 없지만 모든 감정과 과정에 논리와 이성이 개입하거나 인과법칙에 따라 변해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어쩌면 ‘그냥’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모든 순간에 ‘그냥!’이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의 절규가 내 것일 수도 있다. 답답하고 불가해한 현실을 견뎌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냥 살아 보는 것이다. 삶에 이유를 달지 말라. 그냥 살아 보자.


그냥

  그냥
  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 그냥이 산다. 아니면 그냥이라는 말로 덮어두고픈 온갖 이유들이 한순간 잠들어 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잠을 털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 잠 속에서 생을 마쳐갈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냥 속에는 그냥이 산다는 말은 맞다. 그냥의 집은 참 쓸쓸하겠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처럼 그렇게.
  그냥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깊은 산그림자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어둔 강물 혹은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나뭇잎사귀 같은 것들이 다 그냥이다. 그래서 난 그냥이 좋다. 그냥 그것들이 좋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들의 물살이 가슴에 닿는 느낌이 좋다. 그냥 속에 살아가는 당신을 만나는 일처럼.



06040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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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는 논리 문지푸른책 밝은눈 10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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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 나눈다면 이 책은 필요없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책들이 그렇겠지만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 이기적이고 냉소적이고 개인적인 관점 - 불필요한 책이다. 사회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경쟁적, 자본주의적 질서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해가 되는 책이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 겪을 수 있는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은 공부에 방해가 되거나 사회적 욕망을 달성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가 반가워하겠는가. 공부에 방해가 되는 어떤 활동도 꺼려하는 것이 현실이다. 학생회 활동, 심지어 반장, 부반장 경력이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상당수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꺼릴 것이다. 게다가 학교내 동아리 활동이나 사회 봉사활동, 사회 참여 활동 등은 대학 진학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김찬호의 <사회를 보는 논리>를 읽으라고 권한다면, 논술에 도움이 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대단히 도움이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책의 효용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슬프다. 특히 실용적 목적의 책읽기는 책이 수단과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책이 신성시되어야 한다거나 높은 교양과 학문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같은 책을 통해서도 목적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는 혼란스런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내 삶의 방향이나 목적을 수정하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얻고,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생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인식의 힘을 길러 나가는 도구로서 책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유 방식을 색다르게, 참신하고 창의력 있는 관점을 가져야겠다는 목적으로 책을 읽는 논술용 교재로 인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2001년에 출판된 이 책은 저자의 말대로 내용보다 문체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체 4부의 구성으로 인식 모델의 성찰, 공생과 교류의 관계, 21세기의 사회 구상, 대안적 생활양식의 모색으로 되어 있다. 사회 전반에 관한 폭넓은 관심과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는 의도가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전문 용어나 어렵고 딱딱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서가 아니기 때문에 같이 공감하고 생각해 볼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 문체가 가볍거나 얄팍한 내용으로 사회적 관심사를 나열하는 책은 아니다. 깊이 있는 주제와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책을 읽어나가면서 더욱 절감한다. 김찬호는 이 부분에서 일정부분 성과를 거뒀고 성공한 듯 보인다. 다만 제한된 분량과 시리즈의 기획의도라는 출판사의 요구에 맞물려 적당한 분량으로 지나치게 다이어트 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조금 더 자세하게 깊이있게 다루었다면 더 좋은 책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 사이에서 소통되는 언어의 문제, 문화의 문제,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 모델을 성찰하는 일은 나이와 시기에 상관없이 일생을 두고 고민해야 할 문제다. 직업이나 삶의 틀이 형성되기 전인 청소년 시기에는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해낼 수 없다는 견해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안적인 삶의 모델들도 살펴보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고민과 반성, 자기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더 절실하게 필요해지고 있다. 청소년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먼저 작은 관심과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안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듯이 옳다고 해서 모두 그것을 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논리를 뛰어 넘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21세기의 인물로 선정될 것이다. 그 대안이 사회체제이든 국가 형태이든 급격한 변화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하게 세계화나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허우적댈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여행을 즐기는 세대들을 위해 작은 나침반과 지침서, 그리고 이 배가 어떤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안내는 늘 필요하다. 이 책 한권으로 이 많은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 다만 학문적 영역과 울타리 안에서 논의되는 아카데미즘의 견고함과 논술처럼 시류에 편승한 상업적 저널리즘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참된 지식인의 역할이다. 그것들을 선별하고 읽혀야 하는 것 또한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반듯한 사각형 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들, 돈이 행복을 보장해 줄 거라 굳게 믿는 스무 살 언저리의 젊은 사들의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혀 주는 역할 할 수 있는 책이다. 꾸준히 팔릴 때는 이유가 있다.


06040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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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힘
빌리 파시니 지음, 이옥주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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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모든 행동의 바탕에는 욕망이 존재한다. 이 욕망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의 고유 영역이 아니라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분야,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 전 영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전히 유효한 인간의 욕망은 흥미로운 대상임에 틀림없다. 욕망의 영역을 인간의 심리 중에서 특정 부분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있다. 그것이 생물학적 접근이든 심리학적 접근이든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헤맬 필요가 없듯이 욕망을 일으키는 감각 기관에 대한 관심과 유독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욕망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병행되어 마땅하기 때문이다.

  빌리 파시니의 <욕망의 힘>은 우리 시대의 욕망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특히 육체적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는 것은 이 책에서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다. 육체적 욕구 때문에 일어나는 성적 흥분 상태와 욕망의 차이점을 저자는 “육체적 욕구와 달리 욕망은 어떤 대상에 경도되어 거기에 집중하는 현상이다. 이는 감정적 긴장이 축적되면서 나타나는 성적 흥분의 선행 조건으로서 일반적으로 기분 좋은 상태에서 경험하게 된다.(본문 83쪽)”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차이를 개념화하거나 구분 짓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주로 인간만이 지닌 성적 욕망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주로 다루고 있다.

  우리 시대의 욕망은 분명 이전 시대와 다르다. 이전 시대라는 구분은 근대의 개념과 닿아있다. 욕망 자체를 드러내거나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종교의 억압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적 욕망의 억압과 사회,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파시니는 거시적 담론으로서 욕망의 다양성에 대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미시적 대상으로서 특히 ‘성적 욕망’에 대한 사례 분석이 주된 관심사이다. 이러한 시도와 분석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프로이트에게 인류가 빚진 부분은 무의식의 영역에 관한 관심이다. 라시니도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성적 욕망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욕망의 화학작용부터 욕망의 주변 여건들을 조망하는 데 1차적인 관심을 둔다. 물론 이러한 욕망에게도 적이 있다. 외부요인과 내면의 심리적 요인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통해 그것들을 치유하는 실제 과정들을 보여준다. 모든 사례가 일반화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학술적인 관심이나 대중적인 관심의 접점에 서 있는 유형의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하나의 개념이나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양하다. 자신의 직업이나 연구 업적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책을 내는 것은 일반화 되어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아주 오랜 시간을 유교의 전통적 관념과 성에 대한 금기는 지금도 일정 부분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혹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합리와 이성으로 처리되지 못한다. 기존의 선입견과 암묵적 억압의 형태로 혹은 일시적인 사태 해결이나 호기심 차원에서 접근하기 쉽다. 본격적으로 성적 욕망에 대해 관심과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시대와 성향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적 욕망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신조차 한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말은 욕망의 크기와 넓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그 욕망의 대상과 목적이 어디에 있든 그것은 인생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 아니, 잠을 자면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욕망의 노예인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해법과 대안이 있을 수 없다. 정답은 각자가 가지고 있다는 회피적 대답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욕망이라는 인간 내면의 가장 핵심적 대상에 대해 할 말이 생긴다. 똑바로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할 일이다. 나의 욕망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욕망을 아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욕망의 크기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욕망의 힘’이 지닌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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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동엽
김응교 지음, 인병선 유물 보존.공개.고증 / 현암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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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가 신동엽이 세상을 떠난 지 37년 되는 날이었다. 신동엽의 살아 있다면 일흔 여섯이다. 바보같은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구상이나 고은처럼 노년을 맞이했을 동시대 인물이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구상처럼 질곡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내기에는 버거웠을까? 1930년에 태어나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신동엽의 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신동엽이 죽기 바로 전인 1968년에 김수영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간암 판정을 받은 신동엽은 자신의 죽음도 예감하고 있을 것이다.

  시인의 죽음은 영원한 미완성의 시로 남는다. 생전에 그가 남긴 시는 아직도 살아 있다.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종로 5가’, ‘산에 언덕에’ 같은 명편들과 서사시 ‘금강’으로 기억되는 시인 신동엽의 육필 원고를 책을 통해 만났다. 그의 생애를 통해 시를 들여다보는 일은 시 자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작가론의 의미를 넘는다. 당연하게도 그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죽음이 신화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 남긴 글과 생각들이 시대를 담아내는 정제된 언어라면 단순한 삶을 넘어선다. 먼저 인물의 전형성이다. 사법서사(현 법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 식민지를 경험했고 문인으로서 평범한 길을 걸었던 신동엽의 직업은 국어교사였다. 전주사범을 거쳐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신동엽의 삶은 어렵고 가난했던 현대사의 격변기를 조용히 대변한다.

  동숭동에 가면 짚풀사 박물관이 있다. 같은 건물에 전국국어교사모임 사무실이 세들어 있어 우연한 기회에 인병선 여사를 만나 뵙고 신동엽에 관한 이야기와 짚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스물 네 살 청년 신동엽이 이화여고 3학년이었던 인병선을 만난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인병선은 3학년 때 신동엽과 결혼한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남기고 죽은 남편의 원고 시작 노트들을 고스란히 정리 보관하며 평생 그의 흔적과 그늘 속에서 살아온 인병선의 삶은 어떠했을까. 오히려 신동엽이 행복한 건 아닐까?

  신동엽의 시세계는 완성되지 않은 채 끝나버렸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등단해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학 농민 혁명과 갑오개혁, 4․19 정신을 토대로 민중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던 시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서사시 ‘금강’ 이후 ‘임진강’을 준비하던 중이었던 시인의 나이는 시인으로서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시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시인에 대한 존경을 떠나 현대시의 새로운 흐름이 끊겨버린 느낌이다.
 
  현암사에서 펴낸 <시인 신동엽>은 인병선이 공개한 유물과 고증을 통해 김응교가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는 책을 통해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김응교의 글은 신동엽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면서도 시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 담담하게 독자들을 안내한다. 흥분하거나 안타까운 목소리를 숨기고 그의 유물과 육필 원고들을 사진으로나마 감상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인병선의 꼼꼼한 정리와 보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제 가족의 보존에 기댈 것이 아니라 문학관의 건립이 필요한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시인 신동엽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나 각별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고 소장해야 할 책이다. 전체가 개나리색 표지에 신동엽이란 글씨로 가득 메운 겉장은 그가 떠난 4월을 기억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신동엽 전집을 뒤적이다가 떠나기 1년전인 196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린 ‘그 사람에게’가 눈에 들어온다.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060409-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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