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고향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애와 같다. 타향이 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가 다 타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 P. 148 마술이나 환상을 믿고 싶은 사람들은 현실을 향한 욕망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든, 욕망이라 부르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가능성과 개연성을 뒤로한 채 꿈을 꾸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그 욕망의 공통성이다. 외면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 욕망을 넘어 생에 대한 열정이 되고 시간의 흐름을 더불어 한 개인의 속성이 된다. 현실에 대한 다양한 인식 방법과 욕망의 표출 방법은 감춤과 숨김으로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감춤과 드러냄의 누빔점에 소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버린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의 누런 표지를 가끔 물끄러미 바라본다. ‘책읽기’는 과연 행복한가. ‘소설은 왜 읽는가’라는 글에서 김현은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이 대립하는 접점에 위치한 호기심의 자리에 놓인 소설은 여전히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형태의 관음증을 제공한다. 살아보지 않은 생에 대한 열망과 내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절망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즐기기도 하고 안도하며 현실속의 나와 끝임없이 차별화하거나 동일시한다. 감정이입은 시에 사용되는 표현기교이기도 하지만 문학을 ‘하는’행위의 기본적 속성이기도 하다. <마이너리그>이후 오랜만에 접하는 은희경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스토리보다 서사구조가, 문체나 구성보다 짤막한 단상과 생에 대한 잠언적 경구가 돋보인다. 독자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인생을 통달한듯한 격언을 던져넣는 방식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문장 속에 어색하지 않게 툭툭 던져지는 말들이 예민한 감수성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단아함을 넘어 투명한 레이스로 장식한 화려함을 소설들에서 찾을 수 없는 단면을 보여준다. 제 색깔을 드러내는 과정인 작가의 목소리는 강경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다만 흡인력과 탄탄함이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진다. 소설 속 영화 제목으로 사용된 <비밀과 거짓말>은 치정극도 아니고 멜러물도 아니다. 영준과 영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확인하는 생의 비루함이다. 그것을 뭐라 표현하든 ‘생’은 빛나지도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추하거나 더럽지도 않다. 그게 그저 사람의 생일 뿐이다. 그 애가 감추려는 데 진실이 있어요. 때로는 거짓말이 사실보다 더욱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구요. 거기 붙여놓은 비밀이라는 봉인을 떼지 마세요. - P. 162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질 때가 있다. 일말의 의심도 의혹도 없이 모든 사람이 믿어버리는 그 혹은 그녀의 말은 진실인가. 봉인을 떼지 말라는 소설 속 전언은 현실에 적용될 때 더더욱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미칠 것 같은 일에 분노하지 말라.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 거짓이 사실보다 더욱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사람들이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오래 음미하는 대신 밑줄을 그어보고 머리와 가슴을 지나 손끝에서 처리되는 감정이 되어 버렸다. 죽음이 모든 진실을 밝혀주지도 묻어주지도 않는다. 생이 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스런 많은 사람들과 말과 글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는 소설보다 아름다운, 혹은 소설보다 강렬한 비밀과 거짓말이 숨어 있다. 퍼즐처럼 조각난 생의 비밀들 속에서 아직도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영준과 영우의 아버지 정욱에 대한 사실들은 이 소설이 전하는 진실과는 한참 먼 거리에 있다. 소설 속의 영화로 제작되는 ‘비밀과 거짓말’이 전하는 진실은 숨은 그림처럼 모두의 가슴속에 숨어 있다. 주변을 돌아보라. 그리고 거울을 보라.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과연 모두가 진실일까. 어쩌면 객관적 진실보다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 진실이 더 진실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면 그럴 만한 필요가 있는 것이다. - P. 28306031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