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시선 258
이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나이와 시의 상관성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았다면, 등단 시기와 첫 시집의 의미를 고민해 보았다면 우리는 시집을 읽어 나가면서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고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시인들과 시들과 비교하면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지 시에 대한 일종의 편견인지 모른다. 다만 새롭고 신선한, 혹은 낯설고 독특한 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시집을 펴낼 수 시인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한 권의 시집을 대할 때 절대적인 기준과 눈높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희의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는 시집은 첫 시집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완숙하고 노련하며 안전하다. 97년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99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65년생 시인의 첫 시집으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인다. 시를 대하는 태도나 언어의 사용에 대해서 신인으로 볼 수 없고 나이와 연륜에서 묻어나는 사물에 대한 시선과 깊이가 다작과는 거리가 먼 시인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잔잔하게 응시하는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가 마음에 닿는다. 기약할 수 없는 두 번째 시집도 읽어보고 싶다.

돌멩이를 쥐고

  둥근 돌이 싫습니다. 그 둥글다는 게, 그 순딩이 같은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싫었습니다. 깨트려버리고서야 알았습니다. 둥근 돌 속에 감추어진 그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던 것을, 무덤 같기만 하던 그 속에 정말로 살아 있던 것은 시뻘건 불을 피워 올리고도 남을 분노라는 것을.
  둥근 것들은 다 그렇게 제 속으로만 날카로운 각을 세우나봅니다.


  이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1부에서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혹은 삶의 지난했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난과 유년 시절의 결핍이 주축을 이룬다. 누님을 기억하는 시편들에 나타난 그의 삶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쓸쓸하고 외로웠을 화자의 모습은 자연의 대상을 통해 투영된다. 그것은 성장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시집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인은 그 외로움 안에서 혼자 놀았고, 그것이 쓸쓸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오랜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멩이 연작들은 가슴 속에 아프게 닿는다. 둥근 돌 속에 내재한 ‘날카로운 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배고픈지 볼이 옴폭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밤새 달그락 달그락거대는 달

  밥 먹듯이 이력서를 쓰는 시절에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시인의 문제는 실존적이다. 저녁을 굶은 화자의 이력서는 달에게 보내는 연서와는 무관하게 냉혹한 현실과 과거의 한 때를 떠올리는 변하지 않는 증거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결핍과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과 삶’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승희가 생각하는 사랑은,

사랑은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사랑은 무엇이다. 무엇이다에 해당하는 서술어는 각자 채울 일이다. 시인의 말보다 앞서 가지 않았다면 찬찬히 읽어보면 된다. 동의할 수 있다면, 공감할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면 그뿐이다. 개인적 경험에서 촉발된 언어의 생동감은 쉽게 내면화되지 못한다. 사람과 생에 대해 존재론적 결핍과 열정의 부재에 대해 허무한 시선을 던지는 시인은 이제 어떤 시를 쓰게 될 것인지. 세상에 대한, 혹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뚜렷한 성찰도 끝나지 않은 듯한 시인의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내가 바라보는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세상을 끌어가는 힘이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라고 동의할 수 없지만 모든 감정과 과정에 논리와 이성이 개입하거나 인과법칙에 따라 변해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어쩌면 ‘그냥’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모든 순간에 ‘그냥!’이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의 절규가 내 것일 수도 있다. 답답하고 불가해한 현실을 견뎌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냥 살아 보는 것이다. 삶에 이유를 달지 말라. 그냥 살아 보자.


그냥

  그냥
  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 그냥이 산다. 아니면 그냥이라는 말로 덮어두고픈 온갖 이유들이 한순간 잠들어 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잠을 털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 잠 속에서 생을 마쳐갈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냥 속에는 그냥이 산다는 말은 맞다. 그냥의 집은 참 쓸쓸하겠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처럼 그렇게.
  그냥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깊은 산그림자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어둔 강물 혹은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나뭇잎사귀 같은 것들이 다 그냥이다. 그래서 난 그냥이 좋다. 그냥 그것들이 좋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들의 물살이 가슴에 닿는 느낌이 좋다. 그냥 속에 살아가는 당신을 만나는 일처럼.



06040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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