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거미의 사랑 창비시선 259
강은교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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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셋이

빗방울 셋이 만나더니,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 덩이들을 생각하며 분개하더니,
분개하던 빗방울 셋 서로 몸에 힘을 주더니, 스르르 깨지더니,

참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 하나가 되었다.

  오랜만에 나온 강은교의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의 서시다. 하나되는 사랑, 분개하던 나와 네가 만나 하나되는 아름다움이 이 시집의 전하는 메시지다.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정답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각자 주장하는, 혹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의 순간순간 느껴지던 그 아름다움은 나의 존재 방식이기 이전에 타인과의 관계맺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다.

  <허무집>과 <풀잎>, <빈자일기>로 이어지는 강은교의 시의 절정은 더 이상 예민한 촉수와 감각적이고 치열한 정신을 동반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느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혼란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했던 강은교의 시도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까. 시인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언어에 대한 참신한 감각과 전통에 대한 관심은 편안하지만 즐겁지 않다. 특히, 3, 4부로 모아놓은 가야 소리집과 행사시들은 깊이있는 울림보다 전통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어울림 정도로 그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지는 않는다. 풀잎에서 보여주던 명징한 언어도 깊은 성찰도 희미해져 간다는 것은 독자의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희미해져가는 빈 자리를 채워가는 다른 방식이다.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는 물론 시인의 몫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어떤 변화인가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를 확인하고 관찰하는 것은 독자의 즐거움이다. 그 변화와 태도가 긍정인가 부정인가는 시인이 선택할 몫이고 독자가 평가할 몫이다. 다른 시인 일반에 적용되는 문제가 강은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은 ‘소리’이다. 귀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소음이다. 고요 속에 빛나지 못하는 침묵은 또 다른 소음이다. 시인은 ‘소음’과 ‘침묵’ 사이에 서성거린다. 귓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은 특정한 소리에 대한 호감과는 거리가 멀다. 소리가 없는, 침묵은 또 다른 소리이다.

목도리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며칠을 눈에 밟혔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지금 누구인가의 목을 한창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러했듯 영원한 사랑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관조적 자세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상황과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관성의 법칙과도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건조하게 내뱉는 시인의 목소리가 메마르다.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상실감보다 상상에 근거한 목도리의 행위가 주는 비애는 배신감이라기보다 연민에 가깝다.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비온 뒤에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진흙처럼 좀체 떨어져 나가지 않는 지긋지긋한 그리움과 지금, 이 순간에 가지고 있는 이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질 날은 가까운 미래이거나 과거의 어느 날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사랑에 공감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그때 몰랐’던 것들을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는 미완성의 문장이 긴 여운보다 무미건조한 모래 바람을 일으킨다.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의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06031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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