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 모델이 미래를 결정한다 워튼스쿨 경제경영총서 1
제리 윈드 외 지음, 류동완 옮김 / 럭스미디어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동생이 번역한 세 번째 책이다. 기억을 위해 몇 자 적어둔다.

작년 봄에 읽은 책이다. 번역한 초고의 비문과 맞춤법 등을 교정해 주면서 읽었던 책이라는 뜻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원고가 책이 되어 돌아왔다. 번역과 대학 강의를 하고 있는 동생에게 이제야 책을 건네받았다. 워튼스쿨 경제경영 총서 중 하나인 <멘탈 모델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책이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번역한 대한 객관적 평가는 불가능하다. 또 다른 도약을 위해 인내와 준비를 하고 있는 동생의 앞날에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길 바랄 뿐이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도 아니고 좋아하는 분야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라는 식의 책은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미래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는 실용서와도 조금 거리를 두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많은 문제와 좌절 상황들을 ‘멘탈 모델’들을 통해 교정하고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책이다. 물론 충분한 검토와 노력의 과정은 필수적인 요건이다. 하지만 단순히 무턱대로 열심히 노력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분명 방법과 시기가 있고 미래를 향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060212-0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멘토에게 배운 것
스티븐 K. 스코트 지음, 류동완 옮김 / 더난출판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동생이 번역한 네 번째 책이다. 기억을 위해 몇 자 적어둔다.

‘멘토’는 보통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를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도 ‘멘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일 것이다.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멘토’는 오디에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한 10여 년 동안 그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맡아 친구이자 선생, 상담자로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물론 멘토는 꼭 곁에 있을 필요도 없고 사람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찾아낸 것 중의 하나가 책이다. 가장 훌륭할 수도 가장 멍청할 수도 있는 아이러니한 멘토가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의 CEO중 여덟 번째인 스티븐 스콧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고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든다. 인생은 그렇게 작은 출발선 상의 차이부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물론 극적인 반전과 ‘돈오’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방법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회적인 성공과 경제적인 부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적다. 별로 부러운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060212-0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 Kafka Franz
박홍규 지음 / 미토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징벌
  - 카프카, 나의 카프카 12

 1

어둠이었습니다. 세상은
열리지 않는 門 이었습니다

어둠 한 조각 도려내어
한 줄기 길을 트려 하였습니다
눈빛만 벼렸습니다. 새파랗게

 2

거미줄 迷路
내 손바닥에 펼쳐져 있습니다

 3

눈이 아픕니다
죽도록 벼려온 어둠의 칼
나 이제 허덕이며
엎디어 받습니다

나 아직도
門 앞에 있습니다 무쇠門 앞에

  94년 여름 민음사에서 나온 독문학자 전영애 시집 <카프카, 나의 카프카>를 오랜만에 꺼내본다. 이 시집 이후 그녀가 계속 시를 쓰고 있는지 어떤지 난 알지 못한다. 박홍규의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를 읽다가 거론된 그녀의 이름 때문이다. 이 시집을 산 이유는 오로지, 제목 때문이었다. 그녀가 카프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망은 ‘글쓰기’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을 뿐이었다. 카프카를 전공했고 프라하에 다녀온 그녀의 이야기는 오로지 ‘카프카’를 위해 바쳐져 있다. 얄팍하고 빛바랜 그녀의 시집은 오래된 카프카에 대한 기억의 조각을 꺼내게 했다.

  카프카 전집 발간사에 소개된대로 카프카는 ‘불안과 고독, 소외와 부조리’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박홍규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간 전영애와 같은 독문학자들과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분석되어진, 혹은 규정되어진 카프카를 재해석하기 위해 이 평전을 썼다. 저자의 초점은 분명해 보인다. ‘권력과의 투쟁’이 그것이다. 가깝게는 가부장적 권위에서부터 멀게는 국가 권력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찾아내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법을 전공한, 글쓰기를 병행하는 박홍규 교수가 카프카에 대해 느끼는 동질감과 개인적 애정은 각별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어쨌든 ‘평전’이라는 형식은 객관화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면 또 다른 시각에서 카프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는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생을 마감했고 모든 원고를 태워달라고 부탁한 친구 브로트에 의해 빛을 본 작품들도 많다. 1937년과 1957년 두 차례나 그의 평전을 썼던 친구에 의해 말해지는 카프카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카프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과 그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 입장이든 사회주의적 시각이든 심리학적 분석이든 간에 카프카는 20세기에 가장 주목받은 텍스트가 되었다. 체코인으로 태어나 프라하에서 거의 전 생애를 마감한 그의 생은 같은 유태인이면서 20세기의 천재로 추앙받는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 마르크스와 더불어 플러스 알파가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엔 공감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모든 평전이 그러하겠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평전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카프카의 생을 음미해보고 작품을 이해하며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읽을 필요가 없다.

  더구나 카프카의 작품을 분석하기 위한 평론가의 평전은 표현론적 관점에서 작품과 그의 생애를 직접 연결시켜 분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박홍규는 순수한(?) 카프카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쉽고 단순하게 카프카를 표현한다. ‘나의 친구’라는 표현이 그렇다. ‘불안과 고독’이나 ‘소외와 부조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을 관찰하고 모든 권력에 대한 거부의 몸짓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어내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해야 할 부분들도 많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전공을 위한 것도 평론이나 작품 분석을 위한 것도 아닌 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책이기 때문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전방위적 독서와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박홍규의 ‘카프카’ 이야기는 결코 가볍고 만만하지 않다.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카프카와 그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있게 그리고 알기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 소상하게 밝혀 적고 있다. 카프카의 생애와 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지적이다. 특히,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용하면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 가정환경과 가족관계는 그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사랑했던 은 여인들과 41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는 고스란히 문학에 대한 열정과 작품 세계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다만 개별적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당연히 저자는 카프카에 대한 진한 애정과 깊이 있는 관련 문헌들에 대한 꼼꼼한 분석으로 카프카를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미 열 다섯 살의 카프카는 엄청난 독서가이고 격렬한 토론가이며 게다가 당시로서는 가장 위험한 사상으로 여겨진 사회주의자였다. - P. 189

  저자가 카프카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는 문장이다. 카프카에 대한 평가는 그 개별적인 의미를 넘어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의 난해하고 어려운 해설과 감상의 길잡이 때문에 오히려 어렵고 딱딱한, 이해하기 힘든 작가로 여겨지는 카프카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의 일기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전하는 다음 구절은 ‘문학’과 ‘독서’에 대한 주먹질로 이 평전을 통해 오래 기억될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사의 문제라기 보다도 민중의 문제다”(1911년 12월 25일 일기) - P.271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들의 머리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해서 각성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바겐바하, <카프카>, 51-52쪽 재인용) - P. 274


060212-0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산 정약용 - 유학과 서학의 창조적 종합자 e시대의 절대사상 5
금장태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완벽한 하나의 사상이 태어났다는 가정은 거짓이다. 기준이 없는, 비교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전해지는 사상이나 제도가 완벽해지는 날은 없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명멸했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도저히 답이 없을 것 같은 지협적인 문제에 목숨걸고 사소한 사건에 생의 전 존재를 거는 무모함 뿐이다. 그것이 삶이다. 모두가 그렇다.

  안개 자욱한 하늘 아래 강진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다산 정약용은 200여년전에 어떤 생각을 하며 바다를 보았을까 생각해본다. 중국의 경서를 꼼꼼하게 해석하는 것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던 유배지에서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만 간다. 신영복 선생처럼 감옥에 갇혀 있지는 않았지만 두 분이 똑같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세상에서 유배당했다. 학문적으로 154권 76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긴 다산은 유학과 서학의 ‘창조적 종합자’라는 부제에 어울린다. 75년이라는 짧지 않은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생에 대한 관점도 생각도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신유년 벌어진 종교적 탄압이나 지인들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또 다른 상처와 개인적 고통을 전제로 한다. 남인 시파인 자신의 정치적 배경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천주교의 부당한 측면을 스스로 비판해가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뇌를 평생 간직했을 것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19세기 초 조선 사회의 단면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기예론이나 탐진촌요와 같은 빙산의 일각으로 다산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찌껄이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만나게 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더 간절해지는 이유다. 이 책의 저자 금장태는 다산의 삶과 사상의 핵심과제, 그리고 현재의 유용성에 대해 정리한 후 2부에 다산의 글들을 실어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살림 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가 어떤 목적으로 시작되었든 깊이와 넓이를 확보할 수는 없었지만 피상적으로 혹은 장님이 만지던 그것이 코끼리가 확실했다는 증거 정도는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다산에 대한 저자의 평가 몇 가지를 살펴 본다.

  정약용은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전통적 사유방식과 제도를 관찰하면서, 곳곳에 배어 있는 불합리하고 비능률적인 사유의 관습과 허위성을 철저히 성찰하여 깨뜨리고 있다. - P. 106

  정약용은 실학적 사유의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상조류를 수용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서양의 과학기술이 지닌 합리성과 효용성의 자연과학적 사유를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 - P. 107

  정약용의 경학에는 성리학적 해석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물론이요, 양명학 ․ 고증학 ․ 서학의 다양한 이론과 방법의 섭취를 통해 독자적 세계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으로, 실학파 경학의 결정판을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P. 112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란 바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하늘로 인식하면서도 인간관계의 사회적 규범인 인륜이 바로 천명(天命)임을 확인하고, 인간 존재의 실현이 바로 인간관계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 P. 118

  그는 “나에게는 소망하는 바가 있다. 온 나라가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온 나라에 양반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차별적 신분제도를 전면적으로 타파하고 인간의 사회적 평등을 확립하는 이상을 자신의 소망으로 밝히고 있다. - P. 129

  학자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 다산의 면모를 살펴보는 일은 다른 누구와도 마찬가지겠으나 현재적 유용성 때문이다. 책 속에 묻혀버린 수많은 과거의 인물들과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의 반성적 태도를 확인하게 하는 시금석이 된다. 신분제도가 타파되었으나 여전히 계급은 존재하며, 인간 존재의 실현이 사회적 실현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합리와 능률을 중시하고 사유의 관습과 허위성을 깨뜨릴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산의 전 생애를 통해, 특히 유배지에서 보낸 18년 동안 노자의 말을 빌어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뜻의 여유당을 지은 뜻은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 신중하고 경계하는 태도가 현실 정치에 몸담았던 사람으로 실현 가능성을 염두해 둔 자세였는지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다양한 해석과 접근 방식이 아니라 다산의 저작을 직접 읽어 볼 일이다.


060214-0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뮬라시옹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상을 꿈꾼다. 가정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공상속에서 나만의 세계를 즐긴다. 자끄 라캉이 구분해 놓은 실재계와 상징계의 혼동은 휴머니즘과 진보를 모토로 출현한 모더니즘의 연상선상에 놓여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도 여기에 속한 범주로 이해하면 개념이 혼동일지 모른다. 내게는 그렇게 읽혔으니 바로잡는데 시간이 걸려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변과 경계를 즐기는 버릇은 책읽기에도 곧잘 반영된다. 현실과 환상의 핵심에서 벗어나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지금, 여기를 기점으로 모더니즘이 출발했다면 보드리야르는 ‘지금, 여기’의 실체에 대한 역설을 반복한다. 전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는 이 책은 끝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개념으로 활용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전도서

  벤야민이 말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의 개념과 홀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부터 비롯하여 기계기술의 발달과 현대 사회의 왜곡된 현상들을 해석하는 보드리야르의 시각과 해석은 독특하다. 그의 개념에 동의하느냐 문제는 별개다. 현대사회를 통찰하는 시선의 낯선 방향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유발하는 것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다.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시뮬라트르’가 참된 것이라는데.

  시뮬라시옹은 환상과 허구다. 그러나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조작된 현실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미지도 결국 실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실재를 감추고 변형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혼동 속에서 대중은 실재보다 이미지에 집착하고 현혹된다. 때로는 실재의 부재를 감출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박제된 현실 속에서 환상과 이미지를 찾아 떠나는 피곤하고 긴 여행중인 현대인들의 나른한 일상을 비추어 볼수 있는 프리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시뮬라시옹’은 아닐까.

  텔레비전과 ‘홀로코스트’, 영화와 ‘충돌’이 빚어내는 시뮬라크르는 역사와 현실은 넘어선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모방된 이미지와 개념을 오히려 현실이 따라야 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끝임없는 쏟아지는 광고와 자본은 인류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딘가를 어떤 모습으로 걷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도록 하는 집단 환각제를 마신 것같다. 실재계와 상징계는 슬라보예 지젝의 표현대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치환되었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실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해 왔고, 그 속에서 헐떡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모방된 현실과 가상 현실은 인간관계도 변화시켜 버렸다. 네트웍과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보드리야르가 바라본 이미지와 실재의 괴로보다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미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말한다 : 의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서 의미가 자신의 일시적인 지배를 강요했던 것, 의미가 빛들의 지배를 강요하기 위하여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것, 즉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유혹이 시작된다. - P. 252

  이 책의 마지막이다. 무의미와 허무의 유혹만큼 강렬한 환각은 없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유혹은 여기서 시작된다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이다. 모호한 언술로 대중을 농락하는 철학자의 말장난이 아니라 뒤돌아보지 않고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경종을 귓가에 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인간의 실존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론 측면에서, 혹은 사회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개념과 논의들은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모습이다. 안다는 것만으로 부족한 2%는 우리 모두가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무질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질서’가 가져오는 소외와 폭력적 외로움을 전하는 듯한 브레히트의 말이 오히려 가슴에 오래 남는다.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곳,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그곳, 이것은 질서 : 브레히
트 - P. 241


  윤난지의 <현대미술의 풍경>을 읽다가 개념이 잡히지 않아 읽게 된 책이다. 변죽만 울리고 정확한 개념을 알지 못한 채 인용과 재인용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는 책들과 개념들을 다시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하이퍼링크 책읽기’의 즐거움이다.


060215-0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