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열쇠 - 문학,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길잡이
김성곤 지음 / 산처럼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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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진부한 물음에 대한 답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그 어려움에 관해서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문학의 성격과 본질은 인간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인간의 삶은 계속되었으며, 문학적 글쓰기도 계속되었다. 문학은 인간이고 삶인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형식과 내용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전시대에 대한 반발과 그 반발에 대한 대안으로 이어진 문예사조는 예술사의 흐름과 더불어 인류의 삶을 들여다보는 만화경과 같다. 그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치열한 생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고민하고 인식하는 모습들이 곧 인류가 걸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산처럼에서 나온 <사유의 열쇠 - 문학>은 박이문의 ‘철학’편에 버금가는 구성과 내용을 담고 있다. 영문학자의 눈으로 평생 문학을 연구한 연륜과 사유의 깊이가 행간에 묻어난다. 문학 용어 사전이 아니기 때문에 문예사조부터 최근의 현대 문학이론 용어까지 포괄하고 있어 문학사를 일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루하고 논쟁적인 역사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6부로 구성된 내용속에 최근의 현대 문학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각각의 개념과 용어에 대한 설명으로 찾아 읽어도 좋을 법한 문학사전이지만 처음부터 전체를 조망하며 읽어나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포스트 시대의 문예사조들과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새롭게 시도된 형태의 다양한 문학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은 한 권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이퍼텍스트에서 테크노 픽션, 크리티 픽션, 그래픽 소설 그리고 판타지 문학에 이르기까지 가장 최근의 등장한 문학 형태에 대한 소개는 정보 차원의 소개로 머무른 것이 아니라 문학이 나아갈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의 역할을 한다. 단순한 이론 설명을 위한 나열이 아니라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내적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피드백 과정을 거치도록 스스로를 독려하면서 읽어나간다면 책이 주는 내용 이상의 즐거움과 색다른 사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살아오면서 문학에 대해 단편적으로 축적된 지식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도 있고, 문학 전공자라면 소홀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아울러 한 번 잘못 기억되거나 오해할 수 있었던 개념들에 대한 간단한 확인과 지식의 점검이 필요하기도 하다. 문학에 대한 이론과 지식, 개념과 용어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은 소설무용론과 같다.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과 삶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문학과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우리 인류의 삶을 돌아보라고 충고하는 듯 하다.

  책의 마지막 6부는 문학과 신화라는 부제를 달고 ‘신화의 현대적 해석’, ‘헤라클레스’, ‘아라비안 나이트’의 짤막한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다. 다른 장르와의 관계와 겹침을 확인하고 중첩되는 용어와 개념들을 이야기하자면 한권으로 너무나 부족하다. 양념처럼 들어간 마지막 장은 사족처럼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소홀하게 다루어야 한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벗어나 있다. 모든 것을 다룰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면 기본에 충실하도록 다른 장르와 분야에 할애하거나 나머지 장들을 충실하게 보완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더불어 한가지 아쉬운 것은 여전히 서구 유럽과 미국 문학 중심의 문예이론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류와 비주류를 함께 언급하고 참고하고 문학작품의 경우 그 예가 될 수 있는 작품들이 다양하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또한 우리 문학에 대한 언급과 관계에 대한 설명이 단 한줄도 없다는 것은 더 큰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작은 책 한 권에 욕심을 낼 수 없지만 문학사전이라는 출판 목적에 충실하도록 좀 더 세심한 배려와 내용 설정에 대한 고민도 병행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지니는 의미와 독특한 구성, 내용의 충실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잡다하고 방대한 이론 설명이나 난해한 개념을 더 어려운 용어로 설명하지 않은 점은 이 책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이다.

  이제, 직접 그 작품들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손도 대보지 못했던, 혹은 아련 기억속에 묻혀 있던 작가와 작품들을 언제든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보는 일은 물론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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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 평등으로 - 인권을 위한 강의
김동춘.한홍구.조효제 엮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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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견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한 사람이 꿈을 꾸면 일장춘몽, 남가일몽, 한단지몽, 호접지몽이 되지만, 모두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내가 꿈꾸는 현실은 타인이 꿈꾸는 현실과 다른 것이 항상 문제가 생기고 충돌이 발생한다. 편견과 선입견이란 이름은 다수에 의한 비중을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해보면 항상 내게 던져 주었던 모든 것들이 편견을 넘어선 곳에서 자리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원론적 문제에 부딪히면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항상 반복되는 순환론의 고리가 연결된다.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다시 돌고 돌아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쉽사리 ‘편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다수에 의한 공동의 선을 추구하자는 민주주의 원칙을 원용한 절대 선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도 궁금해진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합의에 의해 강제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고 현실을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이기적인 삶과 금밖에 서있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가 없어질 수는 없다.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늘 이런보다 실천이, 원론보다 각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사회적인 문제에 관한한 풍찬노숙을 견뎌내며 흰수염을 휘날리는 문정현신부님같은 분의 행동은 그 어떤 웅변보다 많은 말들을 사람들에게 전한다고 믿는다.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라는 책은 참 난감한 책이다. 김동춘, 한홍구, 조효제가 엮은 책이라면 안읽어도 뻔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 뻔하다. 그 뻔한 사실들을 우리는 왜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나? 너무 뻔해서일까? 몰라서일까? 귀찮아서?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서? 내게 불이익이 돌아오니까? 내게 이익으로 돌아올만 게 없어서?

  평등은 또 하나의 편견이다. 평등을 바라보는 관점과 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여기에 늘어놓는 것도 의미 없지만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하다.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에 따라 많은 말들이 오간다. 단순하게 정리해보자.

  인간이 가져야하는, 가질 수 있는 권리와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순간들을 굳이 외면하면서 살아온걸까? 내가 그 인권이 뭔지 모르고 살아온걸까? 그 인권을 빼앗기며 살아온걸까? 참으로 감상적이고 주관적 태도에 빠지기 쉬운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대학 신입생들에게 기초교양으로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집필의도와 목적이 분명하고 오래동안 인권운동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필진들에 의해 쓰여진 책은 분명 실천적인 냄새가 강하다. 무모하거나 이론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다. 현재 우리 상황에서 논할 수 있는 인권에 대한 정의가 우선 분명하다. 시민사회와 인권의 문제를 동양문화권에서 살펴보고 서양과 다른 현실상황을 짚어보고 소수자와 장애인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논의의 초점을 다양화하면서도 하나로 모아내고 있다.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순간에 나를 바꾸지 않으면 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모든 갈등과 선택의 순간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냉정하다. 그리고 말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일은 더욱 어렵고 힘들다. 편견과 평등은 중지를 모을 일이지만 개인의 의식과 사회 ․ 문화적 토대가 쉽게 바뀌지 않는 어려움속에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한 걸음씩 내딛어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을 떠오르는대로 쏟아내는 것도 지나고 나면 나를 돌아보는 한 순간이 될 것이다. 시작해보자. 여기, 지금부터 시작이다. 항상, 나를 인정하듯이 너를 인정하고 이론적 논의와 정책적, 사회적 관심과 제도적 보완에 앞서 의식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또 반복할 필요는 없다. 억압과 문화를 앞세워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지구 곳곳의 현실보다 먼저 내 주변을 돌아본다. 실천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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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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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향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애와 같다. 타향이 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가 다 타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 P. 148

  마술이나 환상을 믿고 싶은 사람들은 현실을 향한 욕망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든, 욕망이라 부르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가능성과 개연성을 뒤로한 채 꿈을 꾸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그 욕망의 공통성이다. 외면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 욕망을 넘어 생에 대한 열정이 되고 시간의 흐름을 더불어 한 개인의 속성이 된다. 현실에 대한 다양한 인식 방법과 욕망의 표출 방법은 감춤과 숨김으로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감춤과 드러냄의 누빔점에 소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버린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의 누런 표지를 가끔 물끄러미 바라본다. ‘책읽기’는 과연 행복한가. ‘소설은 왜 읽는가’라는 글에서 김현은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이 대립하는 접점에 위치한 호기심의 자리에 놓인 소설은 여전히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형태의 관음증을 제공한다. 살아보지 않은 생에 대한 열망과 내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절망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즐기기도 하고 안도하며 현실속의 나와 끝임없이 차별화하거나 동일시한다. 감정이입은 시에 사용되는 표현기교이기도 하지만 문학을 ‘하는’행위의 기본적 속성이기도 하다.

  <마이너리그>이후 오랜만에 접하는 은희경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스토리보다 서사구조가, 문체나 구성보다 짤막한 단상과 생에 대한 잠언적 경구가 돋보인다. 독자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인생을 통달한듯한 격언을 던져넣는 방식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문장 속에 어색하지 않게 툭툭 던져지는 말들이 예민한 감수성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단아함을 넘어 투명한 레이스로 장식한 화려함을 소설들에서 찾을 수 없는 단면을 보여준다. 제 색깔을 드러내는 과정인 작가의 목소리는 강경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다만 흡인력과 탄탄함이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진다. 소설 속 영화 제목으로 사용된 <비밀과 거짓말>은 치정극도 아니고 멜러물도 아니다. 영준과 영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확인하는 생의 비루함이다. 그것을 뭐라 표현하든 ‘생’은 빛나지도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추하거나 더럽지도 않다. 그게 그저 사람의 생일 뿐이다.

그 애가 감추려는 데 진실이 있어요. 때로는 거짓말이 사실보다 더욱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구요. 거기 붙여놓은 비밀이라는 봉인을 떼지 마세요. - P. 162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질 때가 있다. 일말의 의심도 의혹도 없이 모든 사람이 믿어버리는 그 혹은 그녀의 말은 진실인가. 봉인을 떼지 말라는 소설 속 전언은 현실에 적용될 때 더더욱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미칠 것 같은 일에 분노하지 말라.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 거짓이 사실보다 더욱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사람들이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오래 음미하는 대신 밑줄을 그어보고 머리와 가슴을 지나 손끝에서 처리되는 감정이 되어 버렸다.

  죽음이 모든 진실을 밝혀주지도 묻어주지도 않는다. 생이 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스런 많은 사람들과 말과 글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는 소설보다 아름다운, 혹은 소설보다 강렬한 비밀과 거짓말이 숨어 있다. 퍼즐처럼 조각난 생의 비밀들 속에서 아직도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영준과 영우의 아버지 정욱에 대한 사실들은 이 소설이 전하는 진실과는 한참 먼 거리에 있다. 소설 속의 영화로 제작되는 ‘비밀과 거짓말’이 전하는 진실은 숨은 그림처럼 모두의 가슴속에 숨어 있다. 주변을 돌아보라. 그리고 거울을 보라.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과연 모두가 진실일까. 어쩌면 객관적 진실보다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 진실이 더 진실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면 그럴 만한 필요가 있는 것이다. - P. 283


06031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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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거미의 사랑 창비시선 259
강은교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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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셋이

빗방울 셋이 만나더니,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 덩이들을 생각하며 분개하더니,
분개하던 빗방울 셋 서로 몸에 힘을 주더니, 스르르 깨지더니,

참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 하나가 되었다.

  오랜만에 나온 강은교의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의 서시다. 하나되는 사랑, 분개하던 나와 네가 만나 하나되는 아름다움이 이 시집의 전하는 메시지다.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정답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각자 주장하는, 혹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의 순간순간 느껴지던 그 아름다움은 나의 존재 방식이기 이전에 타인과의 관계맺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다.

  <허무집>과 <풀잎>, <빈자일기>로 이어지는 강은교의 시의 절정은 더 이상 예민한 촉수와 감각적이고 치열한 정신을 동반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느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혼란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했던 강은교의 시도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까. 시인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언어에 대한 참신한 감각과 전통에 대한 관심은 편안하지만 즐겁지 않다. 특히, 3, 4부로 모아놓은 가야 소리집과 행사시들은 깊이있는 울림보다 전통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어울림 정도로 그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지는 않는다. 풀잎에서 보여주던 명징한 언어도 깊은 성찰도 희미해져 간다는 것은 독자의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희미해져가는 빈 자리를 채워가는 다른 방식이다.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는 물론 시인의 몫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어떤 변화인가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를 확인하고 관찰하는 것은 독자의 즐거움이다. 그 변화와 태도가 긍정인가 부정인가는 시인이 선택할 몫이고 독자가 평가할 몫이다. 다른 시인 일반에 적용되는 문제가 강은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은 ‘소리’이다. 귀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소음이다. 고요 속에 빛나지 못하는 침묵은 또 다른 소음이다. 시인은 ‘소음’과 ‘침묵’ 사이에 서성거린다. 귓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은 특정한 소리에 대한 호감과는 거리가 멀다. 소리가 없는, 침묵은 또 다른 소리이다.

목도리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며칠을 눈에 밟혔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지금 누구인가의 목을 한창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러했듯 영원한 사랑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관조적 자세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상황과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관성의 법칙과도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건조하게 내뱉는 시인의 목소리가 메마르다.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상실감보다 상상에 근거한 목도리의 행위가 주는 비애는 배신감이라기보다 연민에 가깝다.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비온 뒤에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진흙처럼 좀체 떨어져 나가지 않는 지긋지긋한 그리움과 지금, 이 순간에 가지고 있는 이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질 날은 가까운 미래이거나 과거의 어느 날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사랑에 공감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그때 몰랐’던 것들을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는 미완성의 문장이 긴 여운보다 무미건조한 모래 바람을 일으킨다.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의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06031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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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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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로 떠오르는 꿈은 어린 시절 우리 모두가 꾸던 꿈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에 불가능한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만 간다. 그것은 강요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깨달은 것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거나 소망과 희망을 넘어 욕심과 욕망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로 돌아가 황당한 공상에 빠져 보기도 한다. 가장 흔하게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날개가 있든 없든, 그 과정이 어떠하든 하늘로 날아올라 현실을 벗어나 어딘가 먼 곳으로 가버리고 싶은 공상은 어린시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꿈은 성인이 되어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구체적인 일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은밀한 욕망을 꿈꾼다.

  그 중에 하나가 글쓰기인 사람들을 위한 책도 이젠 제법 많이 출판되고 있다. 그 목적과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을 선택해야함은 물론이다.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글쓰는 방법을 ‘공중부양’으로까지 승화(?)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법과 고민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외수의 것이지 독자들이나 타인의 것으로 확장시키기엔 너무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장인정신으로 습득한 노하우를 그렇게 쉽게 타인에게 전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우는 사람이든 가르치는 사람이든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이외수도 그 불가능의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열심이지만 역부족이다. 설명 부족이 아니라 전이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메울수는 없다.

  이외수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쯤이다. <내 잠속에 비내는데>를 읽은 어머니의 소개로 처음 만난 이외수는 기인이었다. 평범을 거부하는 삶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가 되어야 이발을 하고, 거지처럼 춘천에서 글을 쓰기 위해 몸부림 치던 시절과 미스 강원과 결혼한 연애사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어린 맘에 깊게 각인되었다. 이후 <꿈꾸는 식물>, <개미귀신>, <칼>, <겨울나기>등을 읽고 수필집 <말더듬이의 겨울수첩>에서 보여준 그의 감수성에 사로잡혔다. 10대 문학 소년의 감수성에 맞춤한 그의 언어는 지나치게 예리하고 깊이 영혼의 울림을 주었다. 감성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하다고 인정해버렸다. 그 시절의 인연으로 시집 <풀꽃, 술잔, 나비>, 소설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장외인간>, 산문우화집 <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외뿔> 등 그의 글들은 거의 모두 읽고 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제자리에 머물러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답답하기 보다는 순수하다고 믿는다. 소설의 미덕과 문학성을 논하기 전에 짙은 그리움처럼, 혹은 춘천의 안개처럼 그가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다분히 개인적 취향이거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해도 그에게 진 빚은 많다.

  이외수의 글쓰기의 특징은 장르를 불문하고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따뜻한 감성에서 출발한다. 현실을 뛰어넘고 싶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비현실적인 몽환적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본성들을 들추어내는 일이다. 이외수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물들 사이에 감추어진 그 영혼의 울림을 들어 보라고. 그 소리를 듣거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육안과 뇌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꼬집는다. 심안과 영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그의 글쓰기는 누구나 공감하기 어렵지만 천진한 어린아이의 시선과 순수하다는 추상명사가 주는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오랫동안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지도해온 소설가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눈높이에 맞추기 쉽다는 장점을 지닌다. 대상과 방법이 명확한 글쓰기 강좌는 오히려 명쾌하다. 철저하게 문학적인 글쓰기에 목적을 둔 이 책은 이외수가 생각하는 나름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구성, 창작 방법까지 일반론 수준에서 글쓰기 책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 대체적으로 중 ․ 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이나 글쓰기의 기초를 알고 싶은 정도의 호기심 수준에서 가볍게 읽어 볼 만한 정도다.

  이외수의 특별한 글쓰기 노하우를 전수 받고 싶거나 본격적인 글쓰기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직접 ‘격외선당’을 찾아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될 듯하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진심을 가지고 한 발짝 다가서서 보면 된다. 지속적인 노력과 열정이 있을 때 던져주는 작은 麗?하나, 방법 한 가지는 소중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루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조금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제 이런 종류의 책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춘천교대를 중퇴했지만 남을 가르치는 일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쪽이 훨씬 그에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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