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아니 자주 나는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의문을 가져왔다. 물론 그것에 대한 답이 될만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원스런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를테면 사회경제적 지위로 볼 때 당연히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띠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조선일보를 보면서 기사의 방향과 논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착각하는 비합리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오래된 숙제처럼 대중들의 비합리적 정치 성향과 사회경제적 지위의 모순은 풀리지 않았다.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그 의문부호에 확신에 찬 답변을 던져준다. 1933년에 출판된 이 책이 많은 부분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라이히 사상의 정수를 선보인 것은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만하다. 단순하게 사회와 정치를 보는 거시적 안목에 대한 탁월함이나 뛰어난 통찰력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을 통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의 기원을 분석해내는 방법과 논리는 명쾌하다. 프로이트와 동시대 인물로 정신분석학 연구소에 일했을 만큼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한계를 느끼고 독특한 자신의 이론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라이히는 인간정신의 심리구조를 미시적으로 파악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향을 극복하고 거시적 관점인 역사적, 사회적 인식의 틀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맑스다. 맑스의 노동과 사회학적 관점이 라이히 사상의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라이히는 ‘성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 이 이론의 정수가 바로 <파시즘의 대중심리>라고 볼 수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극에 달한 시점에서 쓰여진 이 책은 이후 3차례의 개정 증보판을 내게 된다. 그린비에서 이번에 번역된 책은 1942 8월에 쓴 라이히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붙어 있다. 라이히는 이후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며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소를 세워 연구활동을 하던 중 미국 정부에 의해 연구 성과가 파괴되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60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옥사한다.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 후 출판된 이 책은 그의 이론의 독특성과 정치적 성향 때문에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차피 정치는 개인의 성향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당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시대를 반영한다. 파시즘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혔던 라이히가 대중심리의 비합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프로이트와의 인연으로 인간의 정신분석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으며 정치적으로 공산당원이었던 그의 입장에서 대중들의 모순된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대중심리를 이용하고 억압하며 그것을 숨기지 않은 채 당당히 현실 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라이히의 고민에 공감이 간다. 이런 대중들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를 자연스러운 성의 신비적 왜곡과 억압된 오르가즘에 대한 열망 그리고 가부장적으로 구조화된 사회경제적인 억압에서 찾고 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라이히는 노동자들을 계층별로 세분화하고 그들의 정치 성향을 비교함으로써 그 원인을 찾아 나선다. 개인의 성적 억압과 가족내에서 구조화된 가부장적 억압구조는 이러한 대중심리를 지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 라이히가 생존했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구조를 지닌 현대 사회는 그 특징을 쉽게 규정하기조차 힘들다. 인류는 이미 정보 사회로 접어들었드며 인터넷의 발달과 자유로운 공간의 이동에 따라 삶의 형태와 의식 구조가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 대중들의 정치적 성향과 변화 주기도 예측하기 어렵다. 대중들의 심리를 일방적으로 통제하거나 묶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 원인을 몇 가지로 분류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변하지 않는 대중들의 심리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더불어 성적 억압구조나 가족 지상주의, 언론과 정보 사회의 극단적 포퓰리즘 등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회경제적 계급구조는 더욱 모호해져가고 있다. 아니 모호해져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스스로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라이히의 지적대로 물질적 상황과 이데올로기 성향 사이의 균열의 원인이 항상 소시민들이 위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당연한 논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현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인류 사회의 구조와 경제적 토대가 어떤 형태로 변화될 지 알 수 없으나 라이히의 주장은 상당부분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한 부분이 많다. 전공자가 아니라서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관점과 이론적 토대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이 생긴다.


  ‘소시민계층의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원인을, 혹은 그 연결고리를 ‘가족’으로 보았던 라이히의 견해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상황이 변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면 그 다양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의 몫이겠지만 현실 정치에 나타나는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정치 협잡꾼이 아니라 소시민계층이 뼈를 깎는 고통과 반성을 통해 바로 잡아야할 문제다. 이 책의 의미를 나는 여기에서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히의 말 한마디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인간 존재의 원천이다. 또한 이것들이 인간 존재를 지배해야 한다!" - P. 496

 

 

060402-0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